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1화 〉 811화 흘러가는 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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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을 옮겨 문 쪽으로 향하니 안나가 말없이 그의 옆을 따랐다. 개인 사무실을 나와 복도를 걸아가다 마주치는 이들이 전부 이만석에게 예의를 차리며 인사를 올렸다. 차기 일성회 회장에 오를 사람이니 당연한 행동이었다. 물론 그게 아니라도 일성회 내에서 이만석을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정인철 회장과 동급, 아니 그 이상 대하기 어려워하는 사람이 바로 이만석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만석은 편하게 행동하라 했지만 직원들에겐 그럴 수 없는 존재로 올라서 있었다. 살아 있는 전설이나 마찬가지니 당연한일이었다.
그를 한 번이나 보는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심지어 그를 존경해서 일성회에 들어오는 젊은피들도 많았다. 어쩌면 이는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와 야외주차장으로 향해 정차 되어 있는 차량에 올라탔다.
“가고 싶은 곳 있어?”
집으로 돌아가 봤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이만석이 안나에게 물음을 던졌다. 전에 북 서울 꿈의 숲에 갔을 때 말고는 돌아다닌 적이 없었다. 수행비서로써 함께 붙어 다니는 시간은 많았지만 사적인 일로 다닌 적은 거의 없었다.
“무슨 의미야?”
조수석에 올라탄 안나가 이만석의 물음에 반대로 질문을 던져왔다.
“무슨 의미냐니.”
“방금 네가 한 말.”
“집으로 돌아가 봤자 할 일이 없을 테니 가고 싶은 곳이 있나 물어보는 거야.”
잠시 동안 눈을 깜박이며 이만석을 바라보던 안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데이트?”
순간 이만석의 입에서 작은 웃음이 지어졌다.
“뭐 그것도 다른 말은 아니지.”
안나가 고개를 다시 정면으로 돌렸다. 그러고는 작은 목소리로 지나가듯 말한다.
“영화보고 싶어.”
“영화?”
재차 물어보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이만석이 천천히 차를 몰아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이만석은 그렇게 시내 번화가로 향했다. 그녀들과 자주 갔던 영화관으로 향한 이만석이 지하 주차장으로 차를 몰아 정차시키곤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내리니 평일 낮 시간대라 사람들이 많지는 않고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구수한 팝콘냄새와 함께 영화 포스터들이 붙어 있었고 설치되어 있는 작은 스크린에서 상영하고 있거나 앞으로 상영예정인 영화의 예고편들이 나오고 있었다. 여름이 다 지나가서 공포영화들이 많이 빠져나가가고 코믹물이나 액션, 그리고 멜로물로 보이는 영화들이 주를 이루었다.
“보고 싶은 영화 있어?”
사영시간대와 상영관에 어떤 영화가 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말없이 그것을 바라보던 안나가 한 가지를 지목했다.
“저거.”
그녀가 가리킨 영화를 보니 10:30분 시작하는 영화로 현재 상영시간대가 가장 빠른 영화였다. 다른 영화들을 보니 11:00시에 하거나 11:25분에 하는 등, 하나말고 전부 11시가 넘어서 했다.
“보고 싶은 영화 골라. 기다려도 되니까.”
오랜만에 영화 보러 왔을 텐데 아무거나 고르는 것은 이만석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하지만 안나는 생각 할 것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저거 봐.”
생각도 하지 않고 보자고하는 안나를 보며 못 말린다는 듯 이만석은 스크린 중앙에서 뒤편에 자리 두 개를 잡았다. 10분 후면 영화가 시작 할 시간대 였으니 잠시 기다렸다가 들어가면 될 터였다.
“팝콘 먹을래?”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이만석은 카운터로 가서 콤보로 큰 거 하나에 콜라 두 잔을 주는 것을 주문했다. 수북하게 팝콘을 담고 콜라 두 잔을 따라서 건네주는 것을 받아든 이만석이 빨대를 꽂아 앉아 기다리고 있는 안나에게로 향했다.
가운데 좌석에 콜라 하나와 팝콘을 나두고 남은 하나를 입으로 가져대 두 어 모금 마셨다. 어느새 안나 또한 콜라를 들어 한 모금 마시고 있었다.
“영화관엔 오랜만에 오는 거지?”
“아니.”
“최근에 가봤던가?”
한국은 아닐 테니 그렇다면 이집트에 오기 전 미국에서 가봤을까 싶어 던진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게 최근이라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먼저 들었다.
“처음이야.”
“처음?”
안나의 이어진 대답에 이만석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처음이라는 말이 영화관에 오늘 처음 와보는 거란 말이야?”
“응.”
단 답이었지만 충분히 와 닿을 만한 대답이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렇지 영화관에 한 번도 와보지 못 했다니 의외인데.”
“별 관심이 없었으니까.”
“관심이 없다 해도 주변 사람들과 만나다 보면 한 번쯤 가지 않나?”
“그런 사람 없어.”
“......”
“임무가 끝난 뒤엔 주로 혼자서 독서를 하거나 훈련을 했어.”
“그것 말고는?”
“없어.”
“......”
절로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대답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안나가 한국에 와서도 사적인 시간에 주로 했던 것도 단 두 가지 밖에 없었다. 하나가 독서였고 다른 하나는 훈련이었다. 간간히 이만석에게 대련을 신청하여 상대해 주기도 했는데 적절한 체중 유지와 근육을 위해 웨이트 트레이닝부터 유산소까지 꾸준하게 해오고 있었다.
물론 이만석이 준 팔찌 덕분에 안나의 실력이 3배 이상 향상 되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체중까지 유지 되는 것은 아니어서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적절한 몸 관리를 해오고 있는 그녀였다. 물론 차이링이 임신하기 전엔 같이 한 적도 많았고 간간히 지나와 하란와 하기도 했다.
차이링는 죽을 때 까지 여자는 가꾸어야 하는 존재라며 운동을 하는 것을 즐기는 여인이었다. 그래서 안나와 기꺼이 함께 운동하는 것을 좋아했다. 물론 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긴 하지만 사교성이 좋은 차이링이어서 거리낌 없이 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차이링이라고 해도 안나의 활동량을 따라 올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팔찌가 아니라도 원체 혹독한 훈련으로 키워진 그녀라 건장한 사내들이라도 절데 안나의 운동량을 따라 올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만석이 신체향상을 시켜주는 아티펙트 팔찌를 선물 받았으니 누구도 따라 올 수 없는 그런 신체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신체 능력이 올라간 것과 지방이 쌓이는 것은 별개라 체중은 꾸준히 관리를 해줘야 했다.
최근에는 차이링이 임신을 해서 격한 운동을 하는 것은 자제하는 편이었다. 하란이 또한 로스쿨에 들어가 변호사를 꿈꾸고 있기 때문에 이로 인해 수능을 볼 때처럼 대부분의 시간을 바쁘게 생활하고 있었다. 내년이면 졸업반에다 최근이 주혁이나 유라와 인연을 가진 후부터 그쪽으로 좀 더 어려운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어 지나또한 상당히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
그런 그녀들과 다르게 안나는 주로 운동을 겸한 훈련을 하며 간간히 이만석과 실전을 방불케 하는 대련을 하거나 독서를 했다.
이만석 또한 안나를 생각하면 딱 그 두 가지 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최근에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옛날부터 독서와 훈련밖에 하지 않았다는 얘기에 절로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그렇게 지내면 인생의 낙이 있기나 해?”
임무 말고는 그 두 가지만을 하며 살아왔다고 하니 이만서으로써는 이해가 되질 않았다. 물론 자신도 팍팍하게 살아왔지만 안나처럼 저렇게 생활 하지는 못 할 것 같았다. 주변 사람들과 단절하다시피 혼자서 독서와 훈련만 하며 살아왔다니 참으로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어떻게 보면 임무를 제외하면 거의 문명과 단절한 생활을 해왔다고 하는 편이 맞는 것 같았다. 안나의 말로는 산속 오두막에서 혼자서 시간을 많이 보냈다고 했으니 말이다.
‘대부분이 아니라 거의다가 아닐까 생각이 드는데.’
안나의 성격을 보면 임무만 아니라면 거의 오두막에서 지냈던 것 같았다. CIA에서는 오히려 그런 안나의 생활을 크게 반겼을지 모를 일이다. 혼자서 알아서 조용히 지내주겠다는데 당연히 싫어 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받은 봉급과 성공 시 들어오는 성과급과 위험수당은 대부분 스위스은행에 차곡차곡 쌓여 이체 되어 있었다.
필요한 물품은 CIA에서 지급을 해주니 안나는 딱히 돈을 쓸게 없었다. 그래도 대부분의 돈은 전부 은행에 예금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태어나서 한 번도 영화관에 와보지 않았다는 말로인해 이만석은 그동안 그녀가 어떤 생활을 해왔을지 좀 더 와닿게 되었다. 정말로 CIA의 해결사로써 인생을 살아온 것이 그녀의 삶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CIA를 떠나온 지금 그녀 또한 사실 외톨이나 다름없었다. 이만석이 받아주지 않았다면 정말로 그녀로써는 갈 곳이 없었을 것이다.
“시간 됐네.”
열시 반을 가리키는 시간을 확인한 이만석이 팝콘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나 또한 이만석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서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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