소설리스트

헬하운드-33화 (33/79)

〈 33화 〉 2 / 인면수심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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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용사 에스텔.

지금은 여신의 곁으로 돌아간 그녀의 순례는 노래가 되어 많은 이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그 노래에는, 별처럼 빛나던 순례를 뒤따르던 네 명의 일행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일단 나에 대한 건 생략하고.

한번 화살을 쏘면 와이번조차 참새처럼 쏘아 떨어뜨리는 궁수, 다룰 수 없는 주문이 없다고 알려진 마법사와… 죽음의 문턱에 이른 자조차 되살려낼 수 있다는 사제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마왕 토벌 후 뿔뿔이 각자의 길로 흩어진 뒤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렇기에 해후는 반가움이 앞선 뒤 의혹이 그 뒤를 따랐다.

“…이런 데서 만날 거라곤 전혀 상상도 못 했다.”

“사람이란 누구나 주어진 상황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니까.”

“회포를 풀기엔 장소가 영 아닌걸.”

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여신을 모시는 종으로서, 가장 임해서는 안 될 곳에 있는 자신의 처지에 쓴웃음이 나올 법도 했다. 엘프 노예를 거래하는 경매장과 현자라 불리는 사제라. 파계라도 한 건가?

나르콜렙시는 상당히 불편한 모양인지 얼굴을 표독스레 일그러뜨린 채 그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이네, 현자 군.”

“오랜만입니다. 몽마… 이름이 아마 나르콜렙시였죠. 하이엔과 같이 다닌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쉽게 믿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째 분위기가 변했네?”

한창 날이 서 있던 예전 같았으면, 분명 지금쯤 나르콜렙시에게 거리낌 없이 신성 주문으로 공격했겠으나… 무슨 일이 있었는지까지는 짐작할 도리가 없어도 지금은 마냥 적대하려는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나르콜렙시 또한 상당히, 그 사실을 의외라는 듯 받아들이는 모양이다.

“여신께 불려갔다가 살아나기라도 했어? 그 독실하던 현자께서 눈앞의 마라를 그냥 놔두고 있으니 뭔가 잘못 먹은 정도가 아닌 것 같아서.”

“당신들도 결국 여신의 아이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만 해 두죠.”

나르콜렙시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이 녀석은 변했다. 병적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창백해진 피부톤도, 다소 마른 손을 소매로 감추는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후드 아래에서 음울함이 드리운 눈에 오히려 현자라고 불리우던 예전과 다른, 세상에 대한 냉소와 비관을 담았다.

후드로 깊게 눌러쓴 그의 목소리도 예전과 비교했을 때 다소 탁해졌다. 삼라만상, 만물을 여신에 대한 신앙심에서 순수하게 바라보던 녀석이 이렇게까지 변했다면… 분명 사연이 있었겠지.

예를 들면,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죽음에서 되돌아왔다던가, 아니면 그에 준하는 모종의 시련을 겪었다던가.

“아질과 사라에 대한 것은 알고 있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자신이 모르는 일조차 입에 담는 것이 마치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얼마 전 무사히 아이를 출산했다. 그 뒤로는 바람숲으로 향한 것 같더군.”

“…자세히 알고 있구만?”

“그가 수고해줬지.”

하프라고는 해도 오우거, 그리고 반쪽짜리 엘프. 그들의 존재를 윈드 엘프들이 잘 받아들여 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모쪼록 무사하길 바랄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유스티카 공녀님. 절 기억하시겠습니까?”

“…네. 현자님.”

“지금은 그렇게 불릴 자격을 잃은 몸입니다. 그저 윌리엄이라고 불러주십시오.”

녀석은 당연히 레오레와도 구면이었다. 구면이라고 해도 전대 유스티카 당주, 그러니까 레오레의 아버지와 만났을 때 아주 잠시 인사를 나눴을 뿐이지만. 둘 다 여신의 독실한 신자이니, 그런 면에서는 서로 잘 맞을 법도 했다.

“그보다, 현자 군.”

나르콜렙시가 한쪽 눈을 찌푸린 채로 입을 열었다.

그녀의 시선은 윌리엄의 옆에 서 있는 E의 얼굴에 꽂혀있었다.

미심쩍어하면서도, 의문스러워하면서도, 그 의문이 확신으로는 번지지 못해 답답해하는 것이 옆에서도 보일 정도다.

“저쪽은 누구야? 슬슬 그쪽 일행도 소개시켜줘야지.”

“아아, 그렇죠. 하이엔과는 구면이어서 조금 타이밍을 재고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순순히 사과를 하는 윌리엄의 태도에 나르콜렙시는 여전히 불유쾌한 표정이었지만, 더 쏘아붙일 동력은 잃은 것처럼 보였다.

E는 그저 윌리엄의 옆에서 슬그머니 웃음을 머금은 채, 여전히 수도녀의 복색인 그대로 입가만을 드러냈다. 자신으로서도… 뭐라 말할 수 없는 위화감을 느끼고 있던 차이다.

“그녀는 E입니다.”

지금 장난하냐?

나르콜렙시에 이어 나도 꽤 불쾌하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자, 녀석이 서둘러 덧붙였다.

“죄송합니다. 놀리려 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지금은 그렇게밖에는 말할 수 없어서 말이죠. 그저 그렇게만 알고 불러주시기 바랍니다.”

“…저 여자, 정말로 인간이야?”

뭔가 냄새를 민감하게 맡은 양 낮게 읊조리는 나르콜렙시는 특별히 대답을 바라지 않는 눈치였고, 윌리엄도 구태여 대답하지는 않았다. …나로서는 나르콜렙시가 한때의 적이었던 윌리엄보다 E의 존재에 더 마음을 쓰는 이유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나중에 물어볼 수밖에.

“이쪽은 제 호위를 맡아주고 있는 용병… 통칭 ‘늑대원숭이’ 씨입니다. 여러 가지로 신세를 지고 있죠. 하이엔, 너와는 구면이었다지?”

“별로 좋은 첫인상을 주진 않았지, 서로.”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면서 등에 멘 흉검의 칼자루를 한번 쥐었다가 놓자, 늑대원숭이의 눈도 가늘게 뜨인 채 경고처럼 철컥, 허리에 찬 두 자루 칼집을 갈무리했다.

슬그머니 흉흉해지려는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싶었는지 윌리엄이 한 걸음 나섰다.

“죄송합니다만, 잠시 둘이서만 이야기해도 되겠습니까?”

나르콜렙시는 여전히 탐탁치 않은 표정으로 윌리엄과 E, 늑대원숭이… 조금 되짚어보면 꽤 이색적인 현자 일행을 별로 곱지 않은 눈으로 보고 있었다. 너무 그렇게 보지 마라. 저 녀석들이 보기엔 이쪽도 별난 파티로 보이는 건 매한가지일 테니까.

“잠깐 기다려라. 나름대로 쌓인 이야기가 있으니까.”

“알았어.”

휴우, 한숨을 쉬면서도 어찌어찌 받아들인 나르콜렙시는 그대로 침대에 다리를 거만하게 꼬고 앉았다. 서글서글하게 굴던 녀석이 저렇게 고압적으로 구는 걸 보면, 윌리엄과 E라는 여자는, 어지간히 밉보이긴 한 모양이다.

아무튼, 브랜디 한 잔씩을 챙겨서 발코니로 나왔다. 커튼 한 장으로 방과 발코니가 나뉘어졌을 뿐이지만, 마치 둘만 남게 되자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조금 음울했던 녀석의 얼굴에 안도가 떠올랐다.

“그 녀석들한테 얼굴이라도 한번 비춰주지 그랬냐. 어차피 보고 있었나보구만. 반가워했을 텐데.”

“그럴 수가 없었어.”

전보다 생기를 잃은 조금 마른 손가락이 후드를 내리자 탁한 잿빛 머리카락이 밤바람에 슬쩍 휘날렸다. 뒷머리는 땋은 채 늘어뜨린 채, 앞머리 아래 눈도 혼탁한 그림자가 드리워있었다.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대충 알 것도 같았다.

아마 자신과 비슷한 사연이 아닐까. 내린 후드 아래, 하얀 목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멍자국은 녀석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래서야, 목소리도 변할 수밖에.

“너도 목이 잘렸었다는 얘기를 들었어. 너나 나나 비슷한 신세가 됐지.”

“한쪽은 반역자로 참수형, 한쪽은 배교자로 교수형. 세상일이 참 좆같구만.”

흥, 하고 브랜디를 목 너머로 넘겼다.

술 한 잔이나마 마실 수 있다는 게 어디랴. 나야 내 목숨값을 받아냈다지만, 이 녀석도 그럴 수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대충 추측해보자면…

마왕을 물리친 뒤 율령교회로 돌아간 녀석의 존재는 다른 고위 사제들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혹은 이용하기 좋은 대상으로 보였을지도 모를 것이고.

자신이 아는 한 이 녀석은 지나치게, 현자라는 이름답지 않게 순수한 구석이 있었기에 그 어느 쪽의 욕망이 바라는 대로도 움직여주지 않았을 것이고, 결국 누구의 비호도 받지 못한 끝에 이단으로 몰려 숙청당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신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는 게 용할 정도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이엔, 넌 왜 여기에 온 거지?”

…내가 물을 말을 먼저 물어오는 바람에, 이쪽에서 찌를 기회를 놓쳐버렸다.

조금 입을 다물자, 녀석은 브랜디를 한 모금 마시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넌 특별히 금욕적인 녀석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런 곳에 발을 들일 만큼 방종한 녀석도 아니지. 무엇보다….”

“야, 그 녀석 얘기를 할 거라면 관둬. …난 그냥 여기에 빚을 갚으러 온 거야.”

“아아, 그러고 보면 여기 영주가 위독하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신세를 졌었지.”

“병문안도 가 보지 않을 셈이냐? 매정한 자식.”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잔과 잔이 쨍, 부딪혔다.

반쯤 고인 브랜디가 찰랑거렸다.

“그러는 넌 여기 왜 온 거냐? 난 금욕적이지 않지만 넌 누가 봐도 그런 자식이잖아.”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부딪힌 잔을 거둬들이곤, 브랜디를 마저 마시면서 술기운을 내뱉듯 윌리엄이 후우, 숨을 내쉬었다. 녀석은 조금… 망설이고 있었다.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단순한 노예 밀매가 아니야. 이 일의 뒷배에 서 있는 자는… 오늘 밤 무언가를 하려 한다. 난 그것을 확인하려고 온 거고.”

“…브란이라는 영주의 아들 말이냐? 돈이 필요한 사정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아니, 윌리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니야. 나도 아직 완전히 파악한 게 아니라, 무엇이라 말할 수는 없어. 하지만 분명 오늘 밤 무슨 일이 일어날 거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었다가, 그는 한 다발의 묵주를 꺼내 내밀었다. …난 별로 여신이랑 친하지 않은데.

“수호부야. 배교자가 만든 거라 못미덥다면 버려도 좋지만, 어지간한 마법 간섭은 막아줄 거다.”

“현자라고 불리던 녀석이 손수 만든 거라면 오히려 여기서 사고파는 노예보다 비쌀지도 모르는데? 나중에 팔아서 여비에 잘 보태주마.”

무엇인가 쓸모가 있겠지. 수호부는 주머니에 쑤셔넣고, 남은 브랜디를 마저 삼켰다.

빈 잔을 내려놓기를 기다린 뒤, 조금 입술을 달싹거리던 윌리엄이 중얼거리듯 읊조렸다.

내가 듣지 못해도, 상관없다는 것처럼.

“하이엔, 충고 하나쯤은 해 두겠어. 이 일에서 손을 떼고, 지금 즉시 윈돌을 떠나.”

“…무슨 소리냐?”

“말한 그대로야. 오늘 밤 이 도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너희 일행을 데리고 윈돌을 떠나. 그게 아니라면….”

그날 밤, 처음으로… 이 녀석의 진심을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오늘 밤, 날 도와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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