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9화 〉 779화 여러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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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했던 것과 실제로 가보니 어때?”
“많이 놀랐어.”
“아마도 그럴 거야. 네가 살아왔던 세계와는 분명히 달랐을 테니까.”
“언니.”
하란이 차이링의 말에 혹시 지나가 기분 나빠하지 않았을까 눈치를 주었다. 하지만 지나는 그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웃었다. 이미 모든걸 생각하고 갔었기 때문이었다.
“괜찮아요. 차이링 언니 말이 맞는 데요 뭘.”
정말로 달랐다. 아니 차이링이 말한 대로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나는 차이링의 저 말에 기분이 나쁘거나 하지 않았다. 사실이었으니까.
“거기서 뭘 했는지 얘기해 줄 수 있겠습니까.”
고개를 끄덕인 지나가 천천히 거기서 무얼 했는지 하나하나 설명을 풀어나갔다. 찾다보니 희망 나눔이라는 단체를 알게 되었고 연락을 통해 일일봉사를 하게 되었다는 것까지 알려주었다. 그렇게 오전에는 들어오는 물품들을 정리하고 가져갈 짐들을 따로 챙겨둔 후 두 명의 아주머니와 함께 맡게 된 집에 찾아간 일까지 보았던 것들을 하나하나 알려주었다.
지나는 그렇게 자신이 경험한 것들을 풀어놓았다.
그리고 도착한 후에 무얼 했는지에 대해서 간편하게 알려주었다. 얘기를 전부 들은 하란이는 물론이고 차이링 또한 표정이 좋지는 않았다.
“확실히 힘들게 사시는 분들이 많기는 한가보네요.”
안타깝다는 듯 말하는 하란이의 표정은 정말로 안쓰러움이 묻어났다. 아직 지나도 달동네라는 곳에 가보지는 않았지만 환경이 그 정도로 열악할 줄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빈부격차는 심해지는 법이니까.”
삼합회에서 생활하면서 차이링도 못 볼꼴 많이 보았다. 인생의 낙오자로 살아가는 이들 중엔 여러 군상들이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중국의 암흑가를 장악하고 있는 삼합회였으니 당연히 오만 일들이 다 일어나는 곳의 환경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아이들의 얼굴이 밝아보여서 그나마 다행이었어요.”
많이 삐뚤어 지지 않았을까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아보여서 안심이 되었던 지나였다. 보통은 그러한 환경에서 자라면 삐뚤어지기 십상이었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너무나 밝았다.
“부모님은 안 계시는 겁니까.”
아이들과 할머니 단 셋이서 살고 있다는 것에 이만석은 그 애들의 부모님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 했다.
“혹시 불의의 사고라도...”
그 얘기에 하란이가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그러한 상황이라면 필시 무슨 일이 터졌을 것이 틀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할머니가 손주들을 거두어들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혹시 어떻게 됐는지 몰라?”
차이링이 질문을 던지자 지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김춘자 아주머니에게 들어서 어떻게 부모님과 헤어졌는지에 대해서 지나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얘기를 꺼내는 게 힘들었다.
‘민준씨가 알게 되면 상당히 마음이 좋지 않을 거야.’
이만석이 어렸을 때 어떻게 자랐는지 들어서 알게 된 지나로써는 선뜻 얘기를 꺼내기가 상당히 힘들었다.
“혹시 저 때문입니까?”
이만석은 지나가 왜 말하기를 꺼려하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네?”
이만석의 말에 지나가 당황하며 대답을 했다.
“계속 제 눈치를 보기에 드린 말입니다.”
“조금... 그렇긴 하네요.”
여기서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었으니 지나는 그렇다는 대답을 했다. 그러자 이만석이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걱정하지 말고 말해도 괜찮다는 뜻이었다. 잠시 동안 망설이던 지나는 작게 한 숨을 내쉬더니 김춘자 아주머니에게 들었던 유라와 준혁이의 부모님에 대한 얘기를 해주었다.
“그래서 할머니가 유라와 준혁이를 맡게 되었어요.”
얘기가 끝나고 나자 응접실엔 조용한 정적감이 감돌았다. 그 정적감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하란이었다.
“그래서 지나씨가 말하기 힘들어 한 거네요.”
왜 이만석의 눈치를 보았는지 하란이는 얘기를 들어보니 잘 알 것 같았다. 두 남매가 겪었던 일이 어쩌면 이만석이 겪은 일과 비슷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연스럽게 하란이의 시선이 이만석에게로 향했다.
‘오빠는 지금 어떤 기분일까.’
알콜중독자에 가정폭력으로 어머니를 잃고 울분을 삼켜야 했던 사람이 이만석이었다. 어머니를 그렇게 떠나보낸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아버지여서 그 고통이 상당했을 것임에 분명했다. 남이라면 증오만이 들끓어 올랐을 테지만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가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이다.
분명히 아버지에 대한 분노도 분노지만 배신감과 여러 복잡한 심정이 어린 이만석의 상처를 크게 남겼을 것이다.
그리고 그 남매들 또한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아서 어머니와 자신들을 버리고 집을 나가버렸다. 그에 대한 충격으로 어머니는 무너져 내렸고 술과 도박에 빠졌다가 스스로 생을 끊어버리는 안타까운 최후를 맞이했다.
듣는 입장에서는 이렇게 가슴이 씁쓸한데 그 남매들에겐 아주 큰 상처로 가슴에 남아 있을 터였다. 왜 아버지가 집을 나갔는지 알고 있을 것이고 어머니가 무너져 가는 모습을 보았을 테니까 말이다.
“의젓합니다.”
침묵을 지키던 이만석이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지나씨 말대로 그러한 일을 겪고도 삐뚤어지지 않고 웃음을 잃지 않았다는 게 대견하군요.”
이만석의 말에 지나는 물론이고 하란이도 대답을 하지 못 했다. 차이링과 안나는 가만히 이만석을 바라보았다.
“그런 면에서 보면 그 애들이 저보다 나은 면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을 잇는 이만석의 입가에 쓴웃음이 지어졌다.
“왜냐하면 전 그 애들처럼 그럴 수가 없었으니까 말이죠.”
이만석은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에 대해서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머니를 돌아가시게 만든 그 사람을 용서할 생각은 없었다. 차이링에게 목도리를 선물 받았을 때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던 사내가 이만석이었다.
아직까지 가슴에 그 미안한 마음과 죄책감이 남아있기에 그런 것이었다.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에게서 자신을 지키려다 돌아가셨으니까. 어쩌면 아버지뿐만이 아니라 어머니를 붙잡아 둔 자신에게도 화가 났었던 것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만석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죄에 대해서 자신의 잘 못도 있다고 생각해 죄책감을 가지며 살아오고 있었다.
자신이 없었다면 새 인생을 찾아 떠날 수 있었을 테니까.
이 자리에서 이만석의 가족사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지금 그가 말하는 이 말에 뭐라고 대답을 쉽게 하지 못 했던 것이다.
“다들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야?”
아무 말 않고 바라보는 시선에 이만석이 피식 거렸다.
“내 과거 때문이라면 이미 다 지나간 일이야. 같이 어머니에게도 찾아가서 인사도 드렸고 지금은 이렇게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되었잖아. 그러니 날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으면 좋겠어.”
“오빠 말이 맞아.”
“민준씨 곁엔 이제 우리들이 있으니까요.”
“우리 같은 미녀들을 끼고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으니 확실히 당신 말을 전적으로 동의해~ 그리고... 여기엔 사랑의 결실도 자라고 있잖아.”
“언니~!”
“기승전아가네요?”
“후후훗...!”
지나와 하란이의 말에 차이링이 보른 듯이 배를 쓰다듬었다. 안나는 자신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는데 그녀들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이만석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러자 자연스럽게 그녀들의 시선이 다시금 이만석에게로 쏠렸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눈가에 눈물이 찔끔할 정도로 한 참 동안 웃음을 터트렸던 이만석이 그녀들의 얼굴을 한 번씩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친척집에 떠맡겨 졌을떼... 더 이상 가족이라는 정을 다시는 느껴보지 못 할 것이라 생각했어.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기분 좋게 돌아 올 수 있는 집이, 가정이 생겼어...”
장례식을 치루고 친척집에 떠맡겨 졌을 때 이만석은 가족이라는 이름에 대해서 어쩌면 거부감이 생겼을 지도 모른다. 그만큼 어머니의 죽음이 큰 상처였고 충격이었다. 하지만 한 편으론 같은 반 애들의 부모님 참관 수업일이나 그런 날에 찾아와 응원을 보내는 아버지와 어머니들을 보면서 많이 부러웠었다.
그날 참관일에 자신에게는 한 명도 찾아오지 않았다. 가족이 있는 아이들이 이만석은 너무나 부러웠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들의 시선에서 이만석은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게 만들어진다.
“돌아올 집이 있다는 것. 그리고 이렇게 함께 할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것이... 참으로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특별한 인연으로 만난 여인들이었다. 다투기도 하고 큰 사건들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한 집에 같이 지내며 살고 있다.
“여기에 있는 전부가 내 가족이라는 생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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