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2화 〉 662화 그의 행동
* * *
“아무래도 전 이기적인 여자인가 봐요.”
“지나씨가요?”
“하란씨도 알겠지만 차이링 언니의 증상이 입덧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을 때 제일 먼저 들었던 것은 불안감이었어요.”
지나는 솜기지 않고 솔직하게 하란이에게 털어놓았다.
이런 자신의 마음을 속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정말로 임신이면 어쩌나 하는 그런 생각도 들었어요. 지금 밝히는 거지만 그래서 금요일 밤에 민준씨의 방으로 찾아간 거예요.”
“아기를 가지려고요?”
“맞아요.”
하란이에게 자신의 속내를 밝힌 다는 것은 사실 쑥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고 차이링의 임신이 사실로 드러난 마당에 숨길 것도 없었다.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만 자신의 마음을 속이고 싶지 않기도 했다.
“새 생명을 가진 것에 축하받아 마땅하지만 차이링 언니에게 그 말을 하는 게 참 힘드네요.”
하란이를 그런 지나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 줄 수 없었다.
자신 또한 지나와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란이 역시도 그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이기적인 건 지나씨 뿐만이 아니에요.’
이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하란이는 속으로 삭힐 수밖에 없었다.
“그 여자 임신했어?”
그때 뒤에서 무미건조한 음성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어느새 안나가 뒤에 서있었다.
“언제 온 거예요?”
아무런 인기척도 느끼지 못 했는데 뒤에 서있었다니 참 소름 돋는 일이었다.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봤는데 목소리에 놀라 돌아보니 뒤에 있었다.
“조금 전에.”
“안나씨도 이미 짐작하고 있었죠?”
지나는 차이링이 입덧을 하는 것이라고 예상 하게 되었던 것이 그때 차안에서 안나가 했던 말 때문이었다.
“......”
말은 하지 않았자만 그게 긍정이라는 것은 이젠 알고 있는 지나였다.
“안나씨도 알고 있었다는 게 무슨 얘기에요?”
하란이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날 돌아오는 차안에서 했던 말 있잖아요. 차이링 언니가 체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말.”
그때는 무심코 넘어갔던 하란이었지만 이제 보니 그게 입덧이라 생각하고 한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절로 놀라게 되었다.
“사실 내가 차이링 언니가 임신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다 안나씨의 그 말 때문이었어요.”
“역시 안나씨는 보통 분이 아니시네요.”
안나가 평범한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하란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만큼 눈썰미도 생각 이상으로 깊었던 것 같다.
이미 안나는 그때부터 짐작하고 있었다는 말이었으니까.
“그 여자가 임신 했다는 것이 그렇게 충격을 받을 일인가?”
“당연히 충격 받을 만한 일이죠. 아무리 마음을 터놓고 이제 같이 지낸다고 해도 민준씨의 아이를 가졌어요. 당연히 충격 받을 만한 일이 아닌가요?”
“아기를 가졌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지 않을 거야.”
“그건 안나씨 생각이지 자신의 아기를 가졌는데 하나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되나요?”
“그 정도는 당연히 받아들여야지.”
지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무심하게 받아 치는 안나의 대답에 하란이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건 안나씨는 입장이 달라서 그래요.”
하란이는 자신도 그렇고 지나도 이만석을 사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나는 그렇지가 않았던 것이다.
사실 그녀가 다른 누군가를 사랑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의문이 들기도 했다.
표정은 물론이고 감정의 변화도 본 적이 없어 어쩔 땐 사람 같지 않아 보일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입장이 다르지 않아.”
안나는 똑부러지게 대답했다.
“입장이 다르지 않다는 게 무슨 말이죠?”
“나도 민준을 좋아해.”
“네?”
순간 하란이 반문을 하며 안나를 바라보았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저도 모르게 반문이 튀어 나온 것이다.
“안나씨 지금 뭐라고 했어요?”
지나도 지금 대답이 상당히 놀라웠는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하지만 안나는 더 이상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지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안나씨도 민준씨를 좋아한다는 말을 하는 거예요?”
자신이 잘 못들은게 아닌지 안나를 향해 되물어보았다.
“그래.”
생각지도 못 한 뜻밖의 얘기에 지나도 그렇고 하란이도 벙 찐 표정으로 안나를 바라보았다.
처음 안나를 보았을 때 두 사람은 이만석이 새로운 여자를 데리고 나타나 경계심을 드러내며 시선을 주었다.
첫인상이 상당히 무표정하고 분위기가 차가워 예사롭지가 않아 위험한 여자로 비춰졌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에 대한 마음은 어느 정도 누그러진 상황이었다.
누군지 물어보니 수행비서라고 해서 놀라기도 했지만 자신들 때문에 집을 나가는 안나를 보고 좀 미안했던 마음도 있어 그 후로 다시 들어왔을 때 잘 대해 주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만석에게 하는 행동을 보니 별다른 관심도 없어 보였다.
사실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을지 의문이 느껴질 정도로 감정이 매말라 보이는 게 바로 안나였다.
그랬는데 지금 그런 안나의 입에서 나온 고백에 하란이도 그렇고 지나도 놀라고 말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얘기에요.”
“안나씨 민준씨를 언제부터 좋아했던 거죠?”
마음을 가다듬은 하란이와 지나가 동시에 안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전혀 그런 낌새를 느끼지 못 했는데 좋아하고 있었다는 말이 믿기지가 않았다.
차아링이 임신했다고 밝힌 것만큼이나 상당히 놀라운 말이었다.
“나도 몰라.”
“네?”
모른다니.
자신이 모르면 도대체 누가 안단 말인가.
“어느 순간 돌이켜 보니까 생각하고 있었어. 민준을 의식하고, 계속해서 신경 쓰이던 것이 이성의 마음이었다는 걸 몰랐어.”
“그럼 지금은 알게 되었다는 얘긴가요?”
“맞아.”
“......”
이걸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지 지나도 그렇고 하란이도 참으로 당황스러웠다.
그녀들이 별 말 못 하고 당혹스러워 하는 얼굴로 쳐다보자 안나가 무심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여자가 민준에 아기를 가졌다고 해서 나는 특별히 충격을 받거나 신경 쓰지 않아. 그 정도도 극복하지 못 하면 옆에 있지도 말아야지.”
“난 인정 못해요.”
안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지나가 반박을 하며 말했다.
“아무런 티도 내지 않다가 갑자기 그렇게 치고 들어오는 게 어디 있어요?”
별다른 좋아하는 티도 내지 않고 언제나 무심하게 자리를 지키던 안나가 이만석을 좋아하고 있었다니 지나는 차이링의 임신도 충격 적인 얘기이지만 이것도 나름 충격이긴 마차가지였다.
“그럼 지금까지 속이고 오빠 옆에 있었단 말이에요?”
하란이 또한 기분이 나쁘다는 듯 안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까 나도 몰랐다고 얘기했어.”
“그때는 몰랐으니까 넘어가고 지금은 인정해 달라는 말이에요?”
지나는 몰랐다는 말로 넘어갈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물론 안나의 말대로 스스로에 대한 감정을 몰랐다고 해도 이제 와서 이렇게 말해서 자신도 같다는 말을 하는 게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리고 한 편으론 이런 충격적인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안나에게서 배신감 비슷한 감정도 느꼈다.
“내가 왜 두 사람에게서 인정을 받아야하지.”
“그건 우리가...”
“민준의 여자라서라고 말하고 싶은 모양인데 나한테 그런 잣대 들이대지 마.”
“뭐라고요?!”
자신의 말을 자르는 것도 모자라 잣대를 들이대지 말라는 안나의 말에 지나의 언성이 높아졌다.
지금 자신들과 이만석이 어떤 사이인지를 알면서도 저런 말을 한다는게 지나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
“지금 말 다했어요?”
“나에게 따지기 전에 저 여자가 임신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흔들리는 자신부터 돌아보는 게 좋을 거야”
그러고는 다시 몸을 돌려 방으로 향하는 안나을 보며 지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저 아직 말 안 끝났어요!”
자리에서 일어난 지나가 안나에게 다가가 어깨를 잡았다.
“꺅!”
허나 잡으려던 어깨는 잡지 못 하고 순식간에 몸을 이쪽으로 돌리며 팔목이 붙잡힌 지나는 고통에 저도 모르게 비명을 내뱉었다.
이어 지나는 바로 앞에서 자신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는 안나의 시선에 절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경고하는데 손은 함부로 놀리지 않는 게 좋아. 네가 민준의 여자만 아니었다면 경고로 끝내지 않았을 테니까.”
순간 저도 모르게 지나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잡고 있던 손목을 놔준 안나가 다시 몸을 돌려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차이링 언니 말이 맞아.’
지나는 어젯밤에 차이링이 안나가 생각보다 더 위험한 여자라고 했던 얘기에 대해서 이제야 실감 할 것 같았다.
‘무서워.’
조금 전 자신을 처다 보던 안나의 그 눈빛은 언제나 보아오던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는 눈빛 그대로였지만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으며 숨이 멎을 것 같은 한기를 느꼈다.
잘 못 하다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삶에 대한 본능이 지나를 지배했던 것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