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 Chapter 1 1 / 사냥이 끝났다고 순순히 삶길 것 같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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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묘한 선문답 뒤의 아침을 맞았다.
아침의 일정은 정해져 있었다. 잠시 족쇄를 풀고 기간튬(Gigantium)제 수갑을 착용한 뒤 심문관과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다.
공교롭게도 하루 한 끼뿐인 식사도 심문관과 만나는 시간과 겹쳤다.
말인즉슨 식사조차도 멀쩡하게 주어지는 일이 그다지 없다는 것이고.
“이봐, 오늘은 평소보다 더하잖아. 우리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닌데 너무 빡빡하게 나오는 거 아냐? 안 그래도 밤새워서 딸치느라 힘이 없는데 좀 살살해줘잉.”
“닥쳐, 살인자 쓰레기 놈.”
평소에는 손목에 쇠고랑을 채우는 정도였는데 오늘은 발목에 철구 달린 족쇄까지 채우고 거기에 사형수용 복면까지 씌웠다. 오래 묵은 리넨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항. 오늘이 사형 집행일인가? 헤이, 이 두건에서 뭔 냄새 나는지 알아? 눈물 콧물 침 냄새가 아주 지독하게 푹 쩔었어. 인제 와서 빨아달라고 안 할 테니까 그 뭐냐, 나 죽고 나면 다 쓰고 꼭 죽이는 꿈 꾼 날 아침 속곳처럼 잘 빨아서 쨍쨍한 날에 말리라고. 알겠지?”
“이 빌어처먹을 새끼가, 닥치고… 걸어!”
등에 발길질을 당했다. 사실 아픈지도 모르겠다. 이미 등판 전체에 불로 지져지는 고문을 몇 번이고 겪었던지라 발길질 따위에 우는 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사형용 두건을 씌워서 사형장으로 향하는지 심문장으로 향하는지 기껏 숨기려 했던 의미도 없이 이미 어느 쪽 갈림길로 가면 사형장이고 심문장인지 알고 있었다. 슬슬 죽을 날인가, 싶었는데 예상이 빗나갔다. 발길이 심문장으로 향했고, 간수의 손짓에 간단히 의자에 앉혀졌다.
두건이 벗겨졌다.
“여. 이런 곳에 오면 안 되는 거 아니었어?”
“많이 야위었네요.”
맞은편에는 아는 얼굴이 있었다. 금발을 땋아 틀어 올린 여자는 아쿠아마린 색의 눈동자로 주위에 눈짓했다. 간수를 제외한 모두가 나갔다. 여자는 간수를 향해 고갯짓했고 간수는 이내 식사를 내 앞에 놓았다. 곰팡이 핀 빵 한 덩어리가 아니라는 것으로도 황송감사한데 고기에 따뜻한 수프까지 있었다.
“구속을 풀고 나가 계세요.”
“하오나, 공주 전하. 이 자는….”
“당신보다 제가 더 잘 압니다. 제 말대로 하세요. 이건 명령입니다.”
사나운 눈으로 한번 노려본 뒤 수갑이 풀렸다. 간만에 자유를 되찾은 팔이 한껏 굳어진 어깨를 한두 차례 돌려 풀고는 가장 먼저 고기를 집어 입안에 밀어 넣었다. 쫄깃쫄깃하고 씹을 때마다 육즙이 새어 나오는 진짜 고기. 고기를 먹어본 게 얼마 만이더라.
고기를 한 입 삼키고 나자, 겨우 ‘공주 전하’가 입은 옷이 흑단처럼 검다는 것에 시선이 갔다. 그것이 상복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도 약간 시간이 필요했고.
“…폐하께서 어젯밤 붕어하셨습니다.”
아쿠아마린 색의 눈동자를 내리깔며 슬픔조차 놓아버린 쉰 목소리로 여자가 읊조렸다.
감정이 북받친 듯 손수건으로 잠시 코와 입을 막고 눈꺼풀을 바르르 떨었다.
“아버지께서는 숨을 놓으시는 그 순간까지… 당신의 결백을 믿으셨어요.”
“…영감. 나보다 먼저 뒈질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잠시 멈췄던 식사를 다시 이어가면서 쓰게 중얼거렸다. 좋은 왕이었는데… 바로 조금 전 한입 물었을 때 그렇게 달았던 고기에서 쓴맛과 피맛이 났다.
“그리고 저 또한 당신의 결백을 믿고 있습니다.”
왕녀의 목소리에는 힘과 신뢰가 담겨있었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흔들리고 있었지만, 지금을 버티겠다는 의지가 굳건한 목소리였다.
“버텨주세요. 오라버니는 왕위를 승계하기 위한 제물로 당신을 골랐습니다. 백성들의 원한을 당신에게 모으기 위해서요. 저는 아버지의 유지를 잇기 위해서라도 당신이 사형당하는 것을 최대한 막을 생각입니다.”
“그러지 마시지, 공주 전하.”
창자를 꼬이게 만드는 허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입맛도 싹 사라져서, 아주 오랜만에 나온 식사마저 탁자에서 쳐냈다. 빵과 수프가 바닥을 더럽히며 구르는 사이 머리가 무거워 내리깔았다. 그만큼 체념이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구차하게 목숨줄 잇고 싶지 않아. 빨리 내 목을 치고 이 같잖은 소동을 끝내라고.”
“…그럴 수 없어요. 당신이 그렇게 헛되이 목숨을 버리면 아버지께서도 편히 눈을 감으시지 못할 겁니다. 재판관이 무슨 말을 하든 무조건 부정하세요. 최대한 오래 살아남으시면서 제가 당신의 무죄를 입증할 수 있게 버텨내 주세요.”
공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내밀었다. 얼굴에서 절박함과 비탄이 넘실거렸다.
혼에 새겨놓듯 한 마디를 덧붙였다.
“당신의 주군이었으며 제 아버지였던 분을 위해서요.”
공주는 곧 돌아갔고, 평소와는 다르게 손발에 구속을 채우지도 않은 것은 그녀의 당부 탓이었던 모양이다.
오래간만에 다소 편히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고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는 왕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영감이 죽었다고? 실감이 나질 않았다.
“왔냐.”
그리고 어김없이 하루가 넘어가는 시간의 손님이 맞은편 의자에 앉은 채 나타났다.
호박색의 눈동자를 한번 깜빡이고는 평소와는 달리 묶여있지 않는 내가 신기했는지 앉은 자세에서 일어서서 천천히 걸음을 옮겨 다가왔다.
“나한테 너희 왕을 죽이라고 시킨 우리 왕도 오늘 죽었댄다. 이제 임금님끼리 여신의 나라에서 술이나 한 잔씩 하고 있겠구만.”
소녀는 내 다리 사이로 파고들어선 가슴팍에 뒤통수를, 배에 등을 대고 기댔다.
내 말에는 이렇다 할 반응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니, 이 녀석이 다른 간수나 죄인들의 눈에 보이는지도 사실 의문이었다.
뿌리칠 마음도 들지 않아, 그냥 두었다.
“오늘은 안 묻냐? 내가 약해서 이렇게 되었냐고 묻던 그거.”
“안 물어.”
별로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가 대답했다.
괜스레 소녀의 흑단같은 머리카락을 만지면서 왜, 하고 묻자 머리를 뒤로 돌리며 시선을 올린 소녀는 내 추레한 얼굴을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네가 약하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뭐야. 그럼 이제부터 묻지 않는 거냐? 그럼 더 오지도 않겠네. 심심하겠어.”
소녀는 고개를 살짝 도리질했다.
그러고 보면 아직 이 녀석의 이름도 몰랐군. 하지만 새삼스레 이름을 묻는 것도 뭐해서 그러냐, 하고 계속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반응이 없는 걸 보면 꼭 인형 같네.
“뭐 들어나 보자. 내가 왜 약하다는 거지?”
“오늘 누굴 만났어?”
물음에 물음으로 답하는 건 매너 위반이 아니냐.
딴죽을 걸 기운도 없었다. 몰래 챙겨온 흰 빵을 꺼내 물어뜯으면서 대답했다.
“오늘 죽었다는 왕의 딸. 대충 너랑 비슷한 처지가 됐지.”
이 녀석과 마왕이라는 녀석이 직접적으로 혈연이 이어진 것은 아니라고 얼핏 들었지만… 듣자 하니 마왕의 후계자 중 하나라고 했던가. 그렇게 두고 보면 입장 상으론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넌 슬퍼하고 있어. 슬픔은 약함이야.”
“꼭 그렇지만도 않아.”
어차피 곧 죽을 처지인데, 앞으로도 어떻게든 살아야 할 녀석에게 꼰대의 충고 정도 한다고 여신이 벌주거나 하지 않겠지. 단정한 머리를 흐트러뜨리고 볼을 꽉 잡아 늘리니 녀석도 반응이 있었다. 소녀는 미묘하게 얼굴을 바들거렸다.
“슬픔에 지면 약해지는 거고, 이겨내면 강해지는 거고.”
“슬퍼하지 않으면?”
“강해질 기회를 잃는 거지.”
볼이 늘어난 채 조급 이해되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볼을 놔주고 나자 한쪽 볼만 슬쩍 붉게 부어오른 게 제법 재밌었다.
“이해하고 나면 넌 좋은 임금님이 될 수도 있을걸? 뭐, 마족한테도 통용되는 얘긴지는 모르겠지만. 애들이 이해하기엔 너무 어려운 얘기였냐?”
“난 너보다 나이가 10배는 많은데.”
“그래도 어린애지. 사람이란 누구나 자기 삶을 선택한 만큼만 어른으로 자라는 거야. 그런 면에서 넌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한 어린애고.”
소녀는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그런 제스처를 부끄러움 없이 할 수 있으니 아직 어린애라고. 한번 머리를 쓰다듬어주곤 손을 내려 바닥을 짚었다.
“어쩌면 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지금의 나는 약해. 보라고, 영감이 죽었다는 말만 들었는데 별로 살고 싶지가 않아졌어.”
“그건 아냐.”
소녀가 고개를 저었다.
내려다보니 턱을 들고 고개를 뒤로 젖혀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거꾸로 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누는 선문답은 평소보다 기묘하다고 해야 할지.
“넌 살고 싶어해. 하지만 그걸 인정하고 싶지는 않아하고.”
“뭐야. 마치 내 머릿속을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말하는구만.”
“여자.”
…엥?
갑자기 뭔 소릴 하는 거야, 이 꼬맹이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국에 여자가 고파서 살고 싶어한다는 말을 하면 아무리 마왕 후계자라고 해도 한 대 때려준다.
“오늘 만난 그 여자한테 구애되고 있어. 억울해서, 살고 싶은 마음이 포기가 안 되는 거야.”
“…꼬맹이가.”
호박색 눈동자를 깜빡이면서, 소녀는 품에서 몸을 일으켜 내 앞에 섰다. 상복 같은 검은 드레스 아래 검은 타이즈로 감싸인 다리, 그리고 발은 바닥에서 조금 떠 있었다.
“그 여자는 너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어.”
아무래도 좋은 말이었다.
아무래도 좋은 말이었는데,
어째서인지 지금의 자신에게는 그 말이 꼭 필요했던 것처럼 들리는 이유는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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