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2화 〉 812화 흘러가는 형국
* * *
영화가 사영하는 3관으로 향하니 직원이 표 확인을 하고 있었다. 폰으로 예약 한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확인을 끝내고 안나와 함께 상영관 안으로 들어가 지정된 좌석을 찾아 내려가 몸을 앉혔다.
“생각보다 화면이 크지?”
옆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는 안나를 향해 이만석이 작게 물음을 던졌다. 그러자 가만히 정면을 바라보고 있던 안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했다.
“티비보다는 커.”
“그건 당연한 거고.”
커다란 스크린에서는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여러 선전을 하고 있었다. 팝콘을 몇 개 집어먹으며 바라보던 이만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런 영화는 별로 너한텐 재미없을 텐데. 이왕이면 액션물이나 그런 게 좋았을 거야.”
하란이나 지나, 그리고 차이링이라면 모르겠지만 안나의 성격으로 봐서는 멜로물은 전혀 재밌어 할 것 같지 않았다. 제일 빠른 시간대가 이 영화라서 고른 것 같은데 과연 흥미를 가지고 끝까지 볼 것인지 자신할 수 없었다.
그렇게 잠시간의 선전이 지나가고 드디어 상영관 안이 어두워지며 영화가 시작 되었다.
영화는 한국영화였는데 남자 주인공으로 보이는 어린아이가 나오면서 영화는 시작 되었다. 소꿉친구로 함께 지냈던 활달한 단발머리의 여자애가 여주인공인 듯 남자애와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다니는 애기가 나왔다. 이어 아버지가 운영하던 회사가 잘 못 되었는지 급하게 이사를 가야한다며 친구들과 헤어지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 주인공으로 보이는 애가 그 여자애를 좋아했던 것인지 꼬부랑 글씨로 적은 편지를 주려다 결국 주지 못 하고 그렇게 헤어지는 것으로 지나갔다.
그 후에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되고 대학생이 되어 서울로 상경한 이야기가 시작 되었는데 뜻 밖에도 신입생 환영회에서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행동에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어릴 때 헤어진 여주인공을 만났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고 그동안 잊지 못해 혹시나 싶어 남자친구가 있는지 물어보자 있다는 대답에 내심 실망을 하면서도 잘 지내는 모습을 보니 다행이다고 하면서 대화를 이어갔다. 그렇게 다시 만난 두 사람 사이에 중간에 여러 일들을 겪게 되는 그런 청춘 로맨스 멜로물이었다.
이만석도 이런 스타일의 영화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인지 그저 팝콘을 집어 먹으며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고개를 힐끔 돌려 바라보니 아무런 표정이 없어 재밌게 보는 것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한국어를 알아듣는데 아무런 제약이 없으니 보는 대는 상관없겠지.’
팔찌에 걸려 있는 통역마법으로 인해 안나는 언어제약이 없었다. 거기다 한글공부도 꾸준히 하고 있어 글자를 읽는데도 상당히 진도를 빼고 있어 간판에 적혀 있는 대부분의 글도 척척 잘 읽었다. 통역마법으로 인해 회화에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한글을 읽히는데 수월했다.
영화가 상영하는 내내 이만석은 팝콘을 주서 먹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커플로 보이는 이들 밖에 보이지 않아 영화 자체가 이들을 노리고 나온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왕이면 안나가 재밌을 만한 영화였으면 좋았을 텐데.“
이런 멜로물 보다 안나는 첩보물이나 액션물을 봤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만석도 액션물을 좋아하고 안나도 그런 쪽으로 인생을 살아왔으니 아주 재미나게 봤을 터였다.
‘졸리네...’
팝콘도 바닥을 드러내니 콜라로 목을 축인 이만석이 잠시 눈을 감고는 잠을 청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음악소리와 함께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움에 눈을 뜨니 영화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해보니 12시가 조금 넘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다 먹은 팝콘과 남은 콜라를 들고 계단을 따라 내려와 출구로 나섰다. 길목에 서있는 쓰레기통에 팝콘 통을 버리고 남은 음료수를 얼음 구멍에 부어버린 후 컵을 옆에 꽂아두고는 걸어서 나갔다.
“결국 제대로 보지도 못 했네... 영화 볼만했어?”
걸음을 옮기며 이만석이 안나에게 감상평을 물었다.
“......”
그러나 아무런 대답이 없는 그녀를 보곤 이만석이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재미없었나보군.’
역시나 이런 루즈한 멜로물은 자신도 그렇고 안나에게도 취향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와 건물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근처 카페로 향했다. 커피 두 잔을 주문하고 진동 벨을 가지고 2층으로 알라가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11시 넘어 액션물 하나 하던데 차라리 그걸 보는 게 나았을 거야.”
처음 가는 영화관인데 이렇게 되면 안나에게는 별로 남는 게 없을 것 같았다.
“다음엔 시간보다는 보고 싶은 영화를 보도록 해. 기다리면서 밥도 먹을 수 있고 시간 때울 거는 여러 가지 있을 테니까.”
그때까지 별다른 말이 없던 안나에게서 대답이 들려왔다.
“시간 때문에 그 영화를 고른 게 아니야.”
“그럼?”
“보고 싶어서 골랐어.”
“그게 보고 싶어서 고른 거라고?”
“그래.”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는 이만석의 시선에 안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시선은 뭐지.”
“전혀 그럴 거라고 생각을 하지 않았거든.”
그때 진동벨이 울려 이만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1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곤 잠시 후 아메리카노 두 잔을 가지고 올라와 안나 앞에 빨대를 꽂아서 놔주었다.
“멍청해.”
“멍청하다니.”
갑작스러운 욕설에 이만석이 반문을 하며 말했다가 곧 그게 조금 전에 본 영화 때문이라는 것을 떠올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영화 주인공이 별로였다는 소린가?”
“그래.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자신 때문에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찾아온 여주인공 만나주지 않은 것도 바보 같고, 결혼식장을 향하면서도 눈물을 흘리던 그 여주인공도 마음에 안 들어.”
“남자 주인공이 아팠나?”
“골수암 때문에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었어.”
“그래?”
이만석도 암에 걸려 봤었기 때문에 저 말이 낯설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엄청 괴로웠는지 결국에 들켰고 그 뒤로 만나주지 않다가 나중에 한 번 만나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그 길로 끝이야.”
“결혼을 포기하고 왔다는 건 큰 맘먹고 왔는데 만나주지 않았다는 소린가?”
“맞아.”
“새드엔딩이네.”
경혼식장에 향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과 남자 주인공의 독백으로 그렇게 영화가 끝났다는 얘기를 했다. 어쩐지 이만석은 눈을 떠보니 주변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 엔딩이 좋게 끝났을 것 같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했었다.
“둘 다 멍청해.”
“엔딩이 불만이야?”
“마음에 안 들어.”
불쾌해 하는 안나를 보면서 그녀가 생각 이상으로 영화를 집중해서 봤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나름 재밌게 봤나보네?”
저렇게 엔딩에 불만을 품을 정도면 그래도 끝까지 졸지 않고 다 봤다는 소리였다.
“그렇게 처다보지 마.”
“아니 신기해서.”
놀랍다는 듯 바라보는 이만석의 시선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안나가 다시 톡 쏘듯 날카롭게 말했다. 입맛을 다신 이만석이 물음을 던졌다.
“로맨스 물을 싫어하지 않나보지?”
보이는 이미지와 다르게 의외로 안나가 그런 쪽으로 관심이 있나 싶어 물어보았다.
“생각해보지도 않았고 흥미도 없어.”
역시나 이어져 나오는 대답은 이만석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어서 나오는 대답에 이만석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하지만 지금은 흥미를 가지려고 노력하는 중이야.”
“흥미를 가지면 가졌지 노력한다는 건 뭐야.”
“......”
어이없다는 듯 물어오는 이만석의 말에 안나는 대답을 하지 않고 가만히 처다보았다.
“내 질문이 별론가 보지?”
표정변화가 없어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화가 난 것인지 불만이 있는 것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다만 조금 전의 질문에 기분이 나쁘기에 그런가 싶어 다시 물어본 것이다.
“그걸 몰라서 물어?”
“뭘 모른다는 소리지.”
“......”
또 다시 대답을 하지 않는 안나를 보며 이만석은 그제야 그녀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를 깨닫고는 입을 열었다.
“그 노력하겠다 말하는 것이 나 때문이라는 소린가?”
“그래.”
“멜로물 영화를 고른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란 소리군.”
그런 쪽으로 전혀 흥미가 없다던 그녀가 왜 스스로 멜로물 영화를 골랐는지에 대해서 명쾌한 답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이만석은 그런 쪽으로 생각을 하지 않아서 좀 놀랐다. 안나가 자신 때문에 멜로물 영화를 골랐다는 것 자체가 이만석에게 놀라운 일이었다. 하란이나 지나라면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그게 안나라서 놀라운 일이었다.
“난 사랑에 대해서 뭐가 뭔지 몰라. 내가 느끼는 감정이 좋아하는 감정이라고 말해줘서 알게 됐으니까.”
이만석이 알려주기 전 까지 안나는 자신이 느끼는 이 생소한 감정에 대해서 알 수가 없었다. 잠자리에 누으면 생각이 나고 이 남자 얼굴이 떠올랐다. 함께 있으면 기분이 좋고 마음이 편안하면서도 묘하게 심장이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