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 2 / 인면수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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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흐레의 일주일 중 여섯 번째 날인 프레르디가 밝았다.
이제 하루를 보내고 나면 볼룬디가 되고, 날짜가 넘어가는 것과 동시에 문제의 노예 경매가 열릴 것이다.
센에게서 받아든 흉검 가름은 그가 호언장담했던 그대로,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합리주의를 중시하는 그다운 개수였고, 꽤 마음에도 들었다.
가드와 자루, 폼멜에 과하게 붙어있던 불필요한 장식이 모두 떼어졌다.
후려쳐서 부수거나 무게로 찍어눌러 갈라버리기에 적합하도록 날을 세운 칼날에 푸르스름한 예리함이 묵직하게 감돌았다.
일단 등에 차고 다니는 것만으로 시선을 끄는 일은 한결 줄어들겠지. 그것만 해도 어디랴.
부웅,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팔과 손이 그려내는 곡선을 따라 거침없이 휘둘러지는 참격의 궤적은 시원스러웠다. 분명히 이전과 비교하면 날의 형태와 전체적인 생김새는 달라졌지만, 무게나 손에 달라붙어오는 감촉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 같은 신기한 감촉이었다.
“…괜찮은데.”
몇 번 더, 오랜만에 이 녀석을 휘두르는 감촉을 손에 남기고 싶은 기분에 아무도 없는 공터에서 검을 몇 차례 휘둘렀다. 좋아, 어떤 놈에게라도 질 것 같지 않다. 성기사 놈이건, 아니면 그 묘한 용병 놈이건.
스르르릉… 철컥.
검을 집어넣었다.
끄트머리에 칼끝이 딱 맞물리자 시원한 소리가 튕겼다. 등에 멜 수 있게 되어있는 칼집과 벨트와의 만듦새는 절묘해서, 등과 어깨에 묵직하게 실리는 제 체중만큼이나 익숙한 무게감에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좋아, 그럼….”
간만에 아무도 데리고 달라붙지 않은 자유를 만끽할 셈이었다.
그러고 보니 며칠째 영주한테서 아무 소식이 없는 게 또 묘하군.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곳 영주에게는 나름의 받을 빚도 갚을 빚도 있다.
기왕 내친걸음, 어차피 오늘 밤이 지나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윈덤을 뜰 테니 오늘쯤에는 얼굴을 내밀어두는 게 맞을 것 같았다. 한참을 걸어서 영주성에 도착하니 여기가 영주가 사는 곳이라고 말하듯한 동상이 가장 먼저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한동안 못 보던 사이에 꽤 으리으리한 성을 지으셨구만.”
이런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성품이었다는 것을 떠올리면, 조금 방탕해보였던 후계자, 브란의 점수 따기의 일환이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입구를 지키는 위병 두 명이 바짝 경계하고 있었다.
내 얼굴을 모르지는 않겠지만, 아마 그렇기에 더더욱 경계할 것이다. 이래뵈도 이 나라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얼굴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영주를 만나러 왔는데. 얼른 문 열어.”
“영주님께는 무슨 용무… 이십니까?”
“병문안.”
오는 길에 산 과일 바구니를 흔들어 보이자 두 위병이 예상하지 못했는지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둘 중 조금… 후임인 듯한 병사가 잽싸게 안쪽으로 달려갔다. 아무래도 조금 기다려야 할 모양이다.
“예나 지금이나 이 문 하나 넘고 지나가기 퍽 번거롭게도 구는구만.”
“…죄송합니다. 이유는 아시지 않습니까. 조금만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당장 잡으려 드는 게 아닌 것이 어딘가.
영주나 아니면 그 영주의 아들이 명령을 내려둔 탓이겠지. 아니, 출세지향적인 그 아들의 경우에는 조금 생각이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얼마간 기다린 끝에 문이 열렸다.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고 콧수염을 그린 초로의 남자가 달려왔다. 그가 누군지 떠올리기 위해 조금 기억을 뒤져야 했다… 전보다는 새치가 늘었지만 아마 영주의 보좌관이었던가, 하고 그다지 정확하지 않은 기억이 떠올랐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병문안 왔는데. 화살 맞은 곳은 괜찮으신가?”
과일 바구니를 들었다가 내리면서 말하니 노인이 조금 한숨지었다.
“영주님께서도 연세가 있으시니만큼 그다지 상태가 좋지는 못하십니다. 위중하시죠.”
“쯧쯔. 그러게 뭐하러 몸소 거리에까지 나오고 그랬을까. 높은 자리에 있으면 알아서 몸을 사렸어야지.”
“따라오시지요.”
안채로 안내되었다.
…며칠 만에 만난 영주는 꽤 초췌한 안색이었고. 움푹하게 들어간 볼이 며칠 사이 오히려 병이 더 깊어졌음을 짐작하게 했다.
몸을 일으켜 겨우 앉은 뒤, 영주는 보좌관에게 눈짓을 했다.
노년에 접어들었음에도 탄탄했던 육신에는 이제 슬슬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화살 한 대를 맞은 것으로 이렇게 되었을 리가 없었으니, 역시 그 화살에 뭔가 수작을 부려둔 것이 분명하다.
“어째 그다지 살만해 보이는 낯색이 아니구만, 영주 나리.”
“…하이엔. 한 번쯤 자네가 올 거라고는 생각하고 있었네.”
영주는 천천히 떠둔 물을 한 모금 마시다가, 손에서 힘이 다했는지 컵이 미끄러졌다.
반쯤 남은 물이 카펫을 적시며 흩어졌다. 눈이 찌푸려졌다.
그가 쓰게 웃었다.
“마법사와 치유사들이 다녀갔네만.”
“하나같이 돌팔이였던 모양이지?”
“나이는 속일 수 없으니.”
일흔에 가까운 노구이다.
마법이나 약으로도 뼛속까지 빠르게 번진 독을 해주하는 것은 어려웠던 모양으로, 사실상 그는 죽을 날을 받아놓은 늙은이… 처럼 보여야 했던 모양이다.
주위에 보는 눈이 없음을 확신하고 나자, 그는 후우 하고 깊은 숨을 내쉬었다. 한껏 오그라들었던 몸이 활력과 건장함을 조금 되찾았다.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돌팔이임은 틀림없지. 어디가 ‘위중’이냐고.”
“정치라는 건 피곤한 일이네.”
그렇겠지. 산송장 노릇까지 해야 한다면 참 귀찮을 것이다.
주위 사람들까지 물리고 나서야 산송장 노릇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다면 더더욱.
그렇게 해서까지 얻어야만 하는 게 있다면… 그는 충분히 자신의 죽음까지도 미끼로 내놓을 수 있는 집념을 가진 남자였다. 그런 면에서 보면 그는 충분히 귀족다웠다.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 내 도시에서 누군가가 엘프들을 거래하고 있네.”
“영감이 그냥 두진 않았을 테니, 필시 어떤 높은 녀석이 끼어있겠군.”
이 도시에서 돈이 필요한 자는 지금 상황에서 누굴까.
엘프를 납치해서 팔아먹는 사수까지 동원해야 할 정도로, 이 상황… 그러니까, 영주의 위중이라는 상황에서 돈이 필요한 자.
“브란이겠지.”
“아들을 꽤나 엄하게 가르치려나 보구만?”
“윈돌을 맡기려면 어쩔 수 없네. 내가 덜컥 죽기라도 하면 브란이 이 도시를 잘 운영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되지 않아.”
부모 눈에 자식이란 언제나 못미더운 법이긴 하지만, 대충 동의한다.
그는 야심 가득한 젊은이였다. 그 야심으로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다는 건 영지의 안전과도 직결되는 사항이다.
귀찮아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네는 오늘 밤 벌어질 노예 경매를 그저 망가뜨릴 생각이겠지?”
“뭐야.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댁은?”
“자네가 생각하는 것만큼은 알고 있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돼.”
당부와 지시, 부탁을 한데 모아 얽어놓은 말을 영주가 낮게 뇌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병문안 같은 건 오는 게 아니었는데.
“가능하면… 증거를 모아주게. 이런 일은 브란이 혼자 벌일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아직은 그런 수완도 가르치지 않았네. 자네 생각을 듣고 싶군. 이런 일을 벌인다면 브란의 뒤에 우선 누가 있을 것 같나?”
답은, 간단하게 추려낼 수 있었다.
대영주인 아버지의 의사를 반할 결심을 할 수 있게 만드는 뒷배라면, 얼른 생각나는 곳은 하나뿐이다.
“왕가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영주가 긍정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혹시나 지켜보고 있을지 모르는 누군가를 의식하는 듯한 마른 기침을 콜록거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왕가에서 갑자기 이런 일을 벌일 만한 동기를 모르겠네. 자네가 그걸 가능하다면 알아봐 줬으면 해. …오래 묵은 빚을 갚는 셈 치고 맡아주게.”
“장담은 할 수 없다고? 영감이나 내 생각이 아예 틀렸을 수도 있으니까. 때때로 젊은 놈들은 깜냥도 안 되면서 터무니없는 짓을 벌이기도 하니까.”
“차라리 그렇다면 안심이네.”
하지만 영주는 일축했다.
자식을 믿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내 자식이니 나는 알아. 브란은 그런 짓을 무턱대고 벌일 만큼 무모한 아이가 아니네. 그러니 자네에게 부탁하는 게야.”
“…일단 애는 써 보겠어.”
“충분하네.”
더 해야 할 말은 없겠구만.
슬슬 이쪽도 돌아가서 머리를 맞대고 오늘 밤을 준비해야 할 테니까. 그럼, 하고 등을 돌리니 영주의 목소리가 걸음을 멈추게 했다.
“이 일이 잘 해결되면 자네의 신원을 내가 한번 복권할 수 있도록 해 보겠네. 정말로 왕가가 관여되었다면 그 정도의 협상은 할 수 있을 것이야.”
영주의 목소리가 워낙 진지해서, 자신도 모르게 뒤돌아봐야 할 정도였다.
지금의 그는 마치, 죽음을 앞두고 태어난 곳을 향해 머리를 둔 짐승처럼도 보였다.
“어떤가? 이 도시에 남아서 나와 브란을 도와줄 수 없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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