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 2 /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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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녀석의 의기양양한 설명을 듣고 보니 얼추 왜 녀석이 여기에 나타났는지는 이해를 했다. 하긴 했는데. 정작 중요한 내용을 홀랑 빠뜨리면 어쩌자는 거냐.
“좋아. 네 말이 다 맞다 치자.”
“맞다 치는 게 아니라 사실이거든?!”
“마족들의 정치놀음이야 어찌되든 상관없으니까. 아무튼. 중요한 게 빠졌잖아.”
그래. 내게 가장 중요한 건 누가 다음 마왕이 되는가 따위가 아니다.
그 전에 나르콜렙시가 나에게 했던 말이 내게는 그보다 훨씬 더 중요했다. 중요도로 치자면 검성권 10배 정도로 중요하지.
“네가 저 녀석을 데려가면 내가 죽는다는게 무슨 소리인지가 빠졌잖아, 멍청한 몽마 년아.”
“아.”
아? 바로 녀석의 이마에 손가락을 튕겨 딱밤을 갈겨주니 웃! 하고 머리가 뒤로 젖혀졌다. 그래, 아웃이다. 인마. 으으으, 하고 심판의 판정에 항의하는 것처럼 녀석은 울상인 그대로 이마를 문지르면서 투덜거렸다.
“검성 군은 그 아이가 살려낸 거잖아? 하지만 지금도 검성 군은 여전히 자신을 똑바로 인식하고 있어. 좀비나 구울 같은 하급 언데드가 되지도 않고.”
“내가 잘나서 그런 거지. 그게 뭐가 어쨌다고?”
나르콜렙시의 눈이 게슴츠레하게 가늘어졌다.
“대체 그 근거 없는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오는 거람?”
잡소리 하지 말고 설명이나 하라며 미간에 주름 팍 잡고 팔짱을 낀 채 바라보자 녀석이 어디에서 났는지 안경 하나를 꺼내 모양 좋은 코에 얹었다.
“물~로온. 검성 군이 최고의 소재인 건 맞지만 말야… 검성 군이 지금도 송장 냄새 안 풍기고 멀쩡히 움직일 수 있는 건 그 아이가 검성 군을 그렇게 만들어주고 있기 때문이야.”
흐흐응. 하고 뭘 떠올렸는지 입가에 수상쩍기 그지없는 웃음을 짓는 녀석의 얼굴. 어쩐지 칼을 뽑아서 슥삭해버리고 싶어진다. 이런 예감은 틀리는 일이 잘 없는데.
“혹시 그 아이랑 멀어져서 연결이 끊기거나 하면… 아마 얼마 안 가서 좀비가 되어버릴걸? 넋나간 검성 군도… 귀여울 것 같아. 그렇게 되면 내가 주워도 될까?”
베어버린다, 이 망할 년아. 노려보며 으르릉거리니 흥, 하고 새침한 체하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무슨 어필이냐고 저건.
아무튼, 그나마 녀석의 말 중에서 영양가 있는 부분만 추려보면… 녀석이 내 근처에 어슬렁거리기 때문에 나는 구울이나 좀비, 심하게는 스켈레톤이 되지 않고 검성 하이엔 더츠백으로서 있을 수 있단 말인데.
“아, 그런 건 딱 질색인데. 개목걸이에 매인 개랑 다를 게 뭔데.”
“나로선 다른 것에 더 마음이 쓰이지만.”
흥, 하고 조금 샐쭉한 듯 고개를 홱 돌리는 녀석을 보곤 골치가 아파졌다. 애보기는 딱 질색이지만, 그 애보기를 하지 않으면 남은 건 넋 나간 언데드 행이라고? 이런 되먹지 않은 선택지는 대체 누가 준비한 거냐.
“저기 말야, 검성 군.”
불쾌한 기분에 미간에 주름을 잔뜩 잡고 찌푸리고 있으려니 조금 떨어져 있던 나르콜렙시가 얼굴을 확 들이밀고 가까이 다가왔다. 생글생글 보기만 해도 수상함이 꿀처럼 뚝뚝 떨어지는 녀석의 이마를 검지와 중지로 눌러 밀어냈다.
볼을 뿌우 불리고 투덜거리다가, 홱. 이쪽을 향해 얼굴을 다시 돌리는 나르콜렙시의 얼굴에 아주 조금 진지함이 감돌았다. 얼마나 조금이냐면, 물에 그 함량의 비상을 타 마셔도 절대 죽지 않을 정도의 함량이다.
“내 얘기를 들었으니 슬슬 검성 군의 거취를 생각해봐야 하지 않아? 어차피 검성 군은 이제 적어도 이 나라에 발붙이고 살 수 없으니까. 이참에 언데드도 되었겠다, 아예 우리 쪽으로 오는 건 어때?”
“어이, 나르콜렙시. 지나친 농담은 집어치워.”
“농담 아니야. 나 진심이야. 꽤.”
얼굴에 웃음기를 싹 지우고, 카벙클같은 커다란 눈동자를 진지하게 빛내면서 말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별로 와닿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게, 이 녀석은 그 말과 몸으로 상대를 농락하는 것을 장기로 삼는 서큐버스니까.
이 녀석의 진심이라는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뭐, ‘믿지 않는다’라는 게 가장 속편하긴 하지만 지금의 날 속인다고 이 녀석이 얻는 게 뭔가?
하지만 녀석의 제안이 땡기지 않는 것도 사실. 이래봬도 ‘검성’이라고 불렸던 몸이다. 기왕 변절한다면 확실하게 톱을 노려야지 않겠냐고.
“네 녀석의 말대로 내가 너희 쪽에 가담한다고 치면, 내가 너희 쪽에서 해봤자 뭘 하겠냐? 기껏해야 영감한테 그랬던 것처럼 마왕이 휘두르는 칼 정도 취급이겠지.”
뭐, 사실 돌이켜보면 영감은 좋은 칼주인이었다.
마왕을 잡고 돌아온 뒤 제대로 대우해주었고, 더러운 일을 시키거나 하지 않았고, 숙청하려 들지도 않았지. 당장 아래층 안방에서 자고 있을 아질이나 사라도 지금이야 어쨌든 미련 없이 자신들의 새 삶을 살 수 있게 놓아주었지 않았는가 말이야.
그 딸과 원한이 있긴 하지만, 뭐 내 쪽에서는 복수를 끝내 청산한 원한이다. 물론 그쪽에서 다시 셈을 시작한다면 네 그렇습니까 하고 그냥 넘어가 줄 생각은 없다. 어느 한쪽이 포기할 때까지 셈을 주고받는 게임도 썩 싫어하지 않고.
“그래서?”
“난 새 마왕의 청소부나 네 기둥서방 노릇 따윈 안 할 거란 얘기다. 한다면 너희 세상을 먹어버려야겠지. 그 정도 각오하고 스카웃하라고.”
잠시 녀석이 멍한 얼굴을 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나르콜렙시. 의외로 표정이 홱홱 바뀌는 녀석이구만, 하고 생각하면서 황당해하는 표정을 의외로 재밌게 구경했다.
“검성 군, 농담 잘 하네….”
“농담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생각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면 한없이 진심인데?”
“아니, 마왕의 목을 벤 장본인이… 다음 마왕을 해 먹겠다고 당당히 말하는 게 농담이 아니면 뭔데?”
그다음은 딱히 몽마에게 말할 필요가 없다.
녀석은 이미 죽었으니까. 멋대로 죽어버린 녀석과 대등해지려면, 용사가 될 수 없는 한에야 마왕이 될 수밖에 없잖겠냐고. 제멋대로인 이유이지만, 그런 동기에서 내뱉은 말이기도 했다. 마음만 먹으면 못할 것도 없겠지.
어차피 농담하는 김에 하나 더 보탤까. 이를 드러낸 채 씩 웃고 팔을 뻗으면서, 엄지를 아래로 휘둘렀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네가 내 휘하로 들어와라. 쓸만한 부하로 삼아줄 테니까.”
“푸…”
순간 나르콜렙시의 얼굴이 제 머리색인 핑크색처럼 빨갛게 물들었다.
표정이 어쩐지 범람이 넘치기 직전이었던 둑처럼 되었다가, 이내 조금 김빠진 것처럼 스리슬쩍 넘쳤다.
“푸핫. 뭐야 그거. 스카웃치곤 되게 뻔뻔하다. 안 그래?”
“내가 뻔뻔한 건 이 나라 녀석은 전부 다 알지.”
“정말 그래요.”
한숨지으며 끼어드는 제 3의 목소리가 들렸다.
양손을 제 허리에 짚은 채, 배가 볼록하게 튀어나와있지 않은 사라스바티가 문가에 서 있었다. 어디부터 들은 거지? 뭐, 곤란한 얘기 같은 건 하나도 안 했지만.
발랄하게, 반갑다는 듯 만면에 활기찬 미소를 띤 채 나르콜렙시가 친근한 척 인사를 건넸다.
“안녕, 사라~ 지난번 선물로 내 배에 박아준 얼음 창, 지금도 안 녹고 잘 있다~?”
“어머 어머, 다행이네요. 오랜만이네요, 서큐버스. 녹았으면 새 얼음 창을 배때지에 찔러드릴까 했는데 이미 이엔 씨가 배에 다른 걸 찔러준 것 같고?”
“아주 크~고 굵~고 단단~하고 뷰르릇 나오는 걸로 찔러줬어.”
“뷰르릇이라니… 대체 뭘까요, 그게.”
피다, 피. 오해할 말은 하지 마라, 임산부랑 서큐버스.
서큐버스가 만들어낸 꿈은 일종의 외부에서 가하는 마법 작용이다. 대마법사인 그녀라면 그 꿈에 개입하는 것쯤은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겠지.
“방금 한 말은 어디까지 진심이에요?”
“내가 농담하는 거 봤냐?”
사라스바티의 제법 찌릿한 추궁도 선선히 수긍하면서 한쪽 입가를 말아올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사라는 제법 경직된 사고관의 소유자라서, 전 용사의 동료들은 죽을 때까지 타의 모범이 되도록 고결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기라도 하는 모양.
난 그럴 생각 없거든.
“남편한테 얘기를 듣긴 했지만요. 여왕에게 한 짓에 대해서는… 솔직히 여왕이 그렇게 당해도 할 말 없는 짓을 당신에게 했어요. 하지만 이건 아주 다른 얘기에요.”
“아~ 재미없어. 슬슬 돌아가도 돼? 아줌마가 되더니 벌써 엄마노릇하려는 거야?”
“닥치세요, 몽마. 이건 용사님의 동료끼리 하는 말이니 돌아가든 말든 당신 마음대로 하시구요.”
눈치없이 한 마디 툭 끼어든 나르콜렙시에게 눈을 부라리며 파이어볼이라도 한 방 날릴 기세인 사라스바티. 현역이었으면 정말 파이어볼… 아니 그보다 더 고위 주문을 날렸을지도 모르겠다. 틀림없이 날렸을 거란 쪽에 내 떡신을 걸 수도 있다.
“뭐어뭐어. 도덕 수업은 날이 밝았을 때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
벌러덩, 침대에 누워버리면서 사라스바티의 화에 부채질했지만 사라스바티는 용케 화를 내지 않았다. 아마 제 의식의 일부를 떼어내어 내게 보낸 것이겠지만 그런 의식체라도 혹여 뱃속의 아기에게 해가 될 만한 기억이나 감정을 품고 싶지 않았을 거다.
“나르콜렙시, 사라를 더 자극하면 문답무용 홀딱 벗겨서 내쫓을 줄 알아.”
이미 반쯤은 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꼴이지만 내 말에 도끼눈을 뜨고는 조금 거리를 두며 물러나는 걸 보면 아주 먹히지 않는 엄포는 아니었나보다.
“하아… 알았어, 알았다구. 검성 군도 내 제안을 한번 곰곰이 생각해봐.”
“너야말로. 다음에 올 때는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제발 부하로 받아달라고 애걸복걸해봐라. 그럼 받아주지.”
슬슬 가려나보다. 귀찮으니까 배웅 같은 건 안 하련다. 손을 휘휘 흔들면서 빨리 좀 가라고 대놓고 눈치를 주니 부루퉁한 얼굴이었다가,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이내 사악하고 지독한 웃음을 입가에 그려보였다. 말 그대로 그 얼굴은, 인간의 꿈을 농락하는 서큐버스였다. 저 몽마와 지겹게 싸우던 시절, 저 웃음을 볼 때마다 재수없는 일이 일어나는 바람에 지긋지긋해진 그 웃음이었다.
“그러고보니 내가 말했잖아. 나, 여왕의 시녀로 한동안 있었다고.”
저 표정. 그리고 지금 와서 꺼내는 이 말.
…뭐라 분명한 형태를 갖추지 않는 불안감이 등골을 살짝 저릿하게 타고 올라갔다.
“그럼 이제 슬슬… 여왕이 보낸 사냥개들이 도착할 때가 되었으려나?”
이 자식이…!
이를 으득 물면서 등에 돌려놓았던 흉검을 뽑아 녀석이 앉아있던 자리를 내려치는 데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런 말을 제일 빨리 해야 할 것 아냐, 이 빌어처먹을 서큐버스 년이!
하지만 내 반응을 이미 예상했다는 듯 잽싸게 뒤로 몸을 빼면서 서큐버스의 몸이 흐릿해졌다. 도망가는 거냐!
“그럼 오늘은 이만 가볼게? 얼른 내 것이 되어줘, 검성 군♡”
“다음에 만나면 뒈진다!”
검을 위로 들어 올렸다가 그대로 내리찍었다. 하지만 흉검의 송곳니가 찢어발긴 것은…
어딜 공격하시는 거죠? 그건 제 잔상입니다만. 한바탕 꿈에 농락당한 기분이 몹시 더러웠지만, 지금은 서큐버스의 장난질에 오래 화내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바깥에서, 요란하게 바크가 짖어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말이 우는 소리. 고함과 호령, 병장기가 끌리고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함께 뒤엉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야음을 틈탄 기습이라기보다는 이미 선제공격의 징후에 가까웠다.
상황은 일 초의 유예도 허락하지 않는 급박한 흐름으로 들불처럼 번져가고 있었다.
아, 개 좆같은 내 인생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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