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헬하운드-28화 (28/79)

〈 28화 〉 1 / 천릿길도 식후경 (13)

* * *

(13)

“…하여튼 성질도 급한 놈.”

“이해하쇼. 이 녀석이 한 번쯤 와보고 싶다고 해서.”

장소와 수단도 확보했다. 이제 남은 건 당일까지 기다리는 것뿐이었는데…

나르콜렙시가 남는 시간을 자신에게 할애해달라고 고집과 땡깡을 부려 조금쯤은 어울려주기로 했다. 특별히 수상한 요구가 아니었던 점은 퍽 다행스럽다.

도착한 곳은 일전에도 방문한 바 있는 쇠 두드리는 소리 요란하게 울리는 센의 대장간이었다.

윗도리를 벗어 탄탄하게 단련된 상체에는 칼자국과 화상 자국이 여기저기 달라붙어 있었다.

오자마자 흰자위를 보이며 귀찮다는 얼굴을 한 센에게 턱짓으로 나르콜렙시를 가리켰다. 나르콜렙시는 눈을 반짝이면서 대장간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센의 말로는 ‘실패작’들을 둘러보고 있다가 대장장이에게로 한 걸음 다가가 코를 킁킁거렸다.

“쇠 냄새, 땀 냄새, 불 냄새. 좋은 남자네, 당신.”

“…내 일터에 몽마는 왜 데리고 온 거냐? 정신 사납다. 데리고 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건가.

인간 도적의 복장을 하고 있어도 그의 눈은 날카롭게 나르콜렙시의 정체를 간파했다. 흥, 하고 코웃음을 치고는 그가 모루에 두고 두드리는 물건에 시선을 옮겼다.

가느다랗고 올곧은 검신이 길게 펼쳐진 엑스페란사가 망치질을 견디고 있는 것이 보였다. 부러졌던 검은 이제 이음매가 다시 하나로 붙어서 단단하게 여물고 있는 중이었다.

“네 검은 이제 조정작업만 하면 돼. 내일이면 끝나겠지. 이쪽은 무게중심을 잡고 날을 갈아야 하니 그 나름의 시간이 걸린다.”

“잘 됐군. 내일 밤에 검을 써야 할 일이 있을 것 같아서 말이지. 구태여 채근을 해야 할 필요가 없어졌어.”

채근해봤자 콧방귀도 안 뀔 인간이긴 하지만.

센의 눈이 내가 임시로 허리에 차고 있는 푸줏칼에 향했다. 대번에 불쾌한 양 한껏 얼굴이 찌푸려졌다.

“뭐냐, 그 조잡한 물건은. 얼뜨기들이 멧돼지 잡는 데나 쓰면 딱 좋겠군. 내가 빌려준 건 어쩌고 그런 덜떨어진 걸 칼이라고 차고 있지?”

“댁이 빌려준 건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칼로 썩둑 베어버려서. 지금은 뒷골목에 굴러다니던 걸 주워 쓰고 있을 뿐이야.”

“…베어버렸다고?”

센이 흥미를 보였다.

자신이 벼려낸 검을 ‘썩둑’ 베어버렸다는 재목에서 그는 자존심을 다친 게 아니라 그런 상대와 검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데에 지대한 관심을 표하고 있었다.

“어떤 놈이지?”

“교회 놈이더라고. 정확하게는 나도 몰라.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어. 신참 성기사인 모양이던데.”

요슈아 세룰라이트.

이름만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센도 이 세계에서 살아온 세월이 길었지만, 워낙 세간의 일에는 관심이 없는 인간인지라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다만 의외의 곳에서 반응이 튀어나왔다.

나르콜렙시가 손으로 턱을 짚은 채 입을 열었다.

“성탁기사단(?????)이라면… 교회에서도 내로라하는 괴물들만 모아놓은 곳인데. 새 단원이 들어왔다는 얘기는 나도 들은 적이 있긴 했어. 그게 누군지는 몰랐지만.”

“왜 알고 있지?”

“당연하잖아? 적이 누군지를 알아야 대처할 수 있으니까.”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은 그 성탁기사단인가 하는 놈들과도 싸워왔겠지.

나르콜렙시의 설명에 의하면 출신도 성분도 다양한, 심지어 여신을 믿지 않는 자라도 강하기만 하면 단원으로 받아들이는 콩가루 집단이라고.

“나도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만… 뭐, 성탁 녀석이 상대였다면 검성 군이라도 애먹었을 거로 생각해.”

“애먹지 않았다.”

“네에, 네에.”

나르콜렙시가 키득거리며 이죽거리는 것을 불쾌해하면서도 손이 근질거렸다.

내일이란 말이지. 가름을 손에 쥐고 나서, 그 노예 경매라는 걸 뒤엎어놓고, 그다음에는 그 녀석과 판을 벌인다. 윈돌에서 해야 할 일은 그게 전부다.

“아무튼 내일 오면 된단 말이지. 그럼 내일 점심때쯤에는 오면 되나? 영감.”

“아침에는 끝난다. 몰라보게 달라져있을걸.”

“기대하겠어. 그럼…”

품에 든 주머니에서 금화 다섯 개를 꺼내 탁자에 내려놓았다. 주머니 사정은 그다지 문제될 것이 없었다. 오면서 맞닥뜨린 도적이나 목을 노리고 오는 놈들의 지갑을 터는 것쯤은 간단했으니까.

그냥 도시를 걸어도, 내 목을 노리는 것 같은 녀석은 어디에서든 나타나게 되어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지금 같은.

“…이제 거기 숨어있는 놈도 슬슬 나와라.”

등을 돌리면서 이를 뿌득 갈았다. 제법 기척을 감출 줄은 아는 모양이지만, 최근 숨어드는 놈을 상대하는 데에는 이력이 났단 말이지.

팔짱을 낀 나르콜렙시도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다지 유쾌하다고 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분명히 아무도 없었던 그 자리에서, 거의 2m를 훌쩍 넘기는 덩치가 나타난 것을 깨닫는 게 늦었다.

“실례했소. 간파당할 줄은 미처 몰랐군. 수행이 부족한 몸이라.”

“어이, 하이엔. 그 녀석은 괜찮아.”

칼날을 벼리고 있던 일손을 잠시 놓고 장갑을 벗은 뒤 떠다놓은 찬물을 들이키며 센이 금방이라도 임전태세에 들어가려는 것을 말렸다.

“내 제자다. ‘늑대원숭이’로 통하지.”

“격조했소. 스승이여.”

“그래, 꽤 오랜만에 얼굴을 비췄구만. 몇 년 만인가? 흠. 새 고용주를 찾았다는 네 서신은 받았다만.”

“그렇소. 검을 맡기고 봉록을 받을 뜻 높은 주군을 만났소.”

탄탄하게 벌어진 어깨. 흉근만으로도 칼날을 튕겨낼 수 있을 것 같은 억센 근육이 탄탄한 것이 눈에 보였다. 내려다보는 시선이 조금 묘했는데, 짐승의 야성과 그를 억누르는 이성이 고요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허리에는 칼 한 자루와 그보다 짧은 칼 한 자루를 패용했고 등에는 제 키만큼이나 긴 칼을 차고 있었는데… 그 형태는 일반적으로 쓰는 검과는 다른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아무튼 ‘늑대원숭이’인가. 기묘한 별명이지만 모를 수가 없다.

이 바닥에서 해묵은 화제로 오르내리는 1인 용병의 별명인데… 자신도 아는 바가 많지 않았다. 실제로 대면한 것도 처음이었다.

…제법 이름을 얻은 검사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조금 몸이 근질거린다고 생각한 순간, 남자의 발이 한발 앞섰다.

“…귀공. 살기가 짙군.”

‘늑대원숭이’가 미간을 모아 힘을 주면서 또렷하게 이쪽을 노려보았다. 얼른 알아듣기 어려운 고풍스러운 말투를 쓰면서 천천히 손가락이 두꺼운 손을 칼집에 대었다. 뭉툭하게 닳은 손톱과 손끝이 칼자루를 짚었다.

“그만둬.”

센이 말렸다.

“내 일터에서 피냄새 풍기지 마라.”

“송구하오.”

칼자루를 짚었던 손끝이 천천히 내려가면서 늑대원숭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쪽도 만족스럽게 휘두를 검이 없어서야 상대해봤자 맥만 빠지지. 흥, 하고 코웃음쳤다.

“흐으으응….”

나르콜렙시는 새로 나타난 사내에게 흥미를 보이고는 빙글빙글 웃음지으며 다가갔다. 하여튼, 저 엉덩이 가벼운 년ㅇ…

스르르릉.

캉!

늑대원숭이가 검을 뽑아 내려쳤고, 자기도 모르게 그 사이에 끼어들어 푸줏칼을 들어 그의 검을 받아냈다. 칼날을 따라 푸르스름한 칼날이 미끄러지면서 쇠 긁히는 소리가 났다.

검사는 자못 불쾌함을 숨기지 않고 노기가 실린 목소리를 낮게 으르릉거렸다. ‘늑대원숭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목소리라기보단 울음소리에 더 비슷했다.

“백주대낮, 만인환시중… 수양을 쌓는 검사에게 그 무슨 음탕한 눈빛이더냐. 썩 물렀거라, 음탕한 마라(??)여.”

“…저기, 검성 군. 이거 시비 거는 거야? 나 해버려도 돼?”

“하지 마.”

나르콜렙시로서는 억울할 만도 하지만, 생긴 게 그렇게 생겨먹은 걸 어쩌겠어.

경고 같은 말을 한마디 내뱉은 뒤 칼끝을 내린 늑대원숭이는 천천히 칼집에 칼을 되돌렸다. 푸줏칼은 워낙 질 나쁜 쇠로 만들었는지… 칼날을 받아냈던 곳이 움푹하게 파여들어가있었다. 멧돼지는커녕 장작 패는 데도 못 쓰게 생겨서, 그냥 버렸다.

“아니, 뭐… 그냥. 조금 흥미로운 수컷이라고 생각했을 뿐인데 다짜고짜 뭐람. 불쾌해.”

“불쾌를 따지자면 이쪽이다. 외간 남자에게 그런 눈을 함부로 보이다니. 수치를 모르는 것.”

“뭐야?! 진짜 한 판 해보자는 거지?!”

“거절하진 않으마. 마라를 베는 데에는 손속에 사정을 둘 필요가 없겠지.”

칼자루에 손을 짚는 늑대원숭이와, 부글부글 끓는 분노 게이지가 Max에 가까워진 듯 전투태세에 들어가는 나르콜렙시. 둘은 치명적으로 상성이 안 좋았다.

음욕으로 가득한 여자와 금욕으로 가득한 남자라. 뭐, 저 녀석과 상성이 좋을 남자가 이 세상에 있을까마는.

탕! 쇠망치가 모루를 세게 후려치는 소리에, 둘의 시선이 그 쪽으로 향했다.

소년 같은 얼굴을 한껏 일그러뜨린 센이 짜증을 내고 있었다.

“몇 번이나 같은 말을 해야 하는 거냐?”

“…송구하오. 스승이여.”

“쳇.”

나르콜렙시가 입술을 비죽거리더니 내 곁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손으로 눈밑을 당기면서 메롱, 하고 혀를 내미는 것이 유치하다.

검사는 멍청이를 보는 듯한 눈으로 나르콜렙시를 한 번 보고는 내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눈동자가 슥슥 움직이면서 내 이목구비를 살피는 것 같았다. 짜증이 솟았다.

“…너 이 새끼, 누구 허락 맡고 내 얼굴을 그렇게 야릇하게 보냐?”

“귀공도… 흠, 아니지. 아직은 때가 아니다.”

뭔 뜻 모를 소리를 주워섬기고 지랄이야.

늑대원숭이는 그 이상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고 돌아섰고, 더 있을 이유가 없어서 나도 돌아섰다. 다음에 제대로 된 검을 받고 나면 이놈이고 저놈이고 오늘처럼 미적지근하게 끝날 일은 없을 테지.

“한가지 말해두겠다.”

등을 보인 채로, 등으로 늑대원숭이가 말했다.

웃음기도 투쟁심도 없는, 연못처럼 고요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마치 늙은 늑대의 목울음 같아, 조용히 귀에 파고들었다.

“귀공은 조만간 오랜 인연과 해후할 것이다. 그 자리에서 나도 귀공과 겨뤄볼 기회가 있을 터.”

그 다음으로 이어진 말에는 드물게 감정이 묻어났다.

마찬가지였다. 한바탕 붙어볼 만한 놈을 둘이나 만났다는 건 확실히 행운이다.

“그때를 기다리고 있겠다. 검성이라 불리는 자, 하이엔 더츠백이여.”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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