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 1 / 천릿길도 식후경 (6)
* * *
(6)
대강의 사정은 알았다.
이 녀석은 윈돌에서 일어나는 엘프 노예 거래를 조사하고 나아가 동족을 구출하기 위해 이 도시에 왔고, 영주와의 대담을 원하고 있었다. 즉 다시 말하자면…
“결국, 나랑은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이구만. 다시 눈에 띄면 그땐 정말로 꼬리를 잘라다가 방한용 담요로 만들 줄 알아. 썩 꺼져.”
레오레가 놀란 토끼눈을 했다. 나르콜렙시는 그럼 그렇지, 하고 피식 웃었고.
레오레는 기사답게 조금 망설이다가, 쓸데없는 국면에서 헛된 기사도를 발휘하려 한다.
그런 거, 딱 질색이다.
“저… 사정이 좀 딱한데 조금 도울 일이 있으면 도와주는 건 어떻…”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내가 얻을 것도 없거니와 끼어들 이유도 없다.
윈드 엘프 전체에게 빚을 지우는 거면 몰라도 고작 노예 몇 풀어주는 데 얼굴을 들이밀라고? 그렇잖아도 여기저기서 노리는 놈이 많은 목인데.
“…알고 있다. 나, 나도… 너 같은 부랑자에 불한당의 도움을 받는 건 질색이다!”
뾰족하게 맞물리는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릉거리다가, 열린 창문 틈으로 몸을 던져 빠져나가는 윈드 엘프를 굳이 뒤쫓지 않고 이쪽도 이쪽 나름대로 해야 할 일부터 하기로 했다. 애당초 윈돌에는 목적이 있어서 온 거니까.
“나갔다 온다. 니들은 따라오…. 아니, 유스티카, 넌 따라와.”
“네.”
윈드 엘프가 몸을 던져 빠져나간 창문 쪽을 보고 있던 레오레는 순순히 따라나섰고, 지명에서 배제된 나르콜렙시가 대번에 도끼눈을 했다.
“아니, 쟤는 데려가면서 그럼 나는?”
“꼬맹이 지켜.”
“난 집 지키는 개 취급?!”
개로서도 사실 별로 믿음직스럽진 못 하지만. 무시하고 방문을 나서는 레오레가 그녀를 뒤돌아보면서 어째 조금 웃는 게 보였다. …유치하긴.
“그럼 부탁한다고.”
“으으으으으… 검성 군, 바보!”
손을 흔들며 방을 빠져나가면서 문을 닫으니 등 뒤에서 퍽 하는 소리가 났다. 분풀이겸 베개라도 집어 던진 모양이지만 알 게 뭐냐고. 그대로 여관 문 쪽으로 다가가자, 이번엔 여관 주인 갈렌스가 의미심장한 웃음으로 이쪽을 보았다.
“뭐야. 여자 하나만 데리고 어디 가냐. 여관은 여긴데. 재미볼 거면 방 하나를 잠깐 빌…”
“벽이 하도 얇아서 관음증 가진 새끼들은 죄다 벽에 들러붙게 생겼던데 재미는 무슨 빌어처먹을 재미냐. 뭐하면 방음 공사 좀 하시지.”
“우리 여관은 그래도 나은 편이다, 이 망할 새끼야!”
X이나 까 잡수쇼.
가운뎃손가락을 척 들어보이고는 등에 검을 멘 그대로 길을 걸었다. 두어 걸음 떨어진 뒤에서 레오레가 소극적으로 따라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별로 말을 건네지도 제대로 따라오는지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주위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깃거리는 게 신경 쓰일 줄은 몰랐다.
그것도 그럴 것이 등에 메고 있는 흉검… 지나치게 눈에 확 띄는 모양을 하고 있어서 이걸 메고 돌아다니면 나 잡아잡수 하는 꼴이다. 먼저 이걸 어떻게든 해야 조금이라도 마음 편히 돌아다니겠지.
“그… 어디로 가는 겁니까?”
레오레가 살짝 주눅든 채로 물었지만 굳이 대답해주지 않았다.
어차피 도착하면 알게 될 거고, 별로 저 여자에게 해가 되는 장소도 아니니까.
지금 내 꼴은 몽타쥬도 필요 없이 불심검문 한 방에 추격자가 몇은 달라붙을 수도 있는 꼴이다. 뭐 한창 이름을 날릴 때야 그런 시선도 다소 즐겼을지 모르지만.
서너 구획쯤 걸었다. 윈돌은 큰 도시라서 그 정도 걸으면 기진맥진하기 마련이건만 그래도 여왕을 모시던 기사이자 이름난 무가 출신이라 그런지 레오레는 그다지 지친 기색 없이 잘 따라오고 있었다.
그렇게 좀 돌아서 걸은 끝에, 목적한 장소에 도착했다.
후미진 뒷골목에 들어서자 망치질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일정한 리듬을 두고 까앙, 까앙, 까앙… 금속을 두들기는 소리와 후끈하게 살을 덥히는 열기, 그리고 매캐한 냄새. 레오레도 슬슬 어딜 향해 가는지 알게 된 모양이다.
뒷골목을 한번 더 돌자 열기가 한층 더 강렬하게 피부에 스며들었다. 레오레가 한발 앞서서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나아가더니, 모루에 칼날을 두고 두들기고 있는 젊은 청년에게 말을 걸었다.
“실례합니다. …대장장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청년이 머리를 들었다. 두건으로 묶인 머리 사이로 까만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돋아난 게 보였다. 얼굴을 든 청년이, 레오레를 꽤 아니꼬워하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댁을 도제라고 생각한 모양이지. 여전히 제자 한 명 안 두고 우중충한 일터에서 혼자 우중충한 얼굴 하고 있구만.”
“거 시끄럽네. 제자랍시고 들인 놈들이 죄다 도망가는 걸 낸들 어쩌라고.”
레오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흥, 하고 심성이 뒤틀린 것 같은 웃음을 거침없이 드러내며 대장장이 센이 단단한 근육이 배인 팔짱을 끼곤 이죽거렸다.
“대장장이는 여기에 있는데. 뭐가 필요하지? 보아하니 창을 쓰는 것 같은데. 그것도 마상창. 갑옷, 마갑, 편자, 안장, 고삐까지 돈만 내면 만들어주니까 말만 해.”
그 변태 같은 눈썰미도 여전하군.
레오레를 샅샅이 훑고 올라가는 눈에서 이미 말을 탄 채로 마상창을 휘두르는 기사라는 것을 훤히 알았을 것이다. 게다가 이미 타고 있는 말이 대충 어떤 체형을 지녔는지도 파악했을 테니 편자를 만들어달라면 그 자리에서 내주겠지.
레오레는 어안이 벙벙한 눈치. 그러든가 말든가 그녀를 제치고 내가 나섰다.
칼집에서 흉검을 꺼내 보이자, 센의 눈이 그 쪽으로 옮겨갔다.
“오늘은 내가 손님이야, 영감.”
“여전히 험하게도 쓴 모양이군. 아니, 그게 아니라 어디 창고에 처박아뒀다가 손질도 안 하고 쓰고 있지?”
입가를 일그러뜨리며 피식 웃었다.
쇠 만지는 일 말고는 세상일에 전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관심이 없는 편집증적인 성격인지라 내가 반역 혐의로 쫓기고 있는 것도 모를 테지.
뭐 그걸 구태여 말할 필요는 느끼지 못하기도 하고.
“사정이 있어서. 이 녀석, 고치고 좀 수수하게 만들어줬으면 하는데. 얼마나 걸리지?”
“날만 갈 거였으면 한나절이면 족할텐데 그 정도 작업이면 이틀 정도는 필요하겠군.”
내게서 흉검을 받아내서 한번 칼등을 손가락으로 슥 훑어보고는 센이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기간을 말하자, 레오레는 이제는 혼란의 극치에 달해 무슨 대화가 오가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충 알아들어라. 이 영감은 걸리버다.”
“아….”
걸리버란 대강 수십 년쯤 전인지 정확하게는 모를 언제부터인가 나타나기 시작한 다른 세계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말했다. 뭐, 처음으로 이 땅에 온 사람이 한 말에서 명칭이 유래되었다던가.
그들은 이 세계의 사람들과는 달리 한 가지 특수한 능력을 타고 넘어오는데, 그걸 대충 ‘스킬’이라고 부르곤 했다. 그리고 눈앞의 대장장이 센 또한 걸리버로서 스킬을 갖고 있었으니,
“잘 늙지 않는 몸이라는 건 의외로 성가실 때도 있지. 안 그래? 영감.”
“흥. 난 힘이 달려서 쇠를 두드릴 수 없을 바에야 내 손으로 직접 내 목을 베는 쪽을 택할 거라고.”
불로(Anti age).
아예 늙지 않는 것은 아니나 신체의 노화는 아주 천천히 진행된다. 단련에 따라서는 죽기 직전까지 지금의 체형을 유지할 수도 있을 테지. 그러다가 미뤄둔 세월의 부채를 육신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가 되면 어느 날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센은 최초로 걸리버가 당도한 이후 바로 뒤이어 나타난 걸리버 중 하나라고 했다. 그 뒤로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쇠만 두들겼다고 하지만.
하지만 실력 하나는 확실하다.
적어도 내가 검을 맡길 정도의 실력인 것이다. 허리에 찬 녀석의 검도… 칼집채로 함께 보였다.
“이 녀석도 부탁하자고.”
“이제야 겨우 그걸 고칠 마음이 들었냐? 멍청한 놈 같으니라고.”
팔짱을 낀 채 흥, 하고 코웃음을 치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거 잔소리는 집어치우시지. 생긴 건 나보다도 어리잖아.
칼에 베인 흉터와 화상이 군데군데 얼룩진 팔로 천천히 칼집에서 칼을 뽑아냈다. 눈을 가늘게 뜬 채 부러진 부분을 유심히 살피던 센은 흠, 하고 숨을 내쉬었다.
“죽은 녀석이 부처든 수라든 간에 무릇 망가진 무기란 고쳐서 산 녀석이 휘둘러야만 값어치가 생기는 거다. 이제 죽은 녀석은 떨쳐버려. 성불 못 한다.”
쉽게 말하긴. 조금 흉흉한 눈으로 보았지만 이 영감은 내 위압도 마치 꼬맹이의 치기인 것처럼 바람맞는 들풀마냥 아무렇지도 않게 흩어내 버리니 오히려 이쪽이 진이 빠졌다.
“검이나 깔끔하게 고쳐달라고.”
“애송이가. 사흘쯤 걸린다. 칼 좀 살살 써라.”
아예 검 두 자루를 통째로 처음부터 만드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작업이다. 사흘로 어떻게든 되는 건가 싶긴 하지만 빈말을 하는 자가 아니니까 상관없겠지. 흥, 하고 몸을 돌리니 센이 어이, 하고 불러세웠다.
“그동안 대신 쓸 칼은 빌려줄 테니 가져가. 네놈이 사흘이나 얌전히 있을 턱이 없겠지.”
“말 나온 김에 이 녀석이 쓸 창도 하나 쓸만한 것으로 골라주쇼.”
“네? 저, 저는….”
“토 달지 마. 어차피 그러려고 데리고 온 거니까.”
흠, 하고 다시 한번 레오레의 몸을 한번 아래에서 위로, 그리고 팔과 다리, 허리를 중점적으로 훑어보던 센이 등을 돌리고 대장간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뭔가를 뒤지는 쇳소리가 쩔그럭거리며 귀를 찔러댔다.
레오레는 조금 기대하고 있는 눈치였다.
잠시 후 센이 다시 대장간 밖으로 나왔을 때, 그는 양손에 각각 칼집에 든 대검 한 자루와 날이 넓은 창을 들고 있었다.
“파르티잔(Partisan)이군요….”
끄트머리는 뾰족하게, 뒤쪽으로 넓게 펼쳐진 창날의 양쪽에 예리하게 날을 세운 도끼날을 가진 창을 받으면서 레오레는 조금 놀라는 모양이었다.
이쪽이 받은 츠바이핸더도 흉검 가름만큼은 아니어도 손에 달라붙듯 감겨왔고, 무게도 딱 맞았다. 기분 좋게 휘두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사흘간 땜빵으로 쓸 무기치곤 나쁘지 않다.
“아질 녀석도 언제 한번 오라고 해. 활을 손볼 때가 지나도 한참 지났잖아.”
“그 녀석은 한동안 얼굴보기 힘들걸? 아무튼 고맙수. 그럼 고생하셔.”
“흥.”
바로 작업에 들어갈 모양인지 센은 두꺼운 가죽 장갑을 끼면서 턱짓으로 축객령을 내렸다.
하여간 붙임성이라고는 저기 타고 있는 노에 불쏘시개로 쓸래도 없는 영감 같으니. 이쪽에 대한 흥미를 잃은 센과 대장간을 뒤로하고, 뒷골목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