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헬하운드-13화 (13/79)

〈 13화 〉 2 /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지 (7)

* * *

(7)

정신을 잃은 여자를 어깨에 짐짝마냥 걸친 게 그야말로 도적놈 꼴이군.

피와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정신을 잃은 여자를 들쳐메고 있는 모습은 도저히 검성이라는 고상한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것 같다. 검성 딱지 떼서 버리고, 좀 더 그럴듯한 자칭을 생각해둬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일단 다시 아질의 집으로…

“우왓?!”

발 앞에 화살이 턱, 하고 꽂혔다.

누가 쐈는지는 말할 것도 없다. 맞추려고 했으면 이미 맞았을 것이고.

어이가 없었다. 아니, 그나저나 왜 쏜 거냐고?!

아질은 오우거의 자취가 진하게 남은 무뚝뚝하고 일견 무섭게도 보이는 얼굴에 더욱 더 엄한 빛을 띠었다. …사라스바티는 ‘그래도 귀요미한 얼굴이에요’ 따위의 말을 한 것 같지만 사라스바티의 시력이 참 나쁜 거지, 분명.

“씻고 들어오십시오.”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다는 듯 단호한 말에 얌전히 근처의 연못에서 일단 씻을 수밖에 없었다. 씻지 않고 들어갔다간 꼬챙이 신세가 될 게 뻔하니까.

그러고보면 탈주하느라 제대로 된 옷 꼴도 못 갖추고 있었구만.

소매가 뜯긴 죄수복과 바지 차림으로는 어딜 가든 눈에 띄기 딱 좋다. 게다가 눈에 띄기 딱 좋은 흉검까지 갖고 있으면 눈에 띄지 않는 게 더 이상하지. 일단 다른 영지로 도망가기 전에 좀 제대로 된 사람 꼴을 갖춰야겠다.

“흠. 그나저나 어쩐다.”

여자는 아직 정신을 차리거나 할 기색은 없었지만 그래도 마냥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자신이 멱을 감는 사이 도망이라도 치면, 그땐 어쩔 건데? 더 귀찮아질 것이다. 하는 수 없지.

일단 이 여자도 알몸이 되어놓고 나면 도망치거나 하지는 못하겠지. 대충 편하게 생각하곤 여자의 갑옷을 하나하나 벗기기 시작했다. 흉갑과 견갑 건틀릿, 각반과 경갑. 투구까지.

저항은 없었지만 갑옷의 무게는 상당했다. 여자의 말은 아질에게 부탁해놨으니 알아서 하겠지. 아질은 짐승을 다루는 것이 특기지만, 이 여자와 나름 깊은 유대를 맺고 있는 것 같은 말을 잘 다룰지는 솔직히 별로 확신은 안 간다. 뭐 그나저나.

“흐응. 이건 또 꽤나….”

갑옷을 벗기고 나니 그 딱딱한 갑주 안쪽이 이럴 줄은.

풍만하게 부풀어 오른 젖가슴의 살집이 말랑하게 농익었다. 그 아래로 잘록하지만 단단하게 단련된 근육이 붙은 허리는 날렵해보였고.

어깨는 조금 딱딱했고 손발은 제법 길고 섬세했지만, 그 나름 단련한 흔적이 엿보였다. 허벅지가 탄탄한 게 딱 말을 오래 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단단히 다물린 다리 사이에는, 굳이 시선을 주지 않았다.

벗겨놓으면 그냥 여자일 뿐이지. 벗겨놓으면 내가 그냥 남자인 것처럼.

알몸뚱이인 여자를 물가에 눕혀놓고 갑옷은 일단 여자에게서 떼어놓아 물가에 두었다. 어차피 이 갑옷과 그 안의 옷도 어떻게든 빨아야 할 게 아닌가. …물론 여자가 도망치지 못하게 한다는 목적이 더 강했지만.

“휴우. 차가워.”

감옥에 꽤 오래 갇혀있었다보니 그 안에서 얼마나 계절이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연못 물은 제법 차가웠고 찬물이 닿는 곳곳마다 으슬으슬한 한기가 스며들었다. 감각이 이렇게 생생한 언데드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냉기가 실감나서 오히려 딱 좋다.

머리를 물에 박았다가, 확 꺼내며 뒤로 젖힌다.

찰랑찰랑, 할 정도로 머리를 길게 기르거나 하지 않았다. 머리가 길면 거추장스럽다고. 다만 여기저기 파문이 이는 연못에 비치는 제 머리카락 색이 옛날과 조금 다른 건 이상한 기분이긴 하다.

그렇게 얼마간 몸을 씻고 있으려니…

“꺄아아아아악!”

오, 딱 예상했던 그대로의 비명이다.

여자가 깨어났는지 성대하게 연못가에 비명이 울려퍼졌다.

얼마나 커다란 비명이었는지 나무에 앉아 자고 있었던 새들이 황급히 후다닥 날아오를 정도였다. 이런. 오늘 하루 종일 이 숲의 동물들에게 귀찮은 짓을 하는구만.

돌아보자, 여자의 당황한 표정이 꽤 볼만했다.

한쪽 팔을 들어 풍만한 젖무덤을 가리고, 다른 손으로는 겨우겨우 주저앉은 다리 사이를 가린 채 밤의 어둠 속에서도 훤히 볼 수 있을만큼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수치와 분기가 당황한 얼굴에 어지럽게 뒤섞였다.

“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내가 잠든 틈에 나를 겁탈…!”

“안 했어, 안 했어. 하겠냐, 그런 거.”

장담하건대 하려고 했으면 넌 아직도 정신 못 차렸을 거라고.

손을 휘휘 내치며 부정했지만, 당연히도 믿을 생각은 없어보였다. 이해한다. 나라도 안 믿었을 테니까.

“검성이라고 불리는 남자가… 여자가 잠든 틈을 타 겁간을 하다니, 수치도 모르는가, 이 짐승…!”

“했는지 안 했는지는 대충 알 거 아냐?!”

“그럼 내 옷은 왜 벗겼단 말이냐, 이 외도!”

“더러워서.”

어차피 뻔뻔한 놈이라고 미운털이 박힌 것 같으니 이쪽도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그래도 강간범 취급은 불합리하니 그보다는 조금 덜 뻔뻔한 놈으로 가도록 할까.

“여자, 너한테서 땀냄새와 말가죽냄새가 진동한단 말이다. 그런 포로를 데리고 다녀봤자 눈총을 받을 게 뻔하지. 그래서 씻으라고 벗겼다. 불만 있냐?”

“뭐, 뭐, 뭐, 뭐…”

황당해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표정.

알 것 같다. 나라도 그런 말을 들으면 당연히 그런 표정을 짓겠지… 뭐, 사실 경험과 근거가 아주 없는 얘기도 아니거니와.

“네 녀석은 내게 형편없이 졌어. 그러니까 넌 내 포로고, 포로를 잡은 주인의 정당한 권리로서 명령하겠다. 씻어!”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표정이 되었지만, 윽, 하고 분한 듯이 입술을 깨물곤 여자가 손으로 가슴과 가랑이만을 가린 채 주저주저 연못에 몸을 담갔다. 발끝을 대보고 차가움에 흠칫하면서 이쪽을 바라보자, 한숨쉬고는 뒤돌아섰다.

참방, 하는 물소리가 튀겼다.

“…이쪽, 돌아보지 마라.”

“장담은 못하겠는데? 말뽄새가 그따구라서.”

“…윽.”

패장 체면이면서 자존심을 고집스럽게 챙기려 드는 게 기사들의 특징이지. 흥, 하고 코웃음치곤 나는 그냥 몸에 붙은 피와 먼지, 흙과 모래, 풀뿌리등을 대충대충 씻어냈다. 등 뒤에서 소극적으로 참방참방거리며 몸을 씻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쩐지 나라도 이 분위기가 간질간질거려서 영 찝찝하단 말이지.

뭐 아무튼 몸은 씻었다. 뒤는 알아서 하라지. 처음에는 도망치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는데 이제 와서 도망치든 말든.

“여자, 네 장비는 저쪽 반대편 물가에 뒀다. 도망치든 말든 네 맘대로 해라.”

몸을 씻고 난 뒤 아직 씻는 중인 여자에게 대충 그렇게 말해둔 다음 바지만 걸치고 물가를 떠났다. 이 정도로 단념해줬으면 좋겠다. 다행히 문고리를 잡을 때까지 화살이 날아오지는 않았다.

“얏호. 검성 군!”

…문고리를 열자마자 왜 보이는 얼굴이 이 녀석이요?

분명 아까 꼬리를 말고 도망갔을 서큐버스, 나르콜렙시가 방글방글 웃으면서 올려다보고 있다. 아까와는 다른 점이 있다면 뿔이나 날개, 꼬리 같은 몽마로서의 특징을 싹 지운, 누가 봐도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좋아. 돌아오면 죽인다고 말했었지. 돌아왔으니 죽일…

“…씁.”

아질과 눈이 마주쳤다. 사라스바티도 별로 탐탁찮은 표정이었지만 일단 당장 나르콜렙시와 서로 죽이네사네 벌일 생각은 아닌 모양이었다. 여기는 그녀의 꿈도 아니고, 사라는 예정일이 임박한 임산부였으니까.

“돌아간 줄 알았는데.”

“돌아가려고 했는데 말야. 검성 군의 멋~진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는 찬스를 놓칠 수 있어야지!”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그럴 줄이야.

어딘가의 훈련교관이 그랬던가. 애초에 기대를 하니 배신당하는 거라고. 나중에 마구 두들겨줄테다, 이 몽마년.

"저어엉말. 멋진 광경이었어. 취해버려서, 그것만으로 가버릴 정도로 멋졌다구. 검성 구운. 그 커다란 검을 붕붕 휘둘러대면서 토막내고, 찢어발기고 날려버리고. 마구 날뛰는 걸 보기만 해도 정말… 후으, 아응."

그냥 두면 한바탕 일을 내도 뭔가 낼 기세다.

이 녀석 말고, 흉흉한 기세를 내뿜고 있는 하프 오우거와 하프 엘프 부부가.

꼬챙이에 마법 세례를 맞는 건 사양이다. 서둘러 녀석의 입을 막았다.

“다 봤으면 얼른 꺼져!”

푸데데데, 입을 손에서 떼고 퉤퉤 뱉으면서 볼멘소리를 하는 나르콜렙시.

“아~ 아. 검성 군. 만삭의 임부 앞에서 무슨 말을 그렇게 한담. 예쁜말. 예쁜말.”

“어이 아질. 이 녀석 당장 죽여도 되냐.”

아질은 한숨을 푹 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시려거든 가능한 아내가 볼 수 없는 곳에서 해 주십시오.”

“아질 군도 꽤~나 댄디해졌지만. 난 역시 검성 군이 좋더라.”

꺄아, 하고 팔을 벌려 달려들려는 것을 휙 피하자, 너무나 예상한 대로 나르콜렙시는 허공을 샥 안으려는 동작을 했다가 홱 몸을 돌리며 째려봤다. 그런 눈으로 보면 어쩔 건데.

“…일단 식사부터 할까요?”

어흠, 하고 이 상황을 정리하겠다는 듯 현재 이 집의 먹이사슬의 최고 계급에 위치한 사라스바티가 헛기침을 했다. 아질이 잡아온 사슴을 푹 익혀 만든 고기 스튜의 냄새는, 그러고보면 격하게 몸을 움직이느라 배가 고프긴 하는데.

“하지만 그 전에. 이엔 씨는 옷을 좀 입으셨으면 좋겠어요.”

동감입니다.

검성이 아니라 거지꼴이라서 미안합니다만, 남는 옷 좀 있으면 빌려주라.

반쪽 오우거 물건이라고 헐렁하게 크거나 하지는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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