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 1 / 천릿길도 식후경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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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웬일로 체리 파이를 사 올 생각을 한 건 참 기특하고 고마운 일인데 말야, 검성 군. 응. 검성 군답지 않은 좋은 배려였다고 생각하고 그 배려에 여자는 참 찌잉 하고 마음 한쪽이 따끈따끈해지고 막막 두근거리고 그러는데 말야.”
스텔라는 오물오물 체리 파이 한 조각을 들고 조그맣게 오물거리면서 기쁜 듯이 먹고 있었다. 나르콜렙시도 한 조각을 들고 오물거리면서… 눈동자를 바쁘게 좌우로 굴렸다. 왼쪽에 앉은 나와, 오른쪽에 앉은 레오레를 한 번씩 살펴보고는…
“이런 분위기에서 먹을 수 있어야 마왕 후계자의 자격이 있다는 거야?! 아니, 난 마왕 후계자도 뭐도 아닌 그냥 몽마지만!”
나는 그러잖아도 짧은 심지가 전부 타들어 가 있었다. 즉, 완전히 열 받았다는 소리다.
레오레에 대해서는 알 바 아니지만,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기라도 한 모양이겠지. 이쪽을 힐끔힐끔 보면서 불안해하는 것이 눈에 거슬렸다.
“그렇게 입 꾹 다물고 있으면 나도 그냥 입 꾹 다물고 먹기만 한다?! 눈치 같은 거 안 보고 막, 막 그냥 먹어버릴 거라고!”
그럼 곤란하지. 유일하게 지금 오디오가 비지 않게 해 주는 게 네 존재라고.
일단 머릿속을 지글지글 끓이는 노기는 잠시 젖혀둔 채 속을 다스렸다. 입에 맞지 않는 체리파이 대신 흑맥주를 한 모금 마시면서.
“…뭐 됐다. 개인적인 일이니 너희는 알 거 없어. 별일은 없었냐?”
“이거 맛있어.”
드물게 스텔라가 입을 열었다. 안에 체리파이가 잔뜩 들어있는 게 꼭 욕심많은 다람쥐 같았다. 나르콜렙시가 휴우, 하고 한숨 쉬면서 그 뽀얀 볼에 묻은 크림을 닦아주었다.
“안 뺏어 먹으니까 천천히 먹어. 별일은 없었는데 성에서 왔다는 사람이 검성 군을 찾아왔었어. 없다고 하니까 조금 기다리다가 가더라.”
“그게 별일 있었다고 하는 거 아니냐.”
그렇잖아도 슬슬 부를 때가 되긴 했다고 생각했지만… 그 양반 용태가 좀 어떠려나. 나이도 나이인지라 진작에 은거할 때도 되잖았냐고.
“안 가봐도 돼?”
“뭐 정 급한 일 있으면 알아서 사람 보내오겠지. 굳이 이쪽에서 찾아가야 할 만큼 돈독한 사이도 아니다. 그건 그렇고… 어이, 유스티카.”
“…네?”
레오레는 뭔가 깊이 생각에 잠긴 채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내가 불러도 잠시 듣지 못한 듯 침묵하고 있다가 나르콜렙시가 어깨를 살짝 짚고 흔들자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너, 그 녀석에 대해 뭘 알고 있지? 아까 그 말뜻이 대체 뭐냐고. 그 자식과 싸우면 안 된다고 했던 그 말.”
“…그건… 죄송했습니다. 교회까지도 적을 돌리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라고 여겨서.”
그게 아니겠지. 그런 얌전한 이유일 리가 없다.
이 녀석은 건방지게도 내가 그 자식에게 밀린다고 생각하여 말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쓸데없는 의심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제대로 말하지. 넌 내가 그 자식에게 질 거라고 생각했던 거야. 틀리냐?”
레오레는 서글픈 눈을 하고는 입술을 깨문 그대로 조금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히려 그 말에 반응한 것은 나르콜렙시였고.
“에이, 설마.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검성 군은 내가 이제껏 본 남자들 가운데서 가장 강했는걸. 그~래~서 이렇게 붙어있는 거고 말야.”
“체리 파이나 먹어라.”
“스텔라랑 같은 취급?! 정말 너무하네!”
어차피 먹을 거면서.
체리 파이 하나를 집어다 입에 물려주니 나르콜렙시는 잔뜩 골이 난 얼굴 그대로 입에 욱여넣어 버린 체리파이를 우물거리다가 지나치게 큰 알을 물어버린 뱀처럼 힘겹게 꼴깍 삼켰다.
“유스티카, 이번엔 그냥 넘어가 두겠지만 경고하겠다. 한 번만 더 건방 떨었다간 네가 쉽게 생각하는 노예가 진짜로 어떤 취급을 받는지 그 몸으로 알게 해 주겠어.”
힘주어 경고했지만 레오레는 여전히 대답도 하지 않고 눈을 내리깐 채 제 옷자락을 쥐고 바르르 한번 어깨를 떨었다. …보아하니 비슷한 상황이 되면 똑같은 짓을 하겠다는 것 같은데, 그때는 정말로 건방을 떠는 노예에게 어떤 취급을 하는지를 보여줄 필요가 있겠지.
지금 이야기는 이 정도로 매듭짓고, 접시에 놓인 염소 다리 하나를 물어뜯었다. 언제고 그 자식과 결판을 내려면 몸을 회복해둘 필요가 있었다.
“나르콜렙시.”
“어, 왜?”
체리 파이를 억지로 삼키느라 텁텁해진 입을 벌꿀술로 적시고 있던 나르콜렙시를 부르니 그녀가 투명한 핑크색의 눈동자를 천진하게 깜빡거렸다.
“너 말야. 어차피 멋대로 노예 거래를 조사하고 있었지? 알아낸 게 있으면 토해내 봐.”
“…뭐, 어음. 그야 뭐 나도 여기 드나드는 모험가들에게 주워들은 정도지만 그것만이라도 좋다면야. 근데 왜 거기에 흥미가 생겼어? 혹시 정의의 사자 흉내라도 내보려구~?”
“등신아, 그래서겠냐. 그 건이 빨리 끝나야 그 자식과 속 시원하게 결판을 낼 수가 있다고.”
키득키득 웃으면서 내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쿡 찌르던 나르콜렙시에게 손가락을 둥글게 말아 이마를 겨누니 대번에 질색하며 물러섰다.
“진짜 너무하다니까. 뭐, 소문에 불과하지만 매주 ‘볼룬디’에 지하 경매장에서 노예를 사고파는 경매장이 열린다고 하더라구.”
“장소는?”
“저~언혀. 게다가 초대장이 있어야 참석할 수 있는 경매장이라서 아무나 들어가지도 못한대. 초대장은 원래 경매에 참여하고 있던 사람이 보증해야 새로 만들 수 있어서, 보안에 꽤 공을 들였나 봐. 그런 식으로 장사가 되긴 하나?”
‘볼룬디’라면 앞으로 이틀 후다.
9일로 이루어진 주간에서 7일째에 해당하는 날로, 율령교회에서 모시는 우르 10신 중 장인과 거래를 관장하는 볼룬드를 기리는 날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날 장인들과 상인들은 더 열을 올려서 돈벌이하곤 하는데. 그런 면에서 노예 거래 날짜가 볼룬디라는 것은 신빙성이 있는 소문이었다.
“장소를 알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군.”
“알아보는 건 하려고 하면 어렵지는 않지마안.”
슬쩍, 나르콜렙시가 악마 같은 웃음을 띠면서 제 턱을 살며시 손가락으로 쓸었다. 생각해보면 이 녀석, 악마 맞지.
제아무리 입이 무거운 상대라도 꿈을 한 꺼풀 파고들어 비밀을 캐는 것이 바로 이 녀석의 특기 중의 특기가 아닌가.
“원하는 거라도 있나?”
물론 들어줄지 말지는 조건을 듣고 나서다.
윈돌에는 나름대로 커넥션이 있는지라 마음만 먹으면 뒤져서 정보를 캐는 것도 가능은 했다. 비효율적이고 귀찮아서 문제지.
“별 건 아니고오… 알아내고 나면 갈 거잖아? 그 경매. 그때는 날 데려가는걸로. 저 여자 말고.”
…무슨 뜻이지?
요컨대 경매장에 숨어 들어갈 때 레오레가 아닌 자길 데려가라, 뭐 그런 말인가? 상관은 없지만… 슬슬 레오레에게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는 건 그만뒀으면 좋겠다.
“그 정도라면 상관없지.”
천천히 승낙하자 나르콜렙시가 이번엔 손끝으로 제 입술을 매만지면서 조금 더 불길해보이는 웃음을 띠었다. …대체 뭐냐고, 난 이 녀석이랑 대체 무슨 거래를 해버린 거냐?
“그럼 오늘 밤에라도 알아볼게. 조금 내 부하들을 불러다가 이래저래 조사하면 내일 아침이면 경매 주최자가 지난 밤 어떤 색 팬티를 입은 여자랑 잤는지까지도 알아낼 수 있을걸.”
“그딴 건 알아낼 필요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아.”
이 음마년이 기세등등하고 의기양양해하면 오히려 내 위장이 쓰리게 되는 일이 벌어지는 인과관계는 대체 어떻게 되먹은 섭리냔 말이다.
“어이, 하이엔.”
“왜 그러셔, 갈렉스.”
“손님이 와 계시다. 네가 잠깐 와 주길 바란다던데.”
…와 계시다? 꽤 거창하게 나오는데.
하지만 단언하자면 이 도시에서 나한테 존대를 들을 수 있는 인간은 한 명뿐이라고. 미간에 깊게 주름이 패도록 불쾌감에 찌푸리면서 한쪽 눈을 일그러뜨리곤 갈렉스를 올려다보았다.
“그게 뭐 어쨌다고? 나한테 볼일이 있으면 직접 오라고 그래. 어디의 어떤 새끼길래 사람한테 오라가라야. 여기 영주도 나한테 그렇게 안 해. 뒈지고 싶지 않으면 건방 떨지 말라고 똑똑히 전해.”
그렇잖아도 교회 기사인지 뭔지 하는 놈 때문에 심사가 잔뜩 뒤틀린 상태였다.
그런데 누구더러 오라가라야? 어떤 놈인지 몰라도 그 빳빳한 얼굴을 확 접었다가 펴버릴까 보다. 갈렉스는 곤혹스러운 얼굴이 되어서는 물러갔다.
…보아하니 식당에 있는 녀석들이 날 좀 보잔 녀석이 앉혀놓은 녀석인 모양이다.
기세를 보아하니 무기를 좀 쓰는 녀석은 다 여기 붙여놓은 모양. 어떤 놈이 이딴 짓을 하는지… 물론 이렇게 대놓고 감시당할 폐를 끼친 녀석은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할 정도로 잔뜩 있긴 했다.
가까이에는 유스티카 가문에서 소중한 고명딸이 노예노릇을 하고 있다고 하면 이런 짓을 벌여도 전혀 이상할 게 없거니와. 당장 덤벼들 생각도 없어보이는 건 다행한 일이다. 지금 성질 죽여가면서 사정 봐줄 기분은 아니거든.
갈렉스는 곧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밀랍으로 봉해진 편지봉투가 하나 들려있었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것을 내밀었다. …어지간히 함부로 할 수 없는 상대였던 모양이지?
“성질머리하고는. 대신 이걸 전해달라는군.”
그 자리에서 겉봉을 뜯고 안의 쪽지를 꺼냈다.
흘려 쓴 글씨체에서, 어딘지 귀족적인 품격과 교양이 느껴졌다. 내용은 이러했다.
「오늘 밤, 날이 지나는 12시, 알 프레이야 사원에서 뵈었으면 합니다. 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