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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하운드-15화 (15/79)

〈 15화 〉 2 /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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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날이 밝았다.

지난밤은 꽤 길었고, 이래저래 성가신 일들이 있었지.

팔자에도 없는 꼬맹이를 데리고 다니게 되기도 하고, 한바탕 오랜만에 몸풀이로 날뛰게 되는 일이 생기기도 하고, 그 뒤처리로 팔자에도 없는 노예를 들이게 되기도 하고.

레오레 유스티카. 그 여자는 여왕을 섬기는 기사였지만 이제 나와 마찬가지로 전(?)자가 앞에 붙는 처지가 되었다. 동정할 필요는 없다. 놓아주려고 한 것을 거절하고 도망자가 되는 것을 택한 건 저 여자니까.

말과 함께 창과 갑옷을 돌려보내라는 내 말에도 순순히 여자는 따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재미없다. 지난밤에도 마음만 먹었으면 여자를 범할 수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재미없는 일이다.

“크리스.”

여자가 코를 말의 콧등에 비비면서 조금 눈물지었다. 숫말도 여자의 뺨에 코를 부비며 푸르륵 서글프게 울었다.

마구에는 단단히 여자의 갑옷과 창이 매달려있었으니 무사히 이 말이 유스티카 가에까지 도착하면 여자가 병사들을 도주시키기 위해 남아 분투하다가 죽었다고 판단해주지 않을까, 하고 기대했다. 괜히 여자한테까지 추격이 붙으면 귀찮아지니까.

“언제고 돌아갈게. 그때까지 잘 지내야 해. 크리스.”

천천히 손을 놓자 말은 여자를 조금 응시하다가, 이윽고 등을 돌려 멀어져갔다. 말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등을 지켜보던 여자는 눈가를 소매로 문질러 닦고는 남은 감정을 한숨지어 흘려보냈다.

“신파 찍고 있네.”

그 모습을 창문 너머로 피식 웃으며 보고는 나도 일단 아질과 사라가 내어준 장비를 몸에 걸쳤다. 뭐 토벌 당시에 입었던 장비는 너무 눈에 띄기도 하고.

일단 지금까지 입고 있던 거지꼴과는 작별이다. 움직이기 편한 가죽 갑옷과 각반, 장갑을 끼고 나면 이제야 조금은 사람 꼴이 되었다. 등에는 가름을 멜 수 있도록 매듭지어진 가죽끈까지 받았다. 사라스바티가 주문을 걸어줘서 웬만해서는 망가지지 않을 거란다.

“너희는 이제 어떻게 할 거냐?”

아질은 잠시 침묵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팔을 뻗어 만삭 아내의 어깨를 감쌌다.

“아내와 둘이 이야기를 해봤습니다만… 곧 겨울인데 지금 움직이는 것은 여러 가지로 아기에게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희는 아기가 자랄 때까지는 이 숲에 머무르려고 합니다.”

“…그러냐.”

아기가 자라려면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태어난 아기가 인간의 성장 속도를 따를지, 오우거의 성장 속도를 따를지, 엘프의 성장 속도를 따를지 알 수가 없으니까.

걱정은 되지만 이들이 그렇게 결정했다면 자신으로서는 딱히 이렇다 하게 해줄 말은 없다. 그냥 행운이나 빌어줄밖에.

남의 사정을 봐줄 여유도 없고.

“검성 군~ 여기 좀 봐봐. 어때?”

…뭐가.

나르콜렙시가 친근한 척 따라붙으며 제 앞에서 빙글, 하고 한 바퀴 돌아보는 것이 참… 같잖아서 식은 눈으로 내려보았다. 몽마의 특징을 감추고 평범한 인간처럼 행동해도 몽마 특유의 요망한 태도는 참을 수 없는 건가.

몸놀림이 편해보이는 가벼운 무장. 양쪽 허리춤에는 단검을, 허리 뒤쪽에는 스로잉나이프를 찼다. 등에는 활도 멘 걸 보면 도적 놀이라도 할 생각인 모양이지. …뭐 때문에?

“야. 너 설마하니….”

“딱히 검성 군을 따라다니는 게 아니거든.”

에잇, 하고 졸음이 덜 깬 얼굴을 한 녀석을 붙잡아 제 앞으로 끌어오면서 나르콜렙시가 배시시 웃는다.

“우리 귀여운 마왕 후보님을 따라다니려고 할 뿐이야.”

“좋아. 베어버리자.”

등에 멘 흉검의 자루를 잡았다. 일단 확 베어버리면 더 못 까불겠지.

얼떨결에 나르콜렙시의 앞에 선… 아직 이름도 모르는 마왕 후보인지 하는 녀석이 똘망똘망한 눈으로 날 올려다보고 있다. 애도 아니면서 그런 얼굴 하지 마.

“나르카가 뭔가 나쁜 짓 했어?”

“어, 존재 자체가 나쁘다. 썩 비켜.”

딱히 녀석에게 정이 들거나 애라서 못 벤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 녀석이 죽으면 나도 좀비나 구울이 된다고 하잖냐고. …거기다가 아질과 사라가 진짜 벨 거냐는 듯이 보고 있는 것도 켕기고.

“젠장할.”

결국, 칼을 뽑지도 못하고 된소리를 뱉으며 도로 등에 멘 칼집에 집어넣으니 헤실헤실 웃는 나르콜렙시. 하지만 이마에 딱밤을 날리는 정도는 할 수 있지.

“으갹! 검성 군, 지인짜 나빠!”

빨갛게 자국이 남도록 얻어맞은 이마를 문질러대며 울상을 짓는 나르콜렙시를 보니 꽤 고소하다. 그럼 대충 준비가 끝난 셈인가.

“그나저나. 이 녀석은 뭐라고 부르면 되냐. 아직 이름도 몰라.”

“이름… 네가 지어 줘.”

…뭔 개소리야.

녀석이 기대감이 잔뜩 담긴 눈으로 올려다보자, 어쩐지 무지막지하게 부담되었다. 작명 같은 거 취미 없다고. 한 번 더 강조하듯이 커다란 호박색 눈을 깜빡이면서 무언으로 채근해왔다.

나르콜렙시를 보니 입을 딱 다문 채 어떤 기상천외한 이름을 지어줄지 기대하는 분위기다. 젠장. 어쩐지 내가 이름을 뭐라든 지어주기 전까지는 물러서지 않을 기세다. 이런 거 취향이 아니라고.

문득 아질이 했던 쓸데없는 얘기가 생각났다. 별로 그 말을 의식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떠오르는 이름도 별로 없으니 하는 수 없나. 짜증나네.

“그럼 ‘스텔라(Stella)’다. 널 앞으로 그렇게 부를 건데 불만 있으면 지금 말해.”

“응. 좋아. 그 이름이 좋아.”

‘별’이라는 뜻의 이름. 그 녀석과 같은 뜻을 가진 이름을 붙인 게 잘한 선택인지 모르겠다.

스텔라, 스텔라… 마음에 든다는 듯 연신 끄덕거리는 꼬맹이를 보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럼 이제 정말로 출발하기에 앞서 꾸릴 자질구레한 일은 전부 다 마친 것 같다.

“…주인, 님.”

때맞춰 노예, 레오레도 들어왔다. 그녀도 지금 아질이 예비로 남겨두었던 가벼운 장비와 장창 한 자루로 무장하고 있었다. 손에 무기를 들려줘봤자 어차피 그 목에 족쇄가 달려있는 한 내게 반항할 수는 없다… 해 봤자, 힘으로 짓눌러버리면 그만이기도 하고.

“노예. 네가 명할 내용은 별달리 없어. 너는 그냥 이 녀석의 호위다. 그러라고 준 장비니까 네가 어떻게 되든 이 녀석은 상처 하나 없게 지켜. 알겠냐?”

“…알겠습니다.”

조금 입술을 깨물었지만 레오레는 결국 소극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명망 높은 기사인 그녀가 마족의 호위를 담당해야 하니 복잡한 심경일 것이다. 비록 순진해보이는 아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도 말이지.

나는 지키면서 하는 싸움에는 관심 없고 그럴 재주도 없다. 내 대신 내 목숨줄을 쥔 녀석의 호위를 해줄 녀석이 있으면 나로선 안심이지.

“이건 가시면서 드시라고 먹을 걸 좀 쌌어요.”

“…사라, 네가 만든 건 아니지?”

후후후, 하고 웃음짓는 사라. 아질이 한숨을 지었다.

사라스바티는 마법 물약을 만드는 감각으로 요리를 만들기 때문에 맛보다는 효능과 영양을 우선해서 생각하곤 했다… 그리고 그건 아주 가끔 기상천외한 맛이 되곤 했고.

괜히 이제껏 오우거 요리만 줄창 먹었던 게 아니라고.

“…제가 구운 빵입니다. 안심하고 드시죠.”

“안심하라는 게 무슨 뜻이에요, 여보?”

“…….”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남편이여라.

아내의 압박 속에서도 꿋꿋이 침묵을 지키는 아질이 그렇게 불쌍해 보일 수가 없었다.

나르콜렙시에게 보따리를 넘기고, 이제 정말로 출발할 채비를 마쳤다.

이래저래, 나름대로 인원이 불어난 일행이 되었다… 공격력에 치중한 구성이긴 했지만 뭘 잡으러 가는 것도 아니니 상관없겠지.

“어디로 가실 생각입니까?”

“윈돌에. 이걸 좀 고쳐야 해서.”

허리에 찬, 녀석의 검을 탁탁 두드려 보이자 아질은 고개를 끄덕였다. 목적지로서는 적당할 것이다. 거기 영주와는 나름의 안면이 있고, 받아야 할 빚과 갚아야 할 빚이 있는 상대이니 문전박대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뭣보다 검을 고칠 수 있는 대장장이가 있었다. 한 번쯤은 들러야 할 곳이고, 가능한 한 빨리 들르는 것이 좋겠지.

아질이 우락부락한 입가에 웃음을 띠면서 손을 내밀었다. 나도 손 크기로는 어디에서도 지지 않는데, 그런 내 손을 완전히 덮어버릴 정도로 녀석은 손이 거대했다. 그 손을 맞잡으면 검을 쥐느라 생긴 굳은살과 활대를 쥐느라 생긴 굳은살이 까끌까끌하게 맞닿았다.

“어디로 가시든 조심하십시오, 하이엔.”

“너야말로 조심하라고. 혼자 몸도 아니잖아. 가족을 지켜.”

“딸린 입은 당신이 더 많지만 말이지요.”

피식 웃고는 손을 놓았다.

사라 쪽을 바라보자, 눈이 마주친 사라는 눈이 그렁그렁하게 젖어있었다.

팔을 벌려 사라스바티를 살짝 안아주었다… 남의 마누라한테 이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 사라스바티도 마주 끌어안은 걸 보면 상관없는 거겠지. 아니. 생각할 것도 없이 이들과 나는 남이 아니다. 아질과 사라, 그리고 지금은 죽은 그 녀석. 우리는 아마 그렇게…

“…이엔 씨. 나중에 꼭 우리 애 보러 와야 해요.”

“조카 녀석 장난감 들고 올 테니까 잘 키우라고.”

안은 팔을 풀었고, 사라가 배시시 웃어보이면서 기대할게요, 하고 한 마디 남기면서 떨어져나왔다. 자, 해가 슬슬 적당하게 떠올랐다. 슬슬 출발할 시간이라고.

“잘들 있어라.”

“…죄송했습니다.”

“건강해!”

각자 각양각색의 한 마디씩 작별의 말을 남기고, 부부의 집에서 발걸음을 돌렸다.

반역자, 몽마, 마왕의 후계자, 노예.

구성이 심히 괴상한 파티가 출범하여, 목적지는 남쪽의 교역도시 윈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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