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 1 / 사냥이 끝났다고 순순히 삶길 것 같냐 (3)
* * *
(3)
“시합 잘 봤어. 굉장하던데, 너.”
“엉? 뭐냐 넌. 지금 놀리냐?”
용사. 그렇게 불렸던 녀석이 있었다.
터무니없이 긍정적이고, 터무니없이 선했고, 터무니없이 강했지.
힘이 아니라 마음의 강약을 말함이다. 녀석의 마음은 참 강했다. 어떤 때라도 흔들림 없이 사람의 선함을 믿을 수 있는 것은 진짜로 마음이 강한 녀석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뭐, 괴물같이 강한 것도 사살이었고.
그래야 녀석과 검을 겨뤄도 밀리지 않는 나도 괴물같이 강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냐고.
녀석은 칼을 갈고 있는 내 등 뒤로 다가와서 말을 붙이며 시원하게 씩 웃었었지.
“너 같은 녀석은 마음에 들어. 어때, 이런 검투장에서 노예 검투사 노릇으로 썩다 죽는 것보다 훨씬 자극적인 일이 있는데.”
“헤에… 말이나 해봐라.”
들어는 보자고, 팔짱을 끼고 녀석의 앞에 서니 녀석은 내 발목에 채워진 족쇄에 잠시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머리 반쯤 위에 있는 내 얼굴을 올려다보고는 이를 드러내며 시원스럽게 씩 웃었었다. 참 호쾌하게 웃는 녀석이다, 그렇게 생각했더란다.
“난 동료를 모으고 있어. 같이 마왕을 잡을 동료 말야. 일단 용사거든. 네 검투에 한눈에 반했는데, 어때. 나랑 같이 가겠어?”
“날이 더워서 더위를 처먹었나. 언감생심 나 같은 놈이? 사람 귀찮게 하지 말고 다른 데 가서 이름 날리고 싶어 근질근질한 어디 기사 나리나 붙들고 물어봐.”
“이렇게 날도 더운데 돌아다니려면 힘들다고. 그렇게 돌아다녀도 너 정도의 검사는 없었고. 그럼 구미가 당길 얘길 할까? 나랑 같이 가면 노예 해방에다가 돈도 엄청 벌걸?”
“대신 뒈질 수가 있지. 딴 데 안 가면 확 날려버린다!”
팔을 붕붕 휘두르자, 오, 하고 녀석은 한 걸음 물러났다가, 다시 붙임성있게 다가와서 올려다보곤 도전적인 웃음을 지었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내가 이기면 넌 내 거. 네가 이기면 두말없이 포기할게.”
“뭐? 헹. 샌님같이 곱상한 게 어딜. 뭐 좋다. 칼도 갈았겠다 잘 드는지 한번 시험 정도는 해 봐야겠구만. 오늘 칼 맞아 관짝에 처넣어져도 내 원망은 말기다.”
뭐 자세한 결투 내용은… 일단 생략하자.
어쨌든 내가 녀석의 ‘것’이 되었다는 사실만 간략하게. …종이 한 장 정도 차이였다. 진짜다!
아무튼 녀석의 마왕 토벌 파티에 한 자리 끼이게 된 뒤로는, 녀석의 말마따나 검투사 노릇으로 썩어가는 것보다 훨씬 자극적인 일이 이어졌었다. 강적과 칼을 섞는 것이나…
“뭐야. 너 여자였냐?”
“응? 말 안 했던가?”
“결단코 말 한 적 없다! 나 참, 곱상하다 싶긴 했는데 안 달린 녀석이 칼 들고 말이야.”
…그 뒤로 어쩌다보니 녀석과 살 섞는 관계가 되기도 했고.
말해두지만 녀석이 먼저 대쉬해왔다고. 용사(여)에게 대쉬받는 남자란 말씀이야.
저 위에 그것도 대쉬로 쳐 주는 거지? 맞지?
“뭐에요, 그럼 안 달린 녀석은 뒤에서 마법이나 쓰란 거에요? 너무하네, 하이엔 씨!”
“진정하세요. 저도 달린 놈이지만 뒤에서 화살 쏘고 있잖습니까.”
동료… 라고 해야 하나. 오늘 본 얼굴이 내일 뒈져나갈지도 모른다는 건 검투장과 비슷하긴 했지만 그래도 적어도 내 손으로 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게 어디냐. 지금은 어디에서 뭘 하고 있을지. 아니, 살아있기나 한 건지.
“에스…”
녀석과 밤마다 살 섞는 사이가 되었을 때부터, 휴식 때마다 가끔 녀석의 무릎에 누울 때가 있었다. 밀이삭 같은 머리를 길게 기르고부터는 어쩐지 갑옷 위로도 여자 태가 물씬 나게 되었는데 말이지. 손을 위로 뻗어 녀석의 봄날 같은 연분홍색 뺨을…
“크학…!”
…붙잡으려던 손이 비와 피에 젖은 채 다른 손에 붙들렸다. 녀석과는 달랐다. 작고, 옷자락 외에 아무것도 쥐어본 적이 없는 듯 덧없는 무게의 손이다.
시선의 가장자리에는 빽빽하게 웃자란 나무들이 우거져있었고, 뜬 눈에 자꾸 성가신 빗방울이 쏟아져내렸다.
…어떻게 된 거지. 난 분명…
“목 잘려서 뒈졌는데….”
“‘에스’가 누구야?”
내려다보는 얼굴은 녀석의 것이 아니었다.
살색은 비인간적으로 창백하고, 머리색은 내 송장을 쪼러 온 까마귀인가 싶을 정도로 검다.
잔뜩 흐린 하늘에서 내려온 달 같은 호박색 눈동자가 내려다보았다.
단정하고 얌전한, 인형 같은 이목구비는 눈에 익었다.
“…오랜만, 이구만.”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감옥에 밤마다 놀러 와 선문답을 주고받던 녀석을 잊을 리 있나.
목소리가 탁하게 갈라졌다. 이전에도 별로 좋은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반토막난 성대에서 숨이 새는 듯한 쉰 목소리가 되었다.
“어떻게 된 거냐? 난 분명 처형장에서 목이 잘렸는데.”
“살려냈어.”
녀석의 말은 너무 간단해서 바쁜 아침에 식사 대용으로 쓰면 딱 좋겠다.
어차피 말주변 없는 녀석이란 건 익히 알고 있었고 직접 지금 상황을 확인해보는 편을 택하기로 했다. 요컨대 목을 짚어본 것이다.
잘린 건 틀림없다. 내 목이 잘리는 소리를 내 귀로 들었으니 그건 틀림없지.
게다가 일단 지금은 붙어있지만 어쩐지 목에 기묘한 위화감이 들기도 했고. 뭐야 이건. 실밥인가? 이거 풀거나 하면 다시 모가지가 바닥에 떨어지거나 하는 거려나.
그건 별로 좋지 않겠다. 꼬맹이 교육상.
“네가 살려준 거냐? 마왕 후계자라는 이름도 내기로 딴 건 아니었구만. 뭐 일단 고맙다.”
어떻게 살려낸 건지는 굳이 묻지 않았다.
알아들을 수 있을 거란 생각도 안 들고. 팔도 움직이고, 다리도 움직이고, 거시기도 팔팔하다. 녀석을 생각했더니 섰다고. 오케이. 구울이 되었든 좀비가 되었든 팔다리랑 거시기만 움직이면 주인공을 해먹을 수 있습니다. 스켈레톤만 아니면 돼.
“빚은 갚으마.”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일단 뭐, 한 가지 꼭 해야 할 일은 있지.”
제가 한 말은 지켜야 하지 않겠냐고.
‘전’자가 붙긴 하지만 일단 검성이라고 불렸던 몸이다. 이불에 오줌 지리게 해 줘야지.
그러려면 가장 먼저 향해야 할 곳. 되찾아야 할 것이 있다.
“일단 검성이니 검은 있어야 하지 않겠냐.”
“기껏 살려냈는데, 도망은 치지 않는 거야?”
“이대로 도망치면 그냥 좀비나 다름없잖아? 기왕지사 언데드 인생 시작이면… 데스 나이트 정도는 되어줘야지.”
내 송장이 버려진 곳이 처형장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숲이었다는 건 다행한 일이었고, 그에 더하여 아직 내가 죽은 당일이 지나지 않았던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난 은밀 행동 따위는 연이 없었다. 왕궁의 쪽문을 박살내고, 위병들을 주먹으로 때려눕히면서 왕실의 보물 창고에 도착하는 것은 사실 별로 어렵지 않았다.
“이걸로 진~짜 반역자 확정이구만.”
“그렇게 말하면서 즐거워보여.”
“반역이라는 게 사실은 졸라 즐거운 거거든.”
몸에 화살 몇 대가 박혔지만 어쩐지 아프지도 않고 간지럽지도 않다. 이게 그… 사후강직인가 뭐시긴가 그거냐? 물론 화살을 쏜 놈에게는 그 화살을 눈알에 박아 돌려줬고. 아껴 쓰라고.
“잘 계신지 모르겠구만. 놈들이 엿바꿔먹지나 않았으면 좋겠네.”
왕실 보물창고는 굳게 잠겨있었다. 나한테 열쇠가 있을 리는 없지만 그렇다고 열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이런 말이 있잖냐? 존만아, 힘으로 안 되는 건 없단다. 있다면 네 힘이 부족한 거겠지, 라고.
문을 발로 딱 두 번 걷어차자 문짝 자체가 우그러져서 날아갔다. 어차피 여기 돈 많으니 나중에 새로 해다가 달으쇼.
“어디~ 보자~ 어디~ 있나~ 내~ 거시기.”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대충 보물창고를 휘 둘러보다가, 무기 선반을 바라보았다. 씁… 녀석의 검을 찾았다. 녀석의 심성만큼이나 올곧고 유려한, 여신의 축복이라는 걸 물체로 만들어낸다면 이런 형상일 법한… 문자 그대로인 성검, 그 이름은 ‘엑스페란사(Exsperanza)’이다.
“무슨 인연인지. 참 질기다, 너도. 죽은 녀석은 그냥 푹 쉬라고. 넌 그래도 만족하면서 뒈졌잖아.”
걸려 있는 성검을 꺼내 칼자루를 쥐고 뽑아보니 그 때 그대로, 녀석의 최후 때 그러했듯 부러진 그대로여서 쓴 기분이 먹먹하게 스며들었다. 영감탱이, 죽기 전에 고쳐놓고 죽을 것이지.
잠깐 생각했다. 이 녀석도 여기에 있어서야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남들 구경거리로 전락할 게 뻔한데, 그럴 바에는 차라리 내가 갖고 다니는 게 낫겠지 싶었다. 단언컨대 주인 녀석도 그걸 바랄 거라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꼬맹이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은 뒤 수색을 재개했다.
뭐,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들어오자마자 알 수 있었다고. ‘놈’이 여기 있다는 것을.
있었다.
녀석의 성검 ‘엑스페란사’와 맞설 수 있는 유일한 검. 내 단짝, 내 파트너.
“오랜만이구만? 파트너. 너나 나나 감옥밥 좀 먹느라 좀이 쑤셔서 어쩔 도리가 없었지? 이번에도 한 번 화끈하게 털어먹어 보자고.”
“…검한테 말을 거는 거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는 꼬맹이는 일단 내버려두고, 오랜만에 만난 오랜 친구의 칼자루를 손에 쥐었다.
“여전히 죽여주는데. 베이비.”
아, 이 착 감겨오는 느낌. 잡자마자 뭔가를 썰어버리고 싶은 고양감. 최고야. 녀석도 어지간히 굶주렸는지 으르릉대고 있다. 아, 진짜로 소리를 내거나 한 건 아니니 오해 없기를.
녀석의 이름은 ‘가름(Garmr)’. 내 손처럼 편안한, 오로지 썰고 자르고 부수는 데에만 쓸 수 있는 외날 대검이다. 이래 봬도 마왕의 목을 쳐 날린 사나운 맹수라고. 성검 ‘엑스페란사’가 여신이 내려준 운명으로서 별이 내리는 심판이라면, 이 녀석은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야수라고 할 수 있다.
“찾았다! 반역자 하이엔이다!”
“하, 검성 님이라고 불러라!”
이미 너네 여왕님이 뺏어갔으니 전(?) 자 정도는 붙이는 건 용서해주지!
달려들었다. 즐거워 죽겠어서, 입가에 사나운 웃음이 걸려 있었다.
내게는 뭐, 녀석처럼 강맹한 검기를 쳐 날린다든지, 아니면 보조 주문으로 스스로의 능력을 증폭시키거나 치유하는 간질간질한 재주 따위는 없다.
오로지 정면에서 방패로 막으면 방패를, 창검으로 막으면 창검을, 갑옷으로 막으면 갑옷을 우그러뜨리고 살과 피를 베어버릴 뿐!
“으랴아아아아아!”
손에 꽉 움켜쥔 가름을 휘둘러서, 방패를 잇대어 모아 짠 방진을 후려쳤다.
묵직하고 거대한 대검에 실린 파워는, 그대로 방패를 우그러뜨려 베어버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뒤에 있던 병사들까지 단번에 베어버릴 수 있을 정도였다. 아직 쓸만하잖아!
와르르 무너지는 방패들 너머에서 후두두둑… 기분 나쁜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그 자리에서 즉사한 시체들이 함께 무너졌다.
“괴, 물…!”
아직 살아있는 녀석이 있었나. 뭐… 적어도 한 방에 목숨을 끊어주려고 했는데.
여기까지 온 마당에 동정심 같은 건 딱히 끄집어내지 않는다. 눈이 공포에 질린 젊은 병사의 머리 위로 가름을 치켜들었다.
“살려…!”
“싫은데.”
퍼억.
정수리에서부터 고간까지 깔끔하게, 한 방으로 병사의 몸뚱이가 반 토막이 났다. 뭐라 하려던 말 한마디도 마저 이어붙이지 못하고 죽은 자의 대열에 합류한 병사의 피가 몸에 저주처럼 달라붙었다. 어쩌라고. 너도 분하면 살아나 보든가. 그럼 순순히 칼 한방쯤은 맞아줄 테니까.
피가 뚝뚝 떨어지는 가름을 어깨에 걸쳐 메었다. 오랜만에 맛본 피 맛에 흡족해하는 건 검의 모습을 한 흉견일까, 아니면…
그게 혹 나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중요한가?
“자아, 그럼.”
오랜만에 칼을 쥐고 날뛰니 한창 ‘검성’이라고 날리던 옛날처럼 피가 들끓는 것 같다.
자, 이제 여왕이 오줌 지린 이불 구경이나 하러 가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