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헬하운드-7화 (7/79)

〈 7화 〉 2 /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지 (1)

* * *

(1)

왕도를 빠져나가 교외로 접어드는 한산한 시골길의 정경은 한바탕 난리가 났을 왕도와는 전혀 연이 없어 보였다.

자신이 빠져나간 그 매음굴에서 여왕이 밤새 어떤 꼴을 당했을지, 그 뒤로 왕도가 얼마만큼 뒤집혔을지를 직접 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사실 알고 있다. 살려두면 분명히 두고두고 후환이 되겠지. 치욕을 당했으니 성가신 일이 되풀이될 것이다. 자객을 보내든 기사단을 동원하든 어떻게든 깎인 체면을 만회하려 들 테고.

차라리 죽여뒀으면… 하고 말하기에는, 그 자리에서 여왕을 베어버렸으면 더더욱 성가신 일이 되었을 테니 논외다. 차라리 살려둬서 제 앞가림과 뒤처리에 골몰하게 만들어야 빠져나갈 시간을 조금이라도 벌 수 있겠지.

하지만 무턱대고 길을 서두를 수만은 없었다.

공교롭게도, 전혀 의도한 바가 아니었지만… 일행이 있었기 때문이다.

"…얌마."

"왜?"

걸음을 멈추자, 등 뒤에서 졸졸 따라오던 발걸음 소리도 멈췄다.

돌아보자, 올려다보면서 호박색의 눈이 깜빡거렸다. 정말로 이유를 모르는 얼굴이어서, 한숨을 쉬곤 몇 번째인지 모를 문답을 또 시작하기로 했다.

"언제까지 따라올 셈인 거냐?! 나한테 볼일이 없거든 이제 네 갈 길 가라고!"

"왜 화를 내?"

"화를 내지 않게 하려거든 따라오지 마!"

악악, 소리를 질러보았다. 반응이 없었다.

물론 상대가 어린애이니만큼… 뭐 자기보다 10배 이상 나이를 먹었다고 말하긴 했지만.

‘위압’을 가해봐도 뭐 하냐는 얼굴로 투명하게 올려다봐서야 맥만 풀릴 따름이다.

결국, 잠깐 포기하고 출발했다가 졸졸 따라오는 것에 신경이 쓰인 나머지 다시 멈춰 서서 윽박지르길 반복하는, 묘하게 긴장감 없는 도피행이 시작된 것이다.

심지어 따돌리려고 전력으로 달려 거리를 벌려봐도 어느 틈엔가 등 뒤의 몇 걸음쯤 사이를 두고 나타나고서야 이젠 슬슬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아무튼, 숲길에 접어들었다.

왕도에서 다른 영주의 영지로 향하는 길목인데, 일단 여왕에게 행한 복수를 다른 영지에서 벌써 알아챘을 것 같지는 않았다. 왕이 죽었다는 걸 알고는 있을지 의문이다.

지금 향하고 있는 곳의 영주는 나름대로 받아야 할 빚과 갚아야 할 빚이 서로 이래저래 쌓여있는 인물로, 어찌 됐든 적어도 여왕처럼 내 목을 자르고 싶어 안달이 나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전에 들를 곳이 있었다.

이 숲에 있는 곳이다. 누군가 거칠게 만들어놓은 길을 따라 걷다 보니 느긋한 양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초원도 아니고 숲속에 양이라니.

이윽고 도착했다.

숲 가운데 자리 잡은 조그마한 농가. 이층집이 있고, 채소밭이 있고, 울타리 안에서 느긋하게 우는 양 서너 마리가 있었다. 양들이 낯선 이를 경계하며 울자, 가장 먼저 파수견이 마중나왔다. 이를 드러내고 으르릉거리던 파수견이 한번 코를 킁 하고 울리더니 귀를 쫑긋 세웠다.

"웡! 웡! 웡!"

"요. 바크, 오랜만이다."

꼬리를 치며 달려온 파수견을 팔로 받아 쓰다듬으며 녀석이 기쁜 듯이 헥헥거리는 것을 받아주고 머리를 한번 탈탈탈 하고 털을 털어내듯이 쓰다듬었다. 개는 겅중겅중 내 주위를 두어 바퀴 뛰어다니더니 기운차게 한번 짖고는 울타리를 넘어 집 앞으로 달렸다.

"어이! 아질! 오고 있는 거 다 아는 녀석이 얼굴도 안 보여주냐!"

한번 소리높여 부르니 양들이 한층 불안한 듯 메에 울며 울타리 안쪽으로 도망가고, 주변에서 새들이 서둘러 도망치듯 나뭇가지에서 퍼덕거리며 날아갔다. ‘위압’을 실은 외침이었으니 당연했다. 파수견 바크가 한 번 더 우렁차게 짖자 겨우 문이 열렸다. 허리를 잔뜩 숙인 근육질의 남자가 곤혹스러운 듯 문을 통과해 나왔다.

"오랜만입니다. 하이엔. 그동안 잘 지냈습니까? 이렇게 직접 보는 건 몇 년 만이군요. 흠… 못 본 사이 조금 인상이 달라지셨습니다."

"뭐, 이래저래 일이 있었거든."

원래의 난 적갈색 머리카락을 갖고 있었지만, 지금의 내 머리는 백색에 조금 더 가까운 푸석푸석한 회색 머리카락이었다. 뭐 죽었다 살아난 부작용치곤 값싸다 싶었으니 크게 신경쓰진 않았지만.

과거 마왕을 함께 토벌한 동료들 중 한 명인 아질(Aegle)은 왕이 내린 포상만 받고는 관직이나 스카우트는 일절 거절한 뒤 자취를 감췄었다. 그럴 만했다. 하프오우거인 그가 요직에 앉아봤자 견제의 대상이 될 게 뻔했으니까. 물론 나는 연락을 주고받으며 지냈고.

"점심을 준비하던 중이라 말이죠. 조금 손을 뗄 수가 없어서 부득이하게 마중하지 못했습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점심은 아직. 오우거 부족 전통 요리 좀 기꺼이 얻어먹어 볼까."

그러고 보니 어쩐지 고기 냄새 같은 게 나는 것 같더라니.

기꺼이 들어가려는데, 아질의 눈은 내 뒤를 향하고 있었다.

"누굽니까?"

"아, 내가 조금 빚을 진 상대야. 같이 들어가도 되지?"

"…인간은 아니군요."

어깨를 으쓱였다. 이 녀석에게는 어차피 감춰봤자 소용없고, 감출 수도 없었다. 감출 필요조차 없는 생사고락을 함께 한 상대였다.

"일단 해가 되는 녀석은 아냐. 들어가서 얘기하자고. 어이, 너도 들어와."

하프오우거인 아질의 덩치를 감안해 지은 집인지라 두 명의 손님이 들어와도 좁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여전히 현역 시절의 감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지 벽에 세워둔 큼지막한 무기를 보면서 피식 웃고는 일단 의자 하나를 끌어당겨 앉았다.

"에휴…. 늘 이런 식이라니까. 오기 전에 연락 좀 하고 오면 어디가 덧나요? 진짜 늘 제멋대로에요. 이엔 씨는."

계단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힘겹게 한걸음 한걸음 떼는 걸 보곤 아질이 서둘러 다가가 부축했다. 그럴법했다. 아무리 함께 마왕을 쓰러뜨린 대마법사라고 해도 어머니가 되기 직전이 되면 남편의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법이니까.

"뭐, 이래저래 사정이 있어서 연락을 주고 올 만한 처지가 아니었다고. 사라."

그녀의 이름은 사라스바티(Saraswati).

남편, 아질은 하프오우거였고 아내인 그녀는 하프엘프였다. 뭐 하프끼리 운명적인 사랑… 이라던가 그런 건가 싶지만 사실 같이 마왕군을 돌파했을 때도 둘의 사이는 꽤 각별했었지. 하지만 결혼까지 해서 애가 들어설 줄은 몰랐다. 하프 부분이 겹쳐서 가능했나…?

"될 때까지 하니 들어서더군요."

아질이 오우거의 인상 탓에 무뚝뚝해 보이는 얼굴로 드물게 농담을 하니 남편의 등을 사라가 찰싹 때렸다. 볼이 붉게 달아오른 게 꽤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천상 부부구만. 키득거리면서 아질이 내온 냄비에서 크게 닭고기 한 덩어리 퍼올렸다. 옆에서 빤히 바라보는… 녀석의 접시에 먼저 덜어주고 나니 나이프와 포크를 능숙하게 쓰며 닭고기를 입으로 가져가는 그 녀석. 이름도 아직 모르는데.

"누구에요?"

어째 부부가 내 이야기보단 딸려온 꼬맹이를 더 궁금해하는지.

이것도 곧 애엄마 애아빠가 될 거라서 그런가. 한숨쉬고는 닭고기를 입으로 물어뜯으며 질겅질겅 씹었다.

"마왕의 후계자 중 하나. 내 목숨을 빚졌어."

"목숨을 빚져요…?"

사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세한 얘기를 하면 별로 태교에 좋을 것 같지 않으니까 대충 얼버무렸고, 아질은 뭔가 낌새를 눈치챘는지 조금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애 가진 아줌마가 들어서 좋을 얘기가 아니야."

누가 아줌마예요! 하는 항의는 무시. 끙하고 앓는 소리와 함께 퉤… 닭뼈를 뱉었다.

참 꼼꼼하게도 뼈에서 살을 발라내 고기를 먹은 녀석이 호박색 눈을 깜빡이며 말없이 리필을 요구했다… 네이네이, 알아모십죠. 한 국자 더 퍼주니 잘 먹는 모습을 보곤 아질의 표정이 조금 부드러웠다.

"악한 존재로 보이진 않는군요. …당신과 에스텔 사이에 만약 자식이 있었다면 저런 느낌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반절은 오우거인 너야 성장이 빠르니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말이야. 인간 아기는 2살이면 걸을락 말락 할 정도라고. 나도 정확하게 아는 건 아니지만."

에스텔… 그 이름을 들으니 입 안에서 쓴맛이 번졌다.

어떻게 알았는지 그 녀석이 소매를 붙들고 있었다. 뭐야, 위로해주는 거냐. 아니었다. 닭고기 더 달란다. 이 마왕 후계자식이.

"같이 사냥이나 가지."

"…지금 말입니까?"

아질의 눈에 곤혹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물론 사라가 듣지 않을 만한 곳에서 얘기하자는 내 생각을 눈치채지 못한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제 눈을 신뢰한다고 해도 저 녀석은 마족이다. 만삭인 아내를 마족과 가까이 두는 게 역시 켕기는 모양인데.

물론, 사라도 그런 남편의 염려를 모르지 않았다. 짝, 하고 별로 아프지는 않을 것 같지만 소리는 묘하게 큰 손바닥이 남편의 등판을 후렸다.

"사슴이나 한 마리 큰 놈으로 잡아와요. 애가 사슴이 먹고 싶다 그래. 남들은 딸기가 먹고 싶다 신 게 먹고 싶다 그런다던데 왜 우리 애는 고기만 찾는지 모르겠네. 오우거 피가 섞여서 그런가봐요."

"…알았소."

결국 아질도 몸을 일으켰다. 입에 손가락을 넣고 휘익, 하고 휘파람 소리를 내자 문 밖에 있던 바크가 들어와, 사라의 앞에 웅크렸다. 뒤이어 창문을 통해 커다란 독수리 한 마리가 들어와 천장에 설치된 횃대에 앉았다.

"오, 팀 아냐. 여전하구만."

횃대에 앉은 독수리에게도 아는 체를 하니 삐이익 하고 소리를 내어 화답했다. 아질은 벽에 세워둔 제 무기를 쥐었다. 인간 병사가 쓰는 창보다도 길고 구불구불하게 휘어진 한 자루의 활이다. 활대는 블랙 드래곤의 뼈, 시위는 그 힘줄로 만든 특제로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것이다. 그야 아질이 만들었으니 더 만들지 않은 이상 하나뿐이겠지. 뭐, 특별한 무기로 치자면 내 흉검도 마찬가지지만.

집에서 조금 멀리 벗어나, 수풀이 우거진 곳으로 향하고 나서야 아질이 무거운 입을 열었다. 하프라고는 하지만 엘프의 청력은 매우 비상해서, 그 귀를 속이려면 꽤나 거리가 필요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당신에게서…"

아질이 조금 망설이며 두꺼운 턱을 닫았다가, 다시 그 턱을 여는 데는 약간의 시간도 필요했고.

"…송장 냄새가 납니다만."

"바크도 못 맡은 걸 맡다니. 전혀 녹슬지 않았는데?"

어깨를 으쓱이는 사이, 아질이 가볍게 활시위를 당겨 화살을 쏘았다.

시위를 반도 당기지 않아 힘을 거의 받지 않는 화살이 매섭게 날아가, 겅중겅중 뛰어다니던 사슴의 심장을 단박에 뚫었다. 아마 자신이 살에 맞은 줄도 모르고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뭐, 얘기하자면 복잡한데. 일단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말야."

스르릉… 흉검 가름을 뽑아들어서 어깨에 걸쳐메곤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말부터 꺼내기는 참, 싫긴 했지만… 어쩔 수 없지.

"너희도 빨리 여길 뜨는 게 좋을 거란 말을 하러 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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