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 1 / 천릿길도 식후경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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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남쪽의 교역도시 윈돌에 도착했을 때는, 아질과 사라 부부의 집에서 출발한 지 나흘째의 아침이 지나고 있을 무렵이었다.
“지친다, 지쳐어… 검성 군, 나 좀 눕고 싶어.”
“…스텔라. 괜찮습니까?”
“응.”
오늘은 그래도 가능한 좋은 여관에 머무르고 싶다.
다들 나흘 동안 걷느라 지친 관계로 모두의 생각이 맞아서, 윈돌에서 가장 비싼 여관인 ‘호두나무와 벌꿀술’에 들어갔다. 오랜만이구만, 여기도.
특히 접수대에 앉아 장부를 뒤적거리고 있는 저 아저씨도.
여관 주인이 머리를 들었다. 한쪽 뺨을 발톱 자국에 찢긴 험상궂은 얼굴을 한쪽 입가를 씰룩여 웃으며 아는 체를 했다.
“어허, 이게 누구야. 트란 드라쿨루에서 가장 유명한 반역자 나리가 이렇게 백주에 여자들까지 주렁주렁 달고 다녀도 되는 건가?”
“거 소식 한번 빠르네. 뭣하고 계슈? 당장 고변이라도 하러 가야지.”
“일단 받을 돈은 받고 가도록 하자고.”
키득이면서 너스레를 주고받곤 여관 주인 갈렉스가 내 뒤에 선 일행을 힐끔거렸다.
창을 쥔 여자와 도적 같은 여자. 그리고 그보다 조금 어려보이는 아가씨. 산전수전 다 겪은 갈렉스에게도 꽤 이상하게 보일 조합이긴 할 것이다.
“남자 하나에 여자 셋… 이군. 그럼 1인실 하나에 3명이 잘 만한 방 하나면 되겠나?”
“어.”
“아뇨!”
단호히 반대 의사를 표명한 것은 나르콜렙시였다. 팔을 팟 들고 그 팔을 붕붕 돌리며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검성 군…! 난 저 여자랑 같은 방 쓰기 싫어! 나랑 같이 자. 응?”
“마음이 맞는군요. 저도 당신과는 같은 방을 쓰고 싶지 않습니다. 주…”
주인님, 이라고 부르려다가 내가 눈을 한번 부라리자 윽… 하고 레오레가 물러섰다. 그런 취미의 인간으로 보이는 건 딱 질색이다. 그리고 나르콜렙시에게도 한 마디 했다. 물론 이마에 딱밤을 튕기는 것도 빠뜨리지 않고.
“마을에서는 그렇게 부르지 말랬잖아! 이 빡대가리 년아.”
꺄웃, 하고 뒤로 젖혀지면서 빨갛게 된 이마를 만지작거리며 나르콜렙시가 눈을 흘겼지만 내 알 바 아니지. 그 모습을 눈을 가늘게 뜨고 지켜보던 갈렉스가 장부를 꺼내고 목탄을 만지작거리며 뭐하냐는 눈을 했다.
“결국… 방을 어떻게 달라는 게야?”
“어떻게 달라니, 그야 처음 말한 대로…”
…달라고 하기엔 등 뒤의 민심이 귀찮도록 흉흉하다.
한숨을 푹 내쉬고 방을 잡기 전에 여관에 딸린 식당의 테이블에 모여앉았다.
“말해두지만 난 내 휴식을 방해받을 생각 같은 건 추호도 없다. 그러니까 남자인 나는 1인실. 너희 셋은 4명이 들어갈 수 있는 방을 잡고 알아서 해.”
양보 없음. 타협의 여지 또한 없음.
이건 그냥 통보이지만, 그게 뭐 어쨌다고.
“싫어!”
뭐, 당연히 반발은 있었다. 가장 먼저 나르콜렙시가 정면으로 극렬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난 저 여자랑 같은 방에서 자고 싶지 않다니까! 잠들었다간 내 목을 노릴 게 틀림없다구!”
“…저는 그런 비겁한 짓 따윈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레오레도 물러설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이 녀석들 버리고 가도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슬슬 드는 참이긴 한데.
“마물과 같은 방을 쓰고 싶지 않은 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몽마니까요. 악몽을 꿀 게 틀림없죠.”
“흥, 내가 인큐버스도 아니고 재미라곤 좁쌀만큼도 없는 숫처녀 꿈에 기웃거려서 뭘 한담.”
스텔라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산을 헤매는 동안에도 이렇다 하게 먹을 것을 탐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갈렉스가 서비스 겸 내준 쿠키를 갉작이고 있었다.
…둘을 같은 방에 붙여두면 확실히 서로 밤새 대치하고 싸우느라 괜히 기운만 뺄 게 분명하지. 한숨을 짓고는 흉검을 칼집째로 뽑아 테이블을 탕탕, 두들겼다.
“그럼 나와 이 여자가 한방을 쓴다. 너희 둘이 같은 방을 써. 그럼 불만 없겠지.”
레오레를 가리키며 힘주어 결론을 내리자, 스텔라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그저 눈을 반짝이며 벌꿀과 밀가루를 함께 굳힌 쿠키를 오독거렸다. 나르콜렙시는 여전히 불만이 남은 표정이었지만…
“…하는 수 없네. 뭐 좋아. 적어도 저 여자랑 같은 방을 쓰지 않는 것만 해도 난 일단 감지덕지할래.”
“그건 이쪽이 할 말입니다, 마물.”
“그 이상 식탁에서 으르릉대면 너희 둘 다 그냥 윈돌에 버리고 간다.”
다시 한번 테이블을 탕탕 두들기자 나르콜렙시와 레오레, 둘 다 입을 다물었다. 그 타이밍에 맞춰 여급이 요리를 날라왔다. 염소젖 치즈와 늙은 닭을 넣고 푹 끓인 스튜와 포들포들한 빵을 본 스텔라가 눈을 반짝였다.
“잘 먹겠습니다.”
엄포도 있고 해서 일단 입은 다물었지만 둘은 여전히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슬슬 이 녀석들 버리고 갈까 생각하고 있던 차에 여관 주인 갈렉스가 식탁으로 다가왔다.
“이봐, 하이엔.”
“왜? 돈 없을까 봐?”
“멍청아, 그래서겠냐.”
심드랑하게 대꾸하면서 올려다본 갈렉스의 얼굴은 조금 심각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세 줄 흉터가 미친 턱으로 식당 입구 쪽을 가리켰다… 갑옷 입은 병사 셋이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젊은 병사 둘, 콧수염 난 장교가 한 명.
“…아, 젠장. 귀찮아.”
닭고기를 한 입 크게 베어물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심상찮은 낌새를 눈치챘는지 레오레와 나르콜렙시가 각자 무기 쥐려는 것을 손짓으로 제지하고는 머리를 긁적였다.
“뭐 금방 돌아올 테니 방은 2인실 2개로 준비해두쇼.”
“…방 하나는 침대 큰 걸로 하나면 되나?”
“둘. 다. 침대. 두. 개인. 방으로.”
말을 꾹꾹 누르면서 강조하고는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기다리고 있는 병사들에게 다가갔다.
“나한테 볼일 있나?”
“영주님께서 보자고 하시오. 동행해 주시겠소?”
“흠, 슬슬 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 뭐, 묶어서 데려가려고?”
“…부득이하다면. 마차가 기다리고 있소.”
장교는 뒤돌아섰고, 젊은 병사 둘이 슬쩍 창날을 보인 채로 내게 눈짓을 했다.
…딱히 문제 일으키고 싶은 게 아니라서 순순히 따라가려니 식탁에 앉은 두 명이 조금 못마땅한 시선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개중 한 명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스튜를 먹어대고 있고.
여관 문을 나서자, 두 필의 갈색 말이 끄는 마차가 눈에 들어왔다. 지키고 선 병사들의 기세가 제법 삼엄한 게 꽤 나를 경계하고 있다는 게 눈에 보일 정도다.
“마차에 타기 전에 먼저 검을 맡기고 타시오.”
“내가 마차를 부수고 도망치기라도 할까봐?”
장교가 빠르게 귀에 속삭였다.
“…영주님께서 안에 타고 계시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하는 수 없지.
칫 하고 혀를 한번 차고는 뒤를 따라오는 두 명의 병사에게 흉검을 풀어 맡겼다… 받아든 병사 둘이서 내 검을 나눠 들었음에도 잠시 휘청거리는 게 꽤 부실한 녀석들임이 틀림없다.
마차에는 과연, 머리에 희끗희끗한 색이 번지기 시작한 중년의 낯익은 사내가 타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더츠백.”
“오랜만이긴 하는데 딱히 반갑진 않구만. 잘 지내셨수?”
“자네만큼이나.”
온몸에 빈틈없이 갑옷을 갖추고 손에는 칼집에 씌운 검을 지팡이처럼 짚은 채 의자에 앉아있는 사내의 나이는, 전사로서의 전성기는 이미 진즉에 지나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중년 정도의 외견이지만 실제로는 봉직한 지 거의 50년에 가까운 노기사이자 대대로 물려내려온 윈돌의 현 영주인 사내에게는 자신의 눈으로도 앉은 자세 그대로도 전혀 빈틈이 없었다.
덜컹덜컹, 마차가 움직였다.
말머리가 향한 곳은 저 멀리 떨어진 영주성일 것이다.
“왕도에서 사자가 왔었네.”
“날 잡으라고?”
“장황한 내용이 많이 섞여 있었네만 아주 간단히 줄이자면 그렇지.”
영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내 표정 하나하나, 눈빛부터 미간, 입꼬리, 숨과 머리카락, 얼굴 표정이 변하는 징후 하나하나에서 내 본심을 간파하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였다.
“왕도에서 보낸 명령서에는 자네에게 선왕 폐하 시해, 귀족 살해, 거기에 여왕 폐하를 욕보였다는 죄목이 걸려 있더군. 사실인가?”
“뒤의 하나만은 맞수.”
등받이에 등을 기대면서 다리를 꼬고 한껏 이죽거렸다. 뭐 뒤의 하나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분풀이로 여왕을 납치해다가 따먹고 돌림빵시켰으니 트란 드라쿨루에서 발붙이고 사는 건 일찌감치 단념하고 있었다.
“…앞의 둘은 사실이 아니라는 게로군.”
“뭐여. 내 말을 믿는 게요?”
“난 자네를 알아. 자네는 빌어먹을 놈팽이에 불한당인데다가 더러운 성질머리의 개차반이지만 주인을 무는 짓만은 절대 하지 않는 개자식이지.”
거 말이 좀 심하네.
지독한 평가에 한쪽 눈을 찌푸렸다. 농담도 뭣도 아니라는 듯 여전히 주름투성이 얼굴에 진지함을 한가득 품은 채 영주는 달리는 마차의 곁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바깥 풍경에 시선을 던졌다.
“그동안 있었던 일을 말해주게.”
“들어서 뭐하시려고. 내 입에서 그 얘길 들으면 댁도 공범으로 몰릴지 모른다는 거 모르진 않으실 테고?”
“짐작하고 있고, 또한 각오하고 있음이야.”
씁, 하고 어쩐지 쓴맛이 입에 스치는 것 같았다.
어디부터 얘기해야 하지? 어느 날 내가 귀족 나리들을 죽였다는 누명을 썼을 때부터? 감옥에 갇혔을 때부터? 아니면 목이 한번 잘리고 난 뒤부터? 어디부터 얘기해야 덜 귀찮게 용무를 마치고 윈돌을 빠져나갈 수 있으려나.
“뭐, 듣고 후회하지만 않겠다면야.”
가능한 내가 알고 있는 정황의 가장 처음으로 되돌아가서, 거기부터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도 분명 어느만치의 조사는 진행했을 터,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내 증언과 여왕의 명령을 짜 맞춰서 진실이 무엇인지를 가늠해보려 하는 것일 터. 확실한 것은… 마차가 영주성에 도착하기까지의 짧은 시간으로 풀어낼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