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 1 / 천릿길도 식후경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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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이 세상의 모든 사랑하는 이와 아름다움을 돌본다고 알려진 여신 ‘알 프레이야’는, 태양의 여신 ‘라에라드’가 부리는 10명의 권속, ‘우르’의 일원이었다.
사랑하는 이와 아름다움을 관장하는 여신답게, 뭐라고 해야 하나. 야심한 한밤중에 그 사원으로 사람을 불러내는 것을 보면 둘 중 하나였다. 닳아빠진 갈보거나 혹은 세상 물정 모르고 사랑이라면 숭고한 줄 아는 아가씨거나.
“넌 올 필요 없다고 했잖냐.”
“…안 됩니다.”
창과 갑주, 굳이 무장까지 갖추고 따라온 레오레가 고집을 부렸다. 뭘 생각하는지는 대충 이해가 가지만. 무기도 잃은 내가 만약 혼자 나타났다가 무슨 일이라도 당할지 염려하는 눈치인 게 틀림없지. 젠장, 건방 떨지 말라고 한 게 바로 오후의 일이었는데.
알 프레이야 사원의 입구에서, 늙은 수도녀가 지팡이를 짚고 앉은 채 기다리고 있다가, 나와 레오레가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곤 떴는지 감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어두운 눈을 한 번 꿈뻑이고는 문 안쪽을 가리켰다. 레오레가 주머니를 풀어 헌금함에 동전 몇 개를 넣었다.
…어쩐지 금남의 구역에 발을 들이는 것 같아서 공기부터가 자못 매캐하고 답답한 가운데, 예배당에는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 아마 저 자식이, E인가 뭔가 하는.
“날 부른 게 댁인가? 무슨 일로 날 불렀지?”
이렇게 정중하게 초대장까지 보내고서 말이야.
수도녀의 복장을 한 것은 남의 눈에 띄고 싶지 않아서가 분명했다. 하지만 수도녀의 복장으로 외간 남자와 만났다는 사실이 오히려 세간의 입방아에 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한 모양이다. 고단수인지, 멍청이인지는 아직 판단할 수가 없다.
후드를 깊게 눌러쓴 얼굴이 천천히 뒤돌아보았다.
눈가에 눈물점이 눈에 띄었다. 조금 안색이 나쁘고 피곤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보기 드문 기품 있는 미녀였던지라, 레오레가 잠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여자가 입을 열었다.
“갑작스러운 청에 응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검성 님.”
“왜 날 부르는 녀석들은 하나같이 내가 그 딱지 뗐다는 사실은 싹 무시해버리는 거지? 겉치레는 아무래도 됐으니 부른 용건이나 말해.”
여자는 입술을 깨물고는 두건 아래 감추었던 얼굴을 보였다. 두건 사이, 잘 익은 보리처럼 풍성한 밝은 갈색 머리카락이 드러난 그 얼굴을 유심히 살폈으나 아무리 기억을 뒤져봐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레오레에게 눈짓해봐도 그녀 또한 아는 얼굴이 아니었던 모양인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왜 날 보자고 했지?”
정체를 감춘 이상 누구냐고 묻는 건 어차피 별 의미가 없을 거고. 들어봤자 아는 이름도 아닐 것이다.
여자, E는 한번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수도녀의 법의 안쪽에 손을 넣었다. 레오레가 순간적으로 창을 굳게 움켜쥐었는지 덜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필요하실 것 같아서 뵙자고 전갈을 드렸습니다.”
E의 손에 들린 것은금박 종이였고, 그것을 낚아채서 읽어보았다.
…눈썹이 꿈틀거렸다. 슬그머니 분기가 발목에서부터 기어올랐다. 분명히 필요한 것이긴 한데, 어떻게 내가 이게 필요하게 될 것이란 걸 안 거지?
“검성 님께서는 비밀을 감추는 데에는 별로 소질이 없으시더군요.”
조금 웃음이 섞인 듯한 목소리에 심기가 뒤틀렸다. E에게서 받은 것은 초대장이었다.
금박을 입힌 종이에 정중한 필체로 쓰인 내용은 볼룬디에 이 도시 어딘가에서 열린다는 노예 경매에 참여하는 데 필요한 초대장이었다.
“그렇게 여관에서 목청껏 얘기하시면 들으면 안 될 이야기까지 듣게 되니까요.”
…생각해볼 일이다.
이제껏 가는 곳마다 트러블이 끊이지 않았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반성을 하게 될 일이었다. 설마 모르고 계셨습니까, 하고 레오레가 조금 안쓰러운 눈을 한 것이 보였다. 닥쳐.
“요컨대 너는 내가 그 경매장에 쳐들어가 박살을 내놓아도 상관이 없는 녀석이란 뜻이군.”
“그런 셈입니다.”
E는 온화하게 웃으면서 뜻밖에 선선히 긍정했다.
첫인상과는 다르게 꽤 막 나가는 것을 좋아하는 여자인 모양이지만, 더 중요한 내용을 듣지 못했다. 이게 필요한 건 차치하더라도…
“장소는 어디지?”
이 초대장을 내밀어야 들어갈 수 있는 장소를 몰라서야 일을 시작할 수도 없다.
사실 이 도시에서 얼마나 많은 윈드 엘프가 거래되고 노예로 팔려가든간에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고 관심도 없다.
율령교회까지 얽혀있다고 생각하면 심상치 않은 일임은 틀림없겠지만,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 자식과 칼을 맞대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못 하고 진 채로 끝낼 것 같냐고. 전에 없이 초조한 기분이 다그치는 말에 묻어나 있었다. 무기가 만전이 아니라서 졌다는 건 변명에 불과하다.
“죄송합니다. 장소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E가 유감스럽다는 듯이 한 말이 거짓말인지, 진심인지는 알 수 없었다.
…꽤 켕기는 구석이 있긴 했지만. 모르겠다는 여자를 굳이 들쑤시는 취미는 없기도 하고. 뭣보다 아무리 나라도 신을 모시는 사원에서 그런 짓을 벌일 만큼 막돼먹지는 않았다… 고 생각한다.
“정말이에요. 제가 드릴 수 있는 건 그 초대장뿐이랍니다. 더 도움을 드릴 수 있다면 그러고 싶습니다만….”
“…이건 어떻게 얻었지?”
초대장을 얻은 것은 좋다.
하지만 이것이 어떠한 함정일 가능성도 생각해둬야만 한다. 날 함정에 빠뜨리고 싶어하는 녀석이라면 얼마든지 있으니까. 높게는 여왕부터 낮게는 나 때문에 감옥에 갔을지 모르는 이 동네에 굴러다니던 현상범까지.
“생각보다… 신중하시네요.”
“멧돼지처럼 무식한 타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나?”
어이, 레오레. 왜 네가 끄덕이는 거야.
물론 저 여자는 힘으로 꺾긴 했지만 난 뭐든 힘으로 몰아붙이는 타입은 아니라고.
“…전부 말씀드릴 순 없지만 저는 경매를 관리하는 측과 커넥션이 조금 있어서요. 연줄을 동원해서 얻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 정도로만 말씀드리면 안 될까요?”
“흥. 좋아, 일단 이건 받아두겠어.”
수상한 냄새가 풀풀 풍기는 일이긴 하지만, 오히려 수상하지 않은 척 용을 쓰며 시치미를 떼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쪽이 더 안전하다. 오래 묵은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날이 지나 이드디가 되었으니 조사할 수 있는 날짜는 오늘과 내일. 다음 날인 볼룬디에 맞추려면 나르콜렙시에게 기대할 수밖에 없겠군. 시간은 촉박하지만 하는 수 없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검성 님. 모쪼록 무운을 빌도록 하지요.”
“어이.”
후드를 조금 더 깊게 눌러쓰고는 등을 돌리는 수도녀를 눈을 찌푸리며 불러세웠다.
돌아보지 않은 그대로 등을 보인 채 멈춰선 여자, E가 내 말을 기다리는 것이 몹시, 어쩐지, 거슬렸다.
개목걸이 하나 휙 던져주고 제 마음대로 부려먹다가 결국에 삶아지는 사냥개 신세는 한 번으로 족하다고.
“어차피 뭣 때문에 이런 짓을 하느냐고 물은들 대답 같은 건 하지 않겠지. 말해두는데, 난 내 머리에 뭔가를 끼얹는 놈한테는 반드시 뭔가를 갚아주는 놈이다.”
“…그러니까 검성 님께서는 이 일을 빚으로 여기신다고?”
그렇게도 말할 수 있다.
만약 이게 함정이 아니라 내게 빚을 지워놓으려는 포석이었다면 E의 의도는 꽤 성공적이었다고 평할 수 있었다.
만족스럽게 E는 그 자리를 떠나갔고, 한쪽 눈을 불쾌하다는 듯이 찡그리며 초대장은 레오레에게로 넘겨주었다. 궁금해하는 눈치라서.
“초대장에다가 입장 조건이 더 있네요.”
초대장 외에 갖추어야 할 입장 조건. 꽤 악취미적인 경매이니만큼 악취미적인 조건이 별개로 붙어있었다.
“…노예를 2명 이상 데려올 것?”
사는 쪽이든, 파는 쪽이든.
노예를 동반해야 입장할 수 있는 옥션. 분명히 퇴폐적인 오락과 취미를 가진 분들이 적잖이 모일 것이다. 남부 굴지의 무역도시 윈돌이기에, 다른 영지에서도 이 경매에 흥미를 갖고 참가하는 이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혹시 모르지, 왕도에서도 꽤 높으신 분이 발걸음을 옮길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불쾌해졌다.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얼굴이 떠오른 탓에.
쯧, 하고 그대로 알 프레이야의 사원을 나서려는데 레오레는 곤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그, 주인님. 혹시. 그 옥션에 저를….”
“달리 들어갈 방법이 없다면 그래야겠지. 각오해둬. 뭐, 나르콜렙시는 자기가 말을 꺼냈으니 희희낙락 따라오겠군.”
불안감의 원인은 그것이었나.
레오레는 아직은 쓸모가 있었다. 도피 생활에 돈이 필요하긴 하지만 이 녀석을 팔아야 할 정도로 궁색하지는 않고…
“하아, 뭔 생각을 하는 건지.”
뒤통수가 찜찜해져서 뒷머리를 긁적였다.
돌아가거든 나르콜렙시의 조사가 마무리되기를 기다릴 수밖에, 다른 도리는 없겠다.
그 동안 천천히 어떻게 움직일지를 생각해두도록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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