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 2 / 인면수심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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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편에서도 얘기했었지만 레오레에게는 어지간히 힘든 시간이었던 모양이다.
누가 그랬던가. 옷 중에서는 차라리 홀딱 벗는 것이 오히려 덜 음탕해보일 정도로 천박하고 퇴폐스러운 것도 있다고. 그 말이 가감 없는 사실임을 깨닫고 있는 시간이었다. 말이나 지식이 아니라, 그 몸으로 직접.
“이, 이런… 이런 추잡한 꼴을, 내…가, 으, 윽….”
나름의 각오는 하고 따라온 것이었겠으나 그 각오는 사실 처음부터 그리 오래갈 것이 못 되었으니까.
갑옷이란 본디 몸을 빈틈없이 가리고, 그 몸을 적이 휘두르는 창이나 칼, 날아오는 화살로부터 보호하는 물건이라고 뿌리 깊게 여기고 있었을 것이다.
가임기에 이르러 풍만하게 물이 올라 맞아들일 상대를 기다리고 있는 성숙한 여성의 몸.
갑옷과 수련, 무인이라는 껍질을 잠시 내려놓아야 했다. 물론 본의는 아니지만.
살이 꽉 차올라 풍만하게 부풀어오른 젖무덤을 금속판의 면적이 심하게 작은… 브레스트 아머…가 조여들었다.
허벅지 사이, 고간에도 비슷하게 자그마한 금속판이 국부를 겨우 가리고, 믿음직스럽지 못한 가죽끈으로 고정되어있었다.
…허리춤에 매달린 매듭이 심하게 헐거워, 어딘가 실수로 부딪히면 위든 아래든 벗겨지기 쉬워보였다. 혹은 그러라고 만들어진 의상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뭣보다 재질이 방호력은 전혀 기대할 바가 못 되는 싸구려 잡철이었으니까.
금실 같은 머리카락이 찰랑거리는 머리에는 작은 날개가 달린 보관이 씌워졌다. 그것까지 갑옷 장비 일체. 입고 나자 레오레는 울 듯한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꼭 저렇게 변태같은 꼴로 입어야 하는 거냐?”
“흐음. 역시 소재가 소재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이쪽 계열로 소개해버리고 말았네. 다시 추천해줄까? 손님.”
아마 오늘 밤 경매와 어떠한 커넥션이 있어보이는 뒷골목의 옷가게 주인은 자못 흡족스러운 얼굴로 품평을 내렸다. 레오레의 의견은 아무래도 상관없나 보다.
“검성 군~ 여기 좀 봐 줘.”
“……얼마지?”
“무시하지 말고!”
등 뒤에서 들리는 나르콜렙시의 목소리는 일단 무시하고 값을 치르기 위해 옷가게 주인에게 몸을 돌린 그대로 지갑을 열었다. 부르는 대로 값을 치르고, 뒷걸음질로 나갈 수는 없었기에 몸을 돌리자, 잔뜩 골이 난 나르콜렙시의 얼굴이 가까웠다.
“보라고 말해도 어차피 평소 그대로잖아, 너.”
“호오, 호오. 평소에도 그런 옷을 입히는 거야? 그쪽도 제법 취향이 하드….”
“그런 거 아니니까 좀 닥치쇼.”
나르콜렙시는 당연하다고 해야 할까…
온몸에 쫙 달라붙는 새카만 가죽끈 뭉치를 칭칭 동여매고 있었다. 그뿐이다.
저걸 옷이라고 이해하길 내 머리는 거부할 정도였으니까.
“으음. 훌륭해, 훌륭해. 아담하면서도 글래머러스해서 의상을 완벽하게 소화하고 있어. 페티쉬를 자극하는 배덕감. 흔치 않은 머리색이라서 그런지 하얀 피부와 검은 가죽끈, 그리고 타이즈와 장갑, 족쇄가 아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고 있어. 완전 당신을 위해 태어난 옷 그대로라고.”
“그럼 저 녀석을 위해 태어난 옷 가격은 좀 빼주던가.”
“가격은 여신께서 정하시는 것이거든.”
투덜거려보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나와 레오레는 완전히 외부인 취급이었다.
전문가는 역시 알아본다며 의기양양하게 가죽끈과 가죽 조각으로 가려진 채 조여드는 젖가슴을 살짝 출렁거리면서 뽐내듯이 어필해봐도, 감탄하는 건 옷가게 주인 뿐. 레오레는 눈을 가리고 얼굴을 잔뜩 붉히고 있을 뿐이다.
“로브나 두 벌 챙겨주쇼. 그 정도는 서비스로 줘야지 않겠어? 저 꼴로 거리를 돌아다니게 하면 난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해.”
“좋아, 그 정도는 서비스하지. 으음. 난 확신할 수 있어. 오늘 최고의 몸값은 바로 아가씨들!”
저 멘트는 분명 방문해서 옷을 사 가는 손님마다 했을 테지.
거기에다가 그런 말을 순수하게 기뻐하는 것은 나르콜렙시 같은 머리가 어떻게 된 녀석들 정도였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눈에 잘 띄지 않는 거무튀튀한 회색 로브로 몸을 가리고 나자 레오레는 겨우겨우 진정된 모양이었다. 역시 그 꼴이 되는 건 기사로서 어지간히도 견디기 어려운 치욕이었을 테니까…
슬쩍슬쩍 로브 앞섶을 열어젖히고 안쪽을 들여다보며 얼굴을 붉히는지는 설마, 하는 의혹으로 남겨두도록 할까. 입꼬리가 달싹이는 것도 못 봤다. 못 봤다고.
“형씨네도 결국 가는 거지? 거기.”
거기, 라고 말하고 있지만 결국 어디를 지칭하는지는 새삼 물어볼 것도 없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그저 눈을 슬쩍 찌푸리고 팔짱을 끼는 정도로 대응했지만, 옷가게 주인은 비릿한 웃음을 물곤… ‘파티 의상’ 위에 로브를 걸친 둘을 슬쩍 돌아보았다.
그 눈길에 무슨 함의가 숨어있는지는 안 봐도 뻔했지만 둘 다 그다지 유쾌해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다.
“뭐, 아니라면 그냥 흘려듣고. 맞았다면 조금쯤은 머리에 담아두도록 하라고. 이번에는 온갖 곳에서 이상한 녀석들이 죄다 몰려온다는 소문이야.”
“이상한 녀석들이라고?”
조금 반응을 보이자, 옷가게 주인의 남자다운 얼굴이 뜬 웃음이 조금 더 비릿한 냄새를 풍겼다. 하얀 셔츠 사이로 굉장하게 단련한 탄탄한 가슴이 남성미를 강하게 풍겼다. …나르콜렙시나 레오레에게는, 그다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은 모양이다.
“흐으음. 글쎄, 뭐라고 해야 할까 이거 참.”
적선하는 셈 치고.
은화 두 닢을 손에 건네자 옷가게 주인은 자연스럽게 품에 집어넣고는 마치 새로 기름칠한 것처럼 부드럽게 혀를 놀리기 시작했다.
“교회에서도 왔다거나, 국내외의 귀족들이 왔다거나, 그런 얘기는 흔했지만… 이거 참. 옛 전쟁에 참전했던 영웅 중 한 명도 방문할지 모른다고 수군대더군?”
…내 얘긴가?
뭐 소문이 퍼졌다면 그건 그것대로 어쩔 수 없겠다.
적어도 아질과 사라스바티일 리는 없다. 아질이 그런 곳을 어슬렁거린다면 사라스바티가 분명 멱살을 잡고 흔들어댈 게 뻔하니까.
죽은 녀석이 올 수 있을 리도 없고, 그 외에 한 녀석이 더 있었지만, 그 녀석이 이런 곳에 올 리는 더더욱 없지. 여신을 섬기는 사제인데다 노예 시장 같은 곳을 어슬렁거릴 녀석이 못 되니까.
결국 은화 두 닢은 그냥 정말로 적선한 셈 치게 되었다는 얘기다.
“왕도에서도 높으신 분이 오셨다는 소문이야. 덕분에 주최하는 측에서의 골머리가 참 장난이 아니라더군. 장소도 새로 물색한다는 얘기도 들리던데.”
“…장소를 바꾼다고?”
인제 와서 장소를 바꾼다니, 곤란한 것도 그렇게 곤란한 게 있을 수 없다.
이쪽도 정식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니만큼 바뀐 장소를 연락해서 알려줄 리가 없으니까.
눈살을 찌푸리며 듣고 있으려니, 옷가게 주인이 으쓱였다.
“참고로 그 바뀐다는 장소에 대해 아는 녀석은 아~무도 없다네. 어디의 어느 바보가 파티를 망치려고 숨어든다는 소문 때문에 바뀐 것이기도 하니까.”
“그럼 참가할 수가 없잖아. 본말전도도 정도가 있지.”
“거기엔 역시 주최 측의 서프라이즈한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지 않겠어?”
누굴 위한 서프라이즈인지.
적어도 내게 달가운 서프라이즈만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더 물을 말도 들을 말도 없었던지라, 일단 옷가게를 나왔다. 가까운 식당에서 이른 저녁도 해결할 겸 모여앉은 뒤 작전 회의.
“점점 더 귀찮은 일이 되어가는데. 듣기로는 꽤 거물들이 모이는 모양이고. 하이엔, 이제라도 한번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보는 게 어때?”
나르콜렙시는 거품이 부글부글 이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면서 가늘게 뜬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생각해보면 우리랑은 별 상관도 없잖아? 그냥 가게 하나 뒤엎고 도망치는 정도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그 말은 지당했다.
교회 성기사 놈과 늑대원숭이라는 용병 놈의 도발 아닌 도발에 발을 들인 꼴이 되었지만, 아직은 충분히 발을 뺄 수 있는 단계이긴 했다. 뭐, 적전도주가 용납되지 않는 싸움판에 선 것도 아니고, 영주의 보수도 꽤 좋은 조건이었지만 그거 없다고 문제가 생길 것도 아니고.
하지만 레오레는 기사답게, 단호하게 반대 의사를 피력했다.
누구냐, 이 녀석에게 당당히 발언권을 준 녀석은.
“하지만 이대로 좌시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쿵, 레오레의 주먹이 탁자를 내려쳤다.
탁자에 놓인 접시가 부르르 흔들렸다. 이 녀석, 요즘 들어 꽤 자신도 노예라는 자각이 옅어진 것 같다. 오늘 밤을 계기로 제 위치를 한 번 더 확실하게 각인시킬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보통의 노예를 몰래 사고파는 것도 중죄일진대, 엘프를 납치해 노예로 삼아 마음대로 매매한다니… 여신께서 보셨다면 반드시 심판하라고 하셨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이엔 님?!”
“난 그렇게까지 신앙심이 투철하지가 않아서.”
여신이 하나하나 일일이 세상일에 이게 옳다 저게 옳다 신탁을 내려 판정해준다면 어떤 의미에서 여러모로 편리할지는 몰라도 그만큼 세상은 재미없어질 거라고. 뭣보다 지금의 자신은 여신의 앞에서 별로 떳떳할 것 같지 않거든.
“야, 그건 그렇고.”
“네?”
“응?”
그보다 정신 차려보니, 이 녀석들… 술을 물처럼 마셔대고 있잖아.
음식점 점원이 벌써 몇 잔이나 새 맥주를 커다란 잔에 채워서 가져오고 있고. 내 잔은 반도 안 비웠는데, 이 녀석들… 자기 돈 아니라고 마구 시켜대고 있다니.
“너희들… 너무 마시는 거 아니냐? 바로 오늘 밤인데.”
“…죄송합니다, 이런 옷을 입고 있다고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술이라도 마셔야 머리를 진정시킬 수 있을 것 같…아서.”
“에이, 그래 봐야 맥주야 맥주. 이 정도는 기력으로 회복한다구.”
이유는 달랐지만, 오늘 밤의 일에 이래저래 마음이 복잡한 모양이다. 둘 다.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여신만이 아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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