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 1 / 사냥이 끝났다고 순순히 삶길 것 같냐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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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여왕의 침실로 향하는 복도에 분위기 죽이는 붉은 융단이 깔렸다.
원래 이 복도를 덮고 있던 융단은 고급스러운 흰색이었는데, 오늘 특별히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해보기 위해 일부러 정열적인 붉은 융단을 깔아둔 것…
…은 당연히 아니지. 과정이야 어쨌든 공교롭게도 붉은 융단인 양 착각할 정도로 새빨갛게 젖어든 바닥에서 한층 색다른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긴 하다. 정열적이기도 하고.
얼마나 색다른지, 여왕의 집무실 문 안에서도 들릴 정도로 놀라움의 비명이 마치 칼 맞아 죽은 신출내기 병사처럼 이따금 찢어지게 울려 퍼졌으니까.
"쓸모… 없는, 병사 놈들…! 얼른… 얼른 내 성에서… 저 빌어먹을 반역자를… 치우란 말, 야, 빨리!"
며칠 전 아버지의 급사 후 새로이 왕위에 오른 여왕은 자신의 침실 한구석에서 칼 한 자루만을 겨우 움켜쥐고 란제리 차림 그대로인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오늘 밤 도저히 쉬이 잠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독주를 마구 들이키고는 미소년 시동들을 불러들였던 참에, 불운은 한순간에 날아들었었지.
왕과 왕세자가 모두 사라진 왕좌를 손쉽게 차지하고 방해물이 될 만한 자들도 모조리 숙청한 첫날에 불과했는데, 어째서!
"이건 꿈이야, 이건 꿈이야 이 건 꿈이 야이 건 꿈이 야이건 꿈이 야이 건꿈 이야이 건 꿈이 야이건꿈 이야…. 이런 게 현실일 리가 없는, 데…!"
광증에라도 시달리는 것처럼 핏발선 눈으로 부들거리며 손에 쥔 칼 한 자루만이 여신이 내려준 구원인 양 꽉 움켜쥐었다. 그래, 이건 정말 꿈일 수밖에 없다.
숨이 턱에 차서 달려온 병사가 ‘검성’이 보물창고에 침입해서 제 무기를 챙겼다는 보고를 했을 때, 얼마나 술에 취했으면 감히 여왕에게 그딴 보고를 하는지 괘씸해서, 단박에 목을 치라고 명했을 정도다.
하지만 그런 보고가 두 번 세 번 넘도록 연거푸 이어지자, 그렇잖아도 술과 색정행위로 간신히 억눌러지고 있던 여왕의 히스테리는 극에 달했다. 처형 직전 그 남자가 외친 피맺힌 저주가 머릿속을 연거푸 때려대고 울려대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면서 남몰래 달달 떨고 있었던 터이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거짓말이라고, 거짓말이라고 누가 말해 줘, 대체 내가 뭘 했다고…!"
그리고 그것이 현실이라고 재차 날아드는 보고가 찾아왔을 때, 결국 여왕은 시녀를 칼로 찔러 죽여버리고 남은 병사들을 다그쳐 빨리 이 소동을 끝내라고 명령했었다.
급박하게 달음박질치는 발소리, 무엇인가를 후려치면서 쨍그랑 하고 깨지는 소리, 고통스러운 비명소리… 그 모든 소리가 어느 순간부터 잦아들었다.
그제야 여왕이, 달달 떨리던 입가에 웃음 비슷한 것을 겨우겨우 만들어붙이고 후들거리는 다리로 일어섰다… 란제리 가랑이는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체통을 지키지 못하고 오줌을 지리고 만 것을 볼 시녀도 시종도 없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끄, 끝났느냐…? 끝난 거지? 아, 아하하… 아무도, 없느냐? 얼른, 얼른 그 반역자의 목을 갖고 와, 왜, 왜… 아무도 대답이 없느냐, 왜애애!"
핏발선 눈으로, 오줌에 젖은 다리와 란제리차림인 채 문가로 다가가는 여왕의 하문에 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묘하게 조용해진 복도 너머로 통하는 문으로 비틀비틀 다가가며 문을 향해 손을 뻗고는, 킬킬킬 광증어린 웃음소리를 흘렸다.
"이번에는… 아바마마 무덤 앞에서… 활활 태워서 재로 만든 다음 아바마마 무덤에 뿌려버릴 테니까. 그럼… 행여 살아났다고 떠들어댈 놈도 없…!"
한 걸음. 문까지는 딱 한걸음이었다. 호사스러운 요정목으로 만든 문의 고리를 향해 손을 뻗는 그 문이 왜 이렇게 멀…
"꺄아으아아학?!"
콰직!
문 너머에서 콰득 하고 후려친 칼날에 우지끈 소리를 내며 문이 커다란 칼자국이 패였다. 아무렇게나 튀어나온 비명소리와 함께 여왕의 요염한 몸이 그대로 무너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치이이이,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질펀하게 지릿한 냄새를 풍기는 물웅덩이가 생겨나 카펫에 스며들었다.
"「~암퇘지야, 암퇘지야. 문 좀 열어다오♪~」"
마치 흥얼거리듯, 음유시인이 밤의 여관에서 음란한 노래를 부르듯한 목소리를 여왕은 몰랐다. 자신이 아는 검성의 목소리는 저렇지 않았다. 말투는, 딱 그 쪽이지만!
키득키득 소리죽인 웃음소리가 문 너머에서 울려왔다.
이번엔 광대가 모자를 내밀고 동전을 요구하는 듯한 익살스러운 목소리.
"「손톱만큼도 열어줄 수가 없다고? 그럼~」"
드드드드드드득…
거친 쇠붙이가 문을 천천히 긁어올라가는 소리가, 주저앉은 여왕의 등에 소름이 돋게 했다.
"「숨을 훅 불어서 집을 날려버려야지!」"
콰직!
그리고 칼날이 문을 내리찍었다. 마음만 먹으면 문을 그대로 부숴버릴 수도 있을 텐데, 문짝이 우그러지고 종잇장처럼 찢기며 외날검의 흉악한 칼날이 너머에서부터 푹 파고들었다.
"아학! 꺄하으악!"
말하는 법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여왕의 목에서 연거푸 튀어올라오는 것은 흉한 암퇘지의 비명뿐이다. 콰득, 콰득, 콰득… 마치 도끼로 장작을 패듯이 칼날이 문을 짓부수는 동안 여왕의 얼굴이 눈물콧물, 침으로 젖은 채 뒤쪽으로, 거꾸로 기듯이 도망치고 있었다.
콰득ㅡ
문의 반쪽이 날아가서 너머가 훤히 보인다. 입꼬리를 말아올려 썩은 고기를 찾은 하이에나 같은 웃음을 이를 드러내며 보인 채, 그가 부숴진 문틈에 얼굴을 바싹 밀어붙였다.
"좀비가 왔다~!"
남은 문짝을 걷어차 날려버리고 나니 코끝에 지린내가 진동했다. 누가 실례를 했는지는 새삼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바닥에 주저앉은 채 갓 태어난 아기마냥 오줌도 못 가리고 걸음마도 못 배운 것 같이 구는 왕관 쓴 여자 탓이지.
흉검 가름을 어깨에 걸치면서 한쪽 입꼬리만 일그러뜨리며 내려다본다. 눈이 마주치자 여자는 울음을 터뜨린 얼굴로 바들바들, 손에 든 칼을 마구 떨며 나에게 내밀었다… 본인은 찌르겠다는 제스처겠지만 저래서야 준다고 내미는 건지 찌르는 건지 알 게 뭐야.
준다니 받아야겠지.
허접하게 쥔 칼날을 잡아 확 당겨 뺏어 던져버렸다. 그따위로 칼 잡아봐야 고블린도 못 잡겠는데. 어차피 여왕쯤 됐으니 고블린 잡아야 할 일은 없겠지만.
"어휴, 아주 그냥 오줌 지린내가 진동하네. 이거 좀 씻겨줘야겠는데?"
그나저나 여왕님이 뭘 자셨길래 지린내가 이렇게 미친 듯이 코를 얼얼하게 해서 내 코가 말 그대로 뭉개질 지경이다.
하는 수 없으니 일단 손을 뻗어 여왕님의 머리채를 콱 붙들고는 그대로 질질 소리 나도록 끌었다. 머리가 기니 잡기도 편하구만. 유쾌한 기분이 들어서 콧노래까지 나온다.
"노, 놓아라, 놓아, 라…! 이 무도…한 반역자 놈, 날 데리고 어디로 갈 셈… 이냐!"
"어, 일단 네년이 존나 지린 냄새가 아주 쩔어주니까 좀 씻긴 다음에 뭘 할지 생각하려고."
머리카락을 잡혀 아파하는 꼴도 속이 조금 풀리지만 이래서야 밤을 새워도 시간이 부족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나는 나름대로 신사니까 여왕의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아서는 안 되겠지. 발버둥 치는 여왕의 몸을 어깨에 확 걸쳐 멘 뒤 창문을 향해 달렸다.
갑자기 내가 달리기 시작하자 잠시 상황파악을 못 하다가, 내가 어디를 향해 달리는지를 깨닫자 여왕의 목소리가 한층 더 데시벨이 올라갔다. 시끄러우니 좀 닥쳐주지 않을래.
"자, 잠깐, 잠깐잠깐잠까아아아안, 기다려, 기다려어어어, 제발, 잘못했어요 멈춰 싫어어어어!"
쨍강…! 이리저리 깨진 유리 파편이 별처럼 튀는 공중에 몸을 맡긴 순간, 이미 여자는 정신을 놓고 있었다.
거 5층 정도에서 뛰어내리 정도로 그렇게까지 죽는소리하긴. 정신줄까지 놓다니 이러고서 정말 여왕 노릇 할 수 있으려나…?
이 정도로 정신 놓으면 이제부터 일어날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말야. 내일 무슨 꼴로 백성들을 맞이하려고?
그대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야음을 내달렸다.
왕궁에서는 진즉에 난리가 나도 한참 전에 났지만, 여왕이 어디로 갔는지 알아내려면 아무리 발에 땀내나게 뛰어도 오늘 밤만으론 부족할걸.
목적한 장소에 금새 도착해서는 숨을 살짝 고르고 기절한 여왕을 짐짝처럼 어깨에 멘 채로 문을 열어젖히며 들어갔다. 거만한 목소리를 깔고.
"어이. 여기 포주는 어딨나?"
위압을 살짝 실어 말하니 누구도 나설 엄두도 내지 못하는 가운데 쭈뼛거리면서도 나서는 이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네이네이. 찾으셨습니까, 나리?"
돈이란 참 편리한 것이다.
왕도 뒷골목의 매음굴에 기절한 여자를 어깨에 짊어지고 들어가도, 돈만 잘 내주면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것이다. 노예 검투사 시절에도 그랬지만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 이곳이 마치 고향처럼 익숙했다.
물론 그 돈도 기절한 여자의 집에서 훔쳐온 것이지만, 큰 상관은 없겠지.
지배인인지 포주인지 뭐라고 부르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부르니 땅딸막한 게 사람으로 변장한 고블린이 아닌가 싶은 키 작은 남자가 다가와서 손을 싹싹 비벼댔다.
왕실 창고에서 금붙이를 털어온 자루를 던져주자 잽싸게 그 자루를 풀어 안을 확인해본 그의 눈이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아마 그 안에 든 금붙이 정도면 여섯 달쯤은 창부들의 상납금을 탈탈 털어야 모을 수 있을 테니 그럴법했다.
"그 돈이면 여기 있는 손님이랑 여자들 죄다 다른 곳으로 보내서 이 가게 비울 수 있겠냐? 오늘 하룻밤만."
"네이, 그야 물론입죠, 물론입죠 나리… 얘들아, 손님 받지 말고, 받은 손님 다 보내라!"
"아, 생각해보니 여자를 다 보내면 안 되겠군. 이 여자를 일단 씻겨야 할 테니까…. 씻길 때 단단히 입막음해놔. 혀 깨물지도 몰라. 그리고…"
그리고의 뒤에 무슨 말을 했는지는 다음 화를 위해 기대하시라는 의미에서 여기에서는 말하지 않고 아껴두자구.
지배인의 귀에 소곤소곤 요청사항을 말해주니 지배인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주변의 창부들에게 눈짓했다. 그럼 술이나 한잔하면서 기다릴까, 하고 자리에 앉으니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면서 지배인이 다가왔다.
"저어, 근데 손님과 그 여자분은 혹시…."
"뭐, 그게 중요한가? 이거보다?"
품에서 금화가 두툼하게 들어있는 돈주머니를 던졌다 받았다 하려니 은근슬쩍 정체를 확인하려던 지배인이 잽싸게 물러섰다. 상대가 반역자든 여왕이든, 이 뒷골목에서는 금화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다. 반역자의 금화로도 빵은 살 수 있단 말이다.
"물론 아니고 말굽쇼. 예이, 그러문입쇼."
아예 바 위에 다리를 얹고 지배인과 한두 잔쯤 기울이며 잡담을 나누다 보니 시간은 금새 지나갔다. 가슴을 내놓은 창부 하나가 슬그머니 다가와선 이쪽에 눈웃음치곤 지배인의 귀에 한 마디 슥 보태고 가게를 나갔다.
슬슬 준비가 다 된 건가. 금화가 묵직하게 들어있는 가죽 주머니를 그 짧고 통통한 손가락이 모인 손에 던져주고는 오늘 밤의 메인디쉬를 즐기러 객실로 향했다.
자아, 얼마나 암퇘지 같은 꼴일지 기대되는데.
트란 드라쿨루의 국왕, 메살리나 여왕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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