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 2 / 인면수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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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답 대신 영주에게는 그저 한밑천 뜯어올 수 있었다. 품 안쪽에서 묵직한 돈주머니 몇 개의 무게가 느껴졌다.
이것은 일종의 누름돌이다.
영주의 제안에는 특별히 대답하지 않고 돌아왔지만, 어차피 영주도 그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여기지는 않는 눈치였다. 어느 만치 진심이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
영주로서는 내게 진 빚을 갚는다는 생각으로 던진 제안이었겠지. 하지만 그런 식의 변제는 달갑지 않다고.
다만 그렇기에, 더 가타부타 말을 붙이지 않고 그저 앞으로도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해치지 않고 이어가길 바라는 눈치였다. 건넨 돈은 아마 그런 의미에서 던전 포석이었을지도 모르지.
숙소에 돌아오고 나자, 드물게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레오레와 나르콜렙시가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뭐야. 둘이 이제 사이 푼 건가?
“아, 주… 아니. 하이엔 님. 다녀오셨습니까? 가셨던 일은 어떻게 되셨나요?”
“…뭐, 그다지 건더기가 남는 얘기는 아니었다. 그보다 둘이 무슨 얘길 하고 있었냐?”
“검성 군, 여자끼리의 얘기는 캐묻지 않는 게 예의야.”
어흠, 하고 나르콜렙시가 어째 득의양양하게 굴자, 레오레가 조금 그녀를 향해 눈을 흘겼다.
“…이상한 말 하지 마, 서큐버스. 저기, 그런 게 아닙니다. 그저 오늘 밤이잖습니까. 그… 하이엔, 님…의 노예답게 행동하려면 어떻게 해야 좋을지… 그녀에게 조금 조언을 구하고 있었던 것뿐입니다.”
“…여자끼리 얘기 맞구만.”
허탈해하는 내 반응에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잠시 깜빡이다가,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레오레의 얼굴이 순식간에 접시에 놓인 토마토 스파게티의 소스만큼이나 붉게 물들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부끄러워하는 모습은, 꽤 신선했다.
두꺼운 갑옷 아래에는 이런 면모를 숨기고 있었나.
“무리할 것 없다. 가거든 대충 입만 다물고 있어. 별로 좋은 일도 아니고, 오래 끌 생각도 없으니까.”
그 표정이 꽤 재미났지만 구태여 놀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 머릿수가 부족하다. 왜 둘 뿐이지?
“그러고 보니 스텔라는 어디 갔지?”
“아, 작은 마왕님? 여관방에 앉아만 있기 심심하다고 잠깐 나갔어. 아마 시장 구경이라도 하고 오려나 봐.”
“…혼자 보냈다고?”
포크에 돌돌 만 스파게티를 냠, 하고 물면서 천연덕스럽게 나르콜렙시가 대답했다.
명색이 마족이면서 마왕 후보라는 녀석을 그렇게 멋대로 돌아다니게 놔둬도 되는 건지 싶었지만, 이 녀석이 어디 그런 데 신경쓰는 녀석이던가.
“금방 돌아올걸? 뭐 별로 볼 것도 없는 도시인데.”
“너한텐 그럴지 몰라도 이 도시는 그 꼬맹이가 길을 잃기에 딱 좋다고 생각하지 않냐?”
“검성 군은 작은 마왕님이 꼬맹이로 보이는 거야? 왜…?”
오히려 나르콜렙시가 이상하다는 눈을 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럴 법도 한 일이다.
행동은 다소 어려 보일지 몰라도 일단 겉보기에는 어디 귀족 집안의 잘 교육받은 영애처럼 보일 정도의 성숙한 용모를 하고 있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하지만 동시에… 지금 상당히 위험한 상황인 건 아닌가 하는 불길한 생각도 슬그머니 머리를 들었다. 이 도시에서는 지금 어쨌든 노예 경매가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호위도 없이 혼자 내보내다니 너무 조심성이 없는 거 아냐?
“에이에이, 너무 그렇게 뻣뻣하게 굴 것 없어. 일종의 사회 공부야. 검성 군은 너무 작은 마왕님을 과보호하는 경향이 있다구.”
“나르콜렙시… 그 녀석이 어떻게 되면 내가 먼저 죽는다고 한 건 너 아니였냐?”
“…그러고 보니 그랬던가?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에헤헤, 하고 깜빡 잊었다는 듯 너스레를 떠는 나르콜렙시의 하는 짓이 하도 가당찮아서 레오레와 함께 짜게 식은 눈을 뜨고 보았다. 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니까.
“검성 군은 의외로 걱정이 많네. 그런 점도 참 귀여워서 날 걱정해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긴 하지만… 작은 마왕님은 그래 봬도 제법 강하니까. 이 동네에서 어슬렁거리는 불량배한테 허무하게 잡힐 일은 없다구.”
“…한 가지 더. 너 이 동네에 교회에서 온 성기사 놈이 어슬렁거리는 것도 까먹었지?”
앞의 헛소리는 잘라버리고 본론만 파고들자, 나르콜렙시의 눈이 겸연쩍게 옆으로 돌았다.
분명히 이 녀석, 그 생각까지는 못한 게 틀림없다. 이 이상은 시간 낭비다.
“어, 괜… 찮지 않을까? 으음,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 응, 응.”
“너 임마. 하아….”
더 못 놀아주겠군. 평소대로라면 이마가 퉁퉁 붓도록 딱콩을 날려줬겠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도 아깝다. 쯧, 혀를 차고서는 몸을 일으켰다. 당장 찾으러 나가봐야겠군.
“하이엔 님, 저기….”
문득, 아래층에서 소란이 일었다.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니 웅성거리는 소리가 2층까지 올라와서는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내미니… 별로 달갑지 않은 얼굴이 있었다.
“저 자식…?”
요슈아 세룰라이트, 라고 했던 그 성기사 놈이었다.
나르콜렙시도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푸른 머리카락의 성기사는 그저 가만히 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전력(?戰力)을 은은하게 뿜어내고 있어, 서큐버스인 그녀에게도 그리고… 언데드 상태인 내게도 따끔따끔한 불쾌감을 주고 있었다.
“뭐야. 저 녀석은 왜 저놈이랑 같이 있어?”
그리고 의외의 동행인이.
놈의 옆에는 스텔라가 있었다. 순진하게 호박색 눈동자를 깜빡거리며 태평스럽게도 튀긴 빵을 집고 우물거리고 있다… 뭐 하는 거야, 저 녀석은.
나와 레오레의 시선이 바로 나르콜렙시에게 향했다.
“에? 나? 서큐버스인데?”
“나와 유스티카는 저놈한테 얼굴 팔렸다고. 얼른 가서 데리고 와.”
“하아… 이런 잡일까지 맡을 만큼 값싼 몸이 아닌데, 나중에 다 받아낼 거야.”
“갔다오기나 해.”
나르콜렙시가 한숨짓고는, 계단을 내려갔다. 녀석의 시선이 닿지 않을 법한 기둥 뒤에 숨어서, 그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난 왜 숨어야 하는 거지?
“나르카.”
스텔라가 반색했다.
그러고보면 스텔라는 나르콜렙시를 제법 살갑게 대했다.
다소 의외였지만, 서로 으르렁대는 것은 나르콜렙시와 레오레 둘로 족하다.
“어머나 어머나. 저희 작은 아가씨를 데려다주셨네요~ 감사해요.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나르콜렙시는 연기에 능숙했다.
다소 발랄한 하녀 역할도 문제없이 소화할 정도는 되었다. 문제는 저 성기사 놈이 나르콜렙시가 몽마인지를 알아보는가 아닌가인데… 솔직히 그다지 자신은 없었다. 센도 한눈에 알아봤었으니까.
“여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로서 당연한 일입니다.”
놈은 제법 유명했던 모양이다.
마치 놈의 주위에 결계라도 친 것처럼 손님들이 둥글게 에워싸고는 무엇인가 모를 소리를 수군거리고 있었고, 놈은 또 그게 그다지 낯설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뭐, 내게도 저랬던 시절이 있긴 했지만. 지금은 전부 다 지나간 헛일이지.
놈의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은 채 나르콜렙시와 스텔라를 번갈아 건너보았다. 반쯤 눈꺼풀이 덮고, 눈두덩이 조금 치켜올라가 미간에 잡힌 주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본인만이 알겠지. 일단 적어도 칼집에 꽂힌 칼을 당장 뽑으려는 것 같진 않았지만.
“그럼, 전 이만.”
놈은 그대로 등을 돌려 여관을 나섰다. 조금 맥이 풀려서 주저앉으니 손님들의 웅성거림을 뒤로 하고 둘이 올라왔다.
“스텔라, 어디 다친 곳은 없나요?”
의외로 레오레도 스텔라를 챙기곤 했다. 분명 내가 호위를 맡기긴 했지만, 마족이라는 것을 잘 아는데도 꼼꼼하게 챙기는 저의를 솔직히 알 길은 없었다.
스텔라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레오레에게 잠시 시선을 맞추다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투명한 눈동자를 깜빡였다.
“난 괜찮아.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었어. 오히려 조금 그에게 도움을 받았으니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스텔라는 물음에 곧장 답하지는 않고, 고개를 돌려 여관의 문 쪽을 바라보았다. 감정을 읽기 어려운 얼굴로 잠시 그 너머로 사라진 성기사의 등을 좇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냥, 별 건 아니었던 일?”
…뭐,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할 생각이 없으면 그걸로 됐다.
그 성기사 놈이 알았든 몰랐든 간에… 마족이라고 눈치를 챘음에도 냉큼 베어버릴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잘된 일이 아닌가. 뒷머리를 긁적이고는 로비에 놓인 마력 시계를 살폈다. 적당한 시간이 되었다.
“어이, 갈렉스!”
여관 주인을 부르자 아래층에서 여관 주인 갈렉스가 고개를 들어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잠시 이 녀석 좀 부탁하자. 대충 서너 시간쯤 나갔다올 테니까… 아니, 조금 더 오래 걸릴 수도 있으니까 이 녀석을 봐 줘.”
영주에게서 받았던 돈주머니를 하나 던져주자 내용물을 확인한 갈렉스가 히죽거렸다. 맡겨만 달라고 엄지를 척 내미는 게 역시 돈 잘 벌게 생겼다.
“그럼 나갈까.”
“…벌써… 인가요?”
아직 해도 지지 않았는데… 얼굴을 확 붉힌 레오레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것이 조금 신선하게 느껴졌지만, 아쉽게도 이 녀석의 예상은 빗나갔다.
“아무래도 그런 쪽은 드레스 코드에 엄격하게 구는 법이니, 이쪽도 의심을 사지 않고 들어가려면 나름의 준비를 해야 한단 말이다. 아무튼 그 밑준비를 하러 갈 거니까 둘 다 따라와.”
나르콜렙시는 어딘지 기대된다는 듯이 입꼬리를 말아올렸지만, 레오레는 얼른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순진하게 눈을 끔뻑거렸다.
…뭐 혹시 모르지. 어쩌면, 레오레에게는 오히려 더 힘든 시간이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