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 1 / 천릿길도 식후경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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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소리조차 내지 않고 칼끝이 한 뼘 정도 파고들었던 지면에서 뽑혔다.
마치 지상에 떨어진 유성처럼 황황하게 타오르는 롱소드를 손에 붙든 채 검사는 사심이 보이지 않는 푸른 눈으로 이쪽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승기를 잡았음에도 오만하지 않고,
맞서는 상대임에도 적대하지 않고,
싸움에 임했음에도 분개하지 않는.
말 그대로, 고고한 이야기 속의 기사다.
“검, 잡지 않는가?”
“엿이나 쳐드시지.”
“준다면.”
현실에는 보통 존재하지 않지, 이런 녀석. 조금 입안에 씁쓰레함이 번지는 것을 느끼면서 주먹을 들었다. 녀석은 검을 들어라, 라고 했지만… 순순히 그 말을 믿겠냐. 후우, 하고 쿵쿵 가슴팍을 두들기는 고동을 가라앉히고 녀석을 바라보았다.
녀석의 숨소리, 움직임, 발놀림, 칼끝… 오감을 바짝 불러깨웠다. 모자라면 육감까지도 끌어올린다. 그럴 만한 적수였다. 저런 성품의 녀석이 검을 줍는 사이 기습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지만… 이 세상에는 그런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녀석이 얼마든지 있다고.
“보기와는 달리 꽤 신중하군.”
“꽤 드물게도. 성질에 안 맞지만.”
거리를 유지한 채 자세를 잡은 그대로 숨을 느릿하게 유지하는 내게 그렇게 툭 한 마디 내뱉고는 녀석의 분위기가 일신했다.
말하자면, 이제까지…
‘성검빙의’인가 뭔가를 말하기 전까지는 임전태세조차 아니었던 것이다.
즉시 발을 움직였다. 거의 구르다시피 뒤쪽으로 튕기듯 몸을 날리면서, 발차기를 날렸다.
“큭….”
발끝은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고, 녀석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한 발자국도.
…설마, 녀석의 위압에 내가 밀렸다고? 그저 녀석이 공격해 들어오자고 생각하자마자 몸이 과민반응을 해 버렸단 말인가? 꽤 자존심 구기는 상황이지만…
“반응이 훌륭해. 내가 공격하자고 생각하자마자 움직이다니. 짐승 같은 감인데.”
녀석의 말은 꽤 놀랐다는 투였다.
…아마 비웃거나 깔보려는 생각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 정말 순수하게 놀라서 그렇게 말했을 테지.
그래서, 더 열 받았다.
나도 칼밥으로 먹고 산 세월이 두 자릿수라고, 이 자식아!
발을 움직였다. 도움닫기 한 번, 그리고 디딤발 한 번. 녀석과의 거리를 두 걸음으로 좁힌 뒤, 일단 안면에 오른 주먹을 날려보았다.
물 흐르듯이 목과 어깨가 옆으로 움직여 피해냈다. 숨조차 흐트러뜨리지 않는 얼굴에 더욱 더 분개가 들끓었지만, 가라앉혔다. 감정적으로 싸움에 임하면 진다는 정도도 모르진 않았으니까.
“너 이 자식, 날 얕보는 거냐!”
하지만 사실 내 머릿속을 더 덥히는 사실은 따로 있었다.
이놈이 손에 쥔 삐까뻔쩍하게 빛나는 저 검, 그것을 드러낸 이후 한 번도 휘두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쯤 되면 검을 쥔 손을 봉하고도 내게 당하지 않을 자신감이 있다는 노골적인 선언이나 다름없잖아.
“아, 여기에는 조금 사정이….”
“사정 봐주다가 골로 가는 수가 있다, 이 새꺄!”
발을 콱, 밟았다. 뭔가 어물어물 변명하던 녀석의 얼굴에 잠깐 당황이 스치고, 뒤로 한껏 당겼던 머리를, 마치 새총에서 돌멩이를 쏘듯 그대로 녀석의 머리를 향해 휘둘렀다. 어, 하고 한층 더 당혹한 표정이 서리는 것이 통쾌했다.
쩌어억!
머리와 머리가 부딪혔는데 마치 돌과 돌이 부딪히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부들부들, 이마가 떨렸다. 부딪힌 이마에서 주르륵 피가 새어 시야를 가렸다. 비틀비틀대며 물러나는 꼴이 꽤나 정신이 띵하게 울려온다.
“크악…! 뭐, 무…!”
내 쪽이.
들이받은 것은 내 쪽인데, 마치 성벽에 들이받은 것 같은 충격이 내 이마를 강타했다. 피부가 찢겨져 흘러내리는 피가 눈에 스며들고, 눈앞에 별이 빙빙 도는 게 보였다.
어지간히 보시기에 딱했는지, 녀석이 측은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성육신(成??)을 이루고 있는 기사에게 박치기라니, 꽤… 놀라웠다.”
“끅, 학…!”
그제야 생각났다. 성전력을 끌어올린 교회의 기사들은 몸이 마치 강철처럼 단단해진다고.
사라스바티, 제발 좀 빨리 얘기해주면 안 되냐…?!
“덕분에… 재울 수고는 덜게 되었군.”
처음으로 녀석의 손이 움직였다. 한 방에 자비 없이 여신 곁으로 보낼 것 같은 검을 이제야 휘두르려고 하니 오히려 정신이 또렷해졌다.
칼날이 다가온다.
아래에서 위로, 횡베기. 왼쪽 아래에서부터 오른쪽 어깨를 후려치는 칼의 궤적이 훤히 보였다.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몸이 반응했다. 땅을 딛고 선 다리와 칼날 사이 아슬아슬한 틈새사 보였다.
“…?!”
대충 손가락 하나 정도의 차이.
그 사이로 녀석의 뒤로 몸을 빼내면서 손을 뻗어 바닥에 널부러진 츠바이핸더를 움켜쥐었다. 녀석의 등은 텅 비었다!
“뒈져라!”
“…말씨가 너무 저속하군.”
“네놈 뱃속 내용물만큼 저속할지 두고 보면 알겠지!”
누가 들어도 이쪽이 악당이군.
하지만 상관없다. 일단 한 방 갈겨주지 않으면 속이 풀리지 않는다고!
“그 잘난 맷집으로 칼빵도 막을 수 있는지 한번 봐주…!”
예상한 것보다 빠르게, 녀석의 몸이 제자리에서 반 바퀴 몸을 돌렸다.
부웅, 하고 휘두르는 롱소드의 날에서 스산한 예감이 들었다.
보인다.
이대로 녀석의 가슴팍에 칼을 쑤셔넣으려 밀어붙였을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가.
으득, 이를 깨물고 그대로 츠바이핸더를 내던지면서 발을 멈춰 세웠다. 눈꺼풀과 눈두덩을 밀어올리며 확 뜨인 녀석의 흰자위에, 푸른 눈동자에 돌을 던진 호수처럼 동요가 번져갔다.
부웅.
녀석의 검이 아무렇지도 않게 츠바이핸더를 베어버렸다.
손잡이도, 가드 부분도 아니다. 센이 사력을 다해 두드렸을 칼날 부분을, 빛을 머금은 롱소드의 칼날이 아무렇지도 않게, 갓 구운 빵이 식칼에 베이듯 부드럽게 잘려나가 반토막났다.
“…정말, 굉장한 감이야.”
만약 그대로 칼을 내던지지 않고 몰아붙였더라면
잘려나가는 건 칼이 아니라 내 팔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바닥에 쿵, 하고 처박히고 있는 게 츠바이핸더외 쇳조각이 아니라 내 팔과 피였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하면, 아무리 나라도 머릿속이 차갑게 식어버리고 만다.
“분명히 팔 한쪽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녀석이 아쉬운 듯 말을 하면서 검을 내렸다. 빛이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칼날 구석구석에 금이 간 롱소드가 빠직빠직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너 이 새끼….”
미간에 주름을 잔뜩 잡곤 노려보았다.
녀석의 단정한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없었지만,
그 푸른 눈동자에 어떠한 욕구가 일렁이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느꼈다.
승패에 대한 갈망. 그 욕구만은 여자를 안는 것보다, 명예를 얻고자 하는 것보다도 먼저… 철들기 전부터 숱하게 맛봐왔다. 이 녀석도 그런 부류일 거라고 막연하게 짐작이 갔다.
요슈아 세룰라이트.
그 이름을 머릿속에 넣어둘 필요가 있겠다.
“서로 무기를 잃었다. 이대로 주먹을 겨루는 것도 즐거울 것 같지만….”
그거 좋지.
조금 피가 빠져나가 다리가 후들거리지만, 오히려 머릿속을 태우던 피가 빠져나가서 시원해졌다고. 사납게 웃으며 주먹을 치켜들었지만 녀석의 얼굴에 아쉬움이 떠올랐다.
“안타깝게도 나는 나 자신의 욕구보다 임무를 우선해야 하는 처지이니. 너를 전사라고 여겨 한 가지만 묻겠다. 너는 이 도시에서 일어나는 노예 밀매와 연관이 있는 자인가?”
“그딴 거 알 게 뭐야. 시시한 잡소리 걷어치우고 냉큼 들어와. 기생오라비 같은 자식아.”
“…아니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겠다.”
녀석이 몸을 돌려 등을 보였다.
으득, 이가 갈렸다.
“도망치려는 거냐, 새꺄!”
“미안하지만 그렇다. 이 이상 임무를 방치할 수도 없거든. 네가 관계자가 아니라면 더더욱… 충고해두겠는데. 여자를 노예로 데리고 다니는 건, 그…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만, 음. 별로 보기 좋지 않다.”
“어쩌라고! 이 새끼, 들어오지 않을 셈이면, 내가…!”
와락, 등 뒤에서 감겨오는 팔이 있었다.
바들거리는 팔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지만 걸음을 세우게 하기는 충분했다. 누구의 팔인지는 뻔했다.
“그… 만, 두세요. 그만…. 저 사람과는, 그러시면 안… 됩니다….”
이젠 데리고 다니는 노예까지 건방을 떨려고 한다는 사실에 머릿속에 빠져나갔을 열이 한층 더 들끓어올라 치솟았다. 그 손을 콱, 제 피가 묻은 손으로 붙들어 떨쳐내려고 하자 녀석의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렇게도 승부를 원한다면 받아주겠다. 하지만 지금은 아냐. …아무렇지도 않게 일행을 핍박하려 하는 저속한 남자와의 승부 따위, 내게 아무런 명예도 되지 않는다.”
“이 자식이 말끝마다…!”
“이름을 밝혀라. 내 임무를 마치면 내가 널 찾아가겠다.”
젠장!
결국 금방이라도 뛰쳐나가려던 발을 멈춰세우자 스르륵, 허리를 붙들고 있던 팔이 풀렸다. 학학거리는 숨소리가 귀 뒤에서 울려서, 입안에 쓴맛이 돌았다.
“하이엔 더츠백이다. 네놈, 그럴듯한 검을 마련해서 찾아와라. 한 번 휘둘렀다고 부서지는 칼 들고 찾아오면 내 칼에 죽게 될 거다.”
“…하이엔 더츠백?”
녀석의 눈이 조금 커졌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설마 이 자식, 지금 ‘실망했다’는 표정으로 날 본 건가?!
“염두에 두도록 하겠다. 그럼, 이만.”
녀석이 등을 돌려 빠져나갔다. 빈 칼집이 허리에 매달려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쾅, 주먹 하나가 바로 옆의 벽을 후려쳤다.
먼지와 돌멩이가 우수수 떨어지는 가운데 까드득 하고 멧돌처럼 무엇인가 갈리는 소리가 뒷골목에 처연히 울렸다.
빌어처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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