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 1 / 천릿길도 식후경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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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모르는 얼굴이다.
자신을 스스로 마당발이라고 자부하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대놓고 미행하는 녀석이 전에 본 적이 전혀 없는 초면이라니 어쩐지 조금 부아가 치미는데.
하지만 어디에서 온 녀석인지만은 알 것 같았다.
쫑긋 솟아오른 뾰족한 귀. 그리고 엉덩이에서 살랑거리는 털이 북슬북슬한 꼬리. 미행이 들킨 것이 분했는지 그르릉거리는 입에서 도드라진 날카로운 송곳니. 샛노란 눈동자 안에서 쭉 세로로 찢어진 마름모꼴 동공이 경계의 빛을 가득 품었다.
“…수왕족 녀석이… 아니군. 혹시 바람숲(Windwoods)에서 온 녀석이냐?”
마족의 대부족 중 한 갈래인 수왕족은 대개 체형만 인간과 비슷할 뿐 짐승으로서의 형질이 강한 종족이지만, 눈앞의 이 녀석은 오히려 인간의 몸에 짐승의 형질이 일부 발현된 모습이잖아.
그 모습을 보니 예전에 사라스바티가 했던 말이 문득 기억났다. 바람숲의 주인인 정령왕, ‘폭풍사냥꾼’ 루드라의 피를 진하게 받은 아이는 저러한 모습으로 태어나 동족으로부터 축복받은 아이로서 자라난다고.
하지만 왜 그런 녀석이 인간의 나라, 인간의 도시에 있는가? 자신도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이유도 짐작할 길이 없었다.
“대답 안 해? 난 윈드 엘프(Wind elf)한테 미행당할 만한 짓을 한 적이 없어. 왜 날 몰래 쫓아왔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 일단 그 겨울에 유용해 보이는 꼬리부터 자른다.”
“큭….”
분한 듯한 표정에 꼬리가 확 부풀면서 한층 더 경계의 기색이 강해졌다. 어설프게 퇴로를 슬금슬금 살피는 게 꽤 거슬리는데 어쩐다. 정말 꼬리부터 확 짤라버려?
내가 누군지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미행을 하겠냐고. 위협 삼아 칼자루를 쥐었다폈다 하니 한걸음 물러서다가… 등을 돌리고 도망치려 각을 보는 게 훤히 보였다. 한쪽 눈썹이 슥 치켜올라갔다.
“어쭈우?”
놓칠 것 같냐고. 제법 다릿심에 자신이 있는 모양이지만 아직 한참 멀었다. 단 세 걸음 만에 뒤를 따라잡아 뒷덜미를 붙잡고 들어 올렸다. 뜻밖에 무게는 가벼웠다.
“큭, 놔 줘, 놔 달란 말이다…! 난 미행을 하려던 게 아냐, 중대한 사명을 띠고 이 땅에 온 거다, 놔라, 이런 짐짝 같은 굴욕적인 취급은…!”
바둥거리는 늑대인지 고양이인지 애매모호한 녀석을 옆구리에 끼고 전력질주로 여관에 도착하고 보니 뛴 나는 멀쩡하건만 편하게 옆구리에 매달려 온 녀석이 오히려 기진맥진해있었다. 팔자 편해 좋겠구만.
“어이, 갈렉스. 우리 방은 어디…”
…어쩐지 초조하게 여관 로비를 배회하고 있던 여자와 마주쳤다. 방에서 자빠져 있을 것이지 왜 여기서 정신 사납게 그러고 있는 거지? 여관 주인 갈렉스가 정신 사납게 서성이는 손님을 귀찮아하는 게 눈에 선했다.
그 불만은 내가 받게 되겠지. 짜증이 나서 말이 곱게 나가지도 않았다.
평소에도 그다지 말을 곱게 하지는 않았지만.
“뭐 하냐.”
“아, 주…”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는데?”
쪽팔리니까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건만 하여튼 내 말을 들어처먹는 녀석이 하나도 없다는 게 말이 되냐.
이를 드러내며 으르릉거리자 여자, 레오레 유스티카가 입을 다물고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가 이내 내 옆구리에 매달린 채 축 늘어진 녀석을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죄송합니다. 누구인가요?”
“말하자면 좀 길지만 날 미행하던 녀석.”
…아무래도 전적이 있었던지라 레오레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갈렉스가 성의라곤 코딱지도 맺히지 않을 태도로 2층이라고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다. 아무래도 우리 일행에게 내준 방이 2층에 있는 방인 모양이다. 어딜 가든 눈에 띄는 나르콜렙시가 있으니 방을 찾는 게 어렵진 않겠지.
계단을 타고 올라가자 까르르 웃는 속된 목소리가 들렸다. 레오레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방정맞게, 하고 험담하는 것은 좋지만… 내 귀는 그렇다치고 괜히 상대 귀에 들리지는 않게 말하는 건 어떨까.
뜨내기 모험가 둘과 적당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나르콜렙시가 귀를 쫑긋 세우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아, 어서 와 하이… 에? 뭐야, 그건?”
하다못해 누구냐고 물을 순 없었냐.
흑심이 찐득하게 묻어나는 태도였던 뜨내기 모험가에게 손을 대충 흔들곤 이쪽으로 다가온 나르콜렙시가 신기하다는 듯 카벙클 색 눈동자를 빛내며 내 옆구리에 끼인 털뭉치를 이리저리 바라보았다.
쳇, 하고 뜨내기 모험가 둘이 계단을 내려가면서 날 향해 흉흉한 시선을 던지는 게 보였다. …뭔데?
“너, 저 머저리들한테 대체 뭔 얘길 한 거냐?”
“내가 검성 군에게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에 대한 얘기?”
혀를 살짝 빼물고 눈을 게슴츠레 뜬 채 시치미 떼는 나르콜렙시. 요컨대 이런 대우 말인가.
이마에 따악 손가락을 튕겨 딱밤을 때려주자,
“악! 진짜아아아, 검성 군, 좀 너무한 거 아닐까 진짜?!”
“시끄러. 그렇게 부르지 말랬잖아. 벌이다, 짜샤. 따라오기나 해.”
악악거리는 것을 무시하고 일단 방으로 들어갔다. 이번엔 레오레조차도 조금 측은한 눈으로 나르콜렙시를 보고 있었다.
잔뜩 삐져서 볼을 한껏 복어처럼 부풀린 나르콜렙시는 내버려두고 잡아둔 방에 들어갔다. 스텔라가 침대 하나를 차지한 채 쿨쿨 잘 자고 있었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 저 녀석이 애인지 아닌지는 애매하지만 어쨌건 얌전히 자고 있어 주면 귀찮은 일은 줄어드니 좋을씨고.
“와, 귀여워!”
털뭉치를 남은 침대에 풀어놓자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헤롱거리는 녀석을 본 나르콜렙시의 첫 반응은 꽤 이색적이었다. 조금 측은해하던 레오레의 눈이 한심한 생물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뒤바뀌었다.
얕게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것처럼 잔뜩 찌푸려진 미간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며 시시덕거리는 나르콜렙시의 행동에 녀석의 뾰족한 귀가 움찔거렸다.
“으….”
오, 눈 떴다. 주변을 둘러싼 시선들에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위로 솟아오른 꼬리가 풍성한 체모를 확 부풀렸다. 당황과 경계심을 반씩 드러내는 녀석은 퇴로를 쫓는지 눈을 바쁘게 움직였다. 녀석이 도망칠 만한 퇴로라면… 입구와 창문, 두 곳뿐이지만.
“깨어났냐. 그럼 아까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어볼까. 넌 누구고, 왜 내 뒤를 밟았지? 말하지 않겠다면 일단 아까 말한 대로 꼬리를 떼서… 뭐 쓴다. 나르콜렙시, 너 줄까?”
“정말?”
“말하겠다, 말하겠다고! 내 꼬리를 건드릴 생각 마…!”
한 번만 더 놀렸다간 울겠군.
울상을 한껏 짓는 털뭉치에게서 전향적인 태도를 끌어낸 데 흡족해하면서 악당 같은 웃음을 머금었다. 수화(?化)한 윈드 엘프에게서 뭔가를 협박할 때는 꼬리를 들먹여라. 잘 먹힌다. 메모 한 줄 추가.
“큭… 위대한 폭풍의 사냥꾼 루드라의 이름에 걸고 기필코 네놈을….”
“나르콜렙시. 가위 갖고 와.”
“말한다니까, 이 악마 같은 자식아!”
닭똥같은 눈물이 잔뜩 그렁거리는 눈에서 물기가 흘러넘칠 듯 찰랑였다. 레오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분명 ‘귀축’이라고 말하고 싶은 눈치다. 뭘, 이 정도는 별것도 아니지. 더한 짓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한 번만 더 내 입에서 말하라는 말을 하게 만들면 그땐 꼬리에 더해 귀까지 뽑아버릴 줄 알아. 자, 시작해라.”
“윽….”
결국 털뭉치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꼬리와 귀가 축 늘어진 게 참 알기 쉬운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으르릉. 우리 동족들이 납치되서 노예로 팔리고 있다. 난 그것을 조사하러 숲에서 나왔다.”
“그래서?”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고.
그게 왜 나를 쫓아오는 것과 연결되는 거지? 눈을 부라리자 기세가 팍 죽은 털뭉치가 마치 궁지에 몰린 강아지마냥 목울음을 냈다.
“너… 인간. 이 땅의 지배자와 사이가 좋아 보였다. 그래서 네 뒤를 쫓으면 지배자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흐음, 하고 레오레를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이런 일이라면 귀족 쪽이 뭔가 알지 않나? 시선을 받은 레오레가 곤혹스러운 기색을 띠었다.
“…엘프를 납치해서 노예로 사고파는 행위는 선왕 폐하께서 엄중하게 금하셨었습니다.”
었습니다, 라. 말에서 벌써 냄새가 나는구만. 말없이 채근하니 조금 고개를 돌리며 자신이 섬기던 왕의 치부를 말해야 하는 갈등에 입술이 달싹거렸다.
“그랬던 것을… 새로 여왕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래 엘프 노예의 거래를 허용하신 것으로 압니다. 왕제 전하께서 재정 확보를 위해 적극적으로 추진하셨다고… 알고 있어요.”
하이고. 또냐.
이 나라에 딱히 애착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이쯤되면 이 나라에 원한이라도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 잠깐, 왕제 전하라고?
“왕제가 있었던가?”
“있었어.”
휴, 하고 나르콜렙시가 팔짱을 낀 채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고보니 이 녀석도 한동안 여왕의 시녀로서 일하고 있었다던가.
“왕제 발레리아. 상당한 수준의 수완가이며 마법사야. 내가 왕궁을 나오기 전까지는 섭정을 하네마네 하고 있었으니 지금쯤 섭정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네. 여왕의 여동생이다보니, 여왕도 많이 의견을 묻는 것 같았어. 이 나라의 실세는 지금 누가 뭐래도 그 여자지.”
왕제 발레리아라.
악연이 될 것만 같은 예감이 슬슬 풍겨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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