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 2 /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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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그렇게 커다란 냄비가 놓인 식탁에 마주앉았지만, 분위기는 화기애애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특히 나르콜렙시 말고도 식탁에 추가된 한 명이 머쓱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더 그렇다. 그런데 어쩐지 한 명이 부족한 기분이 드는데.
“어이 아질. 꼬맹이는?”
“아직 자고 있습니다. 이 난리 중에 한 번 깨지도 않고 태평하게 잘 자더군요. 깨울까요?”
“됐어. 대체 어떻게 되먹은 녀석인지.”
태평한 건지 둔감한 건지. 뭐 마족이니 그런가보다, 하고 넘길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면 그 꼬맹이에 대해 아는 게 없다. 따악히, 알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지만.
“그 녀석에 대해서는 됐어. 신경쓸 것 없어. 그런데….”
눈을, 이 식탁의 말석에 앉은 여자에게 향했다.
모처럼 놔줄 생각을 했는데 왜 기어들어온 거지, 저 여자는?
“여자, 왜 도망치지 않았냐. 놔줬으면 네 장비 챙겨서 여왕한테 잽싸게 돌아갈 일이지.”
“…레오레 유스티카입니다.”
“네 이름 따위 물은 기억 없어.”
물론 안다. 유스티카… 그 성만은 알고 있다.
트란 드라쿨루의 왕가를 섬기는 명망 높은 기사 가문이다.
가훈이 분명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정의를 세우라(Fiat justitia, ruat caelum)’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어제의 일은 가훈까지 저버릴 정도로 여왕이 압력을 넣었던 건가?
“선대 유스티카 경… 그림으로 그린 듯한 올곧은 기사셨어요.”
사라스바티가 조금 안타까운 듯이 그리움을 담아 읊조렸다.
나도 알고 있다고.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르는 것밖에 모르던 시절의 나도 아마 이 여자의 아버지인 그 사람에게 신세를 졌었으니까. 마왕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얼핏 들었지만.
재밌는 일이다. 아버지라는 ‘하늘’을 잃고도 충성이라는 ‘정의’를 세운다, 이 여자의 사고방식은 뭐 그런 건가. 조금 딱한 기분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뭐어… 나로서는 조금 재밌는 걸 보게 해 준 은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네 의견을 누가 물었다고 그러냐.”
키득거리는 서큐버스, 나르콜렙시는 내 바로 옆에서 치근거리는 게 상당히 성가셨다.
당장 들러붙으려는 것을 이마를 밀어 떼어놓았다. 당연히 부루퉁해했지만 알 게 뭐야.
“그래서. 이제 슬슬 알았겠지? 너희 부부도 여왕한테는 눈엣가시야. 그 녀석이랑 같이 마왕을 토벌한 녀석은 전부 치워버리려고 하고 있다고. 얼른 여기를 떠서 다른 나라든 아니면 아무도 살지 않는 미개척지든 숨는 게 상책이야.”
아질은 벌꿀술을 한 모금 마셨고, 사라스바티는 입을 다문 채 불룩하게 부푼 배를 살짝 떨리는 손으로 쓰다듬었다.
여왕이 보낼 토벌군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아질과 사라스바티, 뭐 나까지 한동안 머무르면 여왕이 얼마나 되는 군대를 보내든 어느 정도는 대처할 수 있겠지. 아질의 화살, 사라스바티의 마법… 이 둘을 배제하려면 얼마나 많은 희생이 따라야 할지, 여왕은 전혀 모르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이 부부가 두려워해야 할 건 그게 아니다.
사라의 뱃속에 있는 아기가 무엇보다도 걱정일 것이다. 피할 수 있는 싸움은 피해야겠지.
하지만 그보다. 짚고 넘어가야 할 건 넘어가야 한다.
“…나르콜렙시. 하나 묻자.”
“응? 뭔데?”
사슴고기 스튜의 커다란 고깃덩어리를 나이프로 자르다가, 눈을 반짝이며 내게로 고개를 홱 돌린 녀석은, 내 표정이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는 얼굴이 아니란 것을 알고는 조금 진지하게 낯빛을 바꿨다.
“여왕에게 여기를 알려준 건 너냐?”
“아닙니다.”
대답한 것은 나르콜렙시가 아니라, 아질이었다.
그는 푹 익힌 넓적다리살을 잘게 잘라내어 사라의 접시에 놓으며 일단 옛 적으로서의 사감을 내려놓은 채 답했다.
“그 반대입니다. 하이엔. 여왕의 토벌대가 온다고 알려준 것이 바로 그녀입니다.”
“…그러냐.”
아질이 그녀를 위해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다. 때문에 아질의 말은 진실일 것이다.
그럼 나도 할 말은 해야겠지.
“나르콜렙시. 동료를 도와줘서 고맙다.”
“…에? 어, 으응. 그렇게… 솔직하게 말해줄 줄은 몰랐… 는데. 그, 그럼 검성 군? 이건 나한테 빚 하나 진 거라고… 생각해도 돼?”
…끄응. 이 녀석한테 빚 같은 거 지고 싶지 않은데. 한숨쉬고는 마음대로 하라고 하니 예스, 하고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나중 일이 두렵구만.
“그래서. 저 아이 어떻게 할 거야?”
당당히 이 자리에 참여할 발언권을 얻었다는 듯 구는 나르콜렙시가 손가락으로 포로를 가리켰다. 레오레인가 하는 포로 여자가 발끈했다.
“당신에게 아이라고 불릴 이유는 없습니다, 마물!”
“나한텐 제대로 나르콜렙시라는 이름이 있어, 검성 군도 그렇게 불렀잖아!”
“당신이야말로 이름이 아니라 검성이라고 부르면서 그렇게 말합니까!”
이렇게 될 수밖에.
금욕적인 교육을 받고 자란 기사와 방종한 서큐버스다. 상성이 좋을 리가 없지.
“잠깐 닥쳐봐, 나르콜렙시. 여자, 네 얘기를 하다 말았는데. 넌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냐.”
사실 이 여자가 어떻게 되든 말든 자신과는 상관이 없다.
최악의 경우에는 베어버리고 떠나는 것도 생각하고 있기도 하고. 물론 이 여자의 아버지에게 신세진 일이 있고 하니 며칠쯤 꿈자리가 사나운 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저는 폐하께 돌아갈 수 없습니다.”
단순히 나에게 패배했기 때문에, 라는 이유는 아닐 것이다.
패전의 책임으로 받게 될 징벌이 두려워서라기엔 이 여자의 심지는 지나치게 올곧았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에 섰다.
“검성. 말씀해주십시오. 당신이 정말… 여왕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선왕 폐하를 시해한 장본인입니까?”
“그렇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거지?”
윽, 하고 여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꽉 쥐여진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유스티카 가문의 명예를 걸고 당신을 제 창으로 단죄할 겁니다.”
“그럴 능력이 있다고 보나, 네가?”
솜털이 보송보송한 애송이 주제에 말야.
여자는 몹시도 자존심이 상하는 얼굴을 했지만, 상대와의 전력차를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무인의 소양이다.
“…지금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반드시 당신을 뛰어넘어서 당신의 죄를 단죄할 겁니다.”
“농담 집어쳐. 영감한테는 여러 가지 신세를 진 게 있어. 그 딸년 목은 따버리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영감한테는 아무런 원한도 없어. 내가 죽였을 리가 없잖아.”
일그러졌던 표정이 풀리고, 어쩐지 여자는 안심한 표정이었다.
서 있던 자세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하시면 저 레오레 유스티카. 제 신병을 검성께 드리겠습니다. 포로로서 대우하시든 노예로서 대우하시든… 당신이 결백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이 목숨을 드리겠습니다.”
“순진해빠졌구만. 내가 거짓말을 했을 거란 생각은 안 하냐?”
“검성께서 제게 거짓말을 하실 이유는 없습니다.”
…뭐, 그렇긴 하다.
내가 이런 여자를 속여서 뭘 하겠냐고… 라고 할 줄 알았냐.
누군가를 속일 이유 따위는, 앉은 자리에서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네 녀석은 날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는데. 네년이 그렇게 나온다고 내가 감동해서 얼씨구나 하고 받아들일 줄 알았냐?”
“…원하시는 게 뭡니까.”
물러설 기미가 없구만. 아질과 사라스바티를 바라보았다. 둘 다 내켜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결국 이러한 확인이 필요하다는 건 둘 다 동의했다. 암묵적인 동의를 내비친 뒤, 아질이 사라를 부축한 채 식당을 떴다.
“……야.”
“응?”
하지만 왜 이 녀석은 아직도 남아있지?
나르콜렙시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넌 안 가냐?”
“내가 왜?”
“…젠장. 맘대로 해.”
방금 전의 일도 있고 해서 세게만 나갈 수 없다는 건 꽤 부아가 치밀었지만 어쩔 수 없지. 긴장한 채 내 말을 기다리는 여자를 향해 눈을 찌푸렸다. 각오를 봐야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참… 켕겼다. 저 여자의 아버지한테 면목없을 짓을 지금부터 하려고 한다.
“벗어. 네 몸에 걸친 것,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벗어라.”
화악, 수치심에 여자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입술을 꾹 깨물고, 손이 바들거렸다.
그 정도라면 더 볼 것도 없군.
“못하겠냐? 그럼 네 짐 챙겨서 꺼져.”
꾹 깨문 입술이 바들거렸다. 여자는 아주 잠시 망설이다가… 손을 들어 사라스바티가 내준 옷의 옷깃부터 풀었다.
스륵, 스륵, 스륵.
천이 풀리고, 단추가 풀리고.
피부와 살결이 그 천이 스쳐서 흘러내리면서 농익은 나신이 숨김없이 드러났다.
휘유, 하고 나르콜렙시가 휘파람을 부는 게 들렸다. 분위기 파악 안 하냐, 이 몽마년아.
살짝 파들거리는 손이 고간과 젖가슴을 가린 것이 바로 아까의 연못에서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눈 아래가 붉었다.
“누가 가리라고 했지? 가린 손도 내리고 똑바로 서서 이쪽을 봐라.”
부들부들, 수치심에 떨던 손이 이윽고 숨기고 있던 치부까지 낱낱이 드러냈다.
하얀 살 가운데 순결한 연분홍색과 단단하게 단련된 다리 사이 다물린 굴곡은 분명 남자를 모르는 여자의 것이었다. 아마 가족 이외에 맨살을 드러내는 일조차 없었겠지.
여자의 얼굴은 붉었다. 귀까지 붉힌 채, 눈을 내리깔고 이쪽을 향해 똑바로 서 있었다.
어설픈 결의라는 건 참…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것이다.
“…귀찮은 여자구만.”
혹시나 해서 준비해뒀지만 이렇게 빨리 쓰게 될 줄은.
제 짐에서 금속으로 된 고리를 꺼냈다. 표면에 몇 가지 주문이 각인된 물건은 단적으로 말하자면, 족쇄다. 이 여자가 개라면 목줄이 될 것이고, 이 여자가 말이라면 고삐가 되겠지.
그것을 여자의 발치에 툭 던졌다. 그리고 차라고 말하자, 여자의 발갛게 물든 뺨 아래 찰칵, 하고 족쇄가 채워졌다. 몇 가지 사소한 효과는 있었지만, 적어도 이제 이 여자는 저것을 목에 찬 이상 내 말을 거스르지는 못하게 되었다.
“그게 뭔지는 알고 있겠지?”
“…네. 알고 있습니다.”
주인님, 이라고 여자가 덧붙인 호칭은 솔직히 말하자면 귀에 조금 걸리적거렸다. 켕겼다.
이 여자가 진심이라면, 나도 그 이상 내칠 생각은 없다. 내 옆에서 불합리와 부조리를 받아먹겠다면, 던져줄 수밖에 없지 않나.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정말 나을지는, 이제부터 그녀 하기 나름이지.
레오레 유스티카,
이 여자는 노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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