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4화 〉 614화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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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세린이 충격을 받았지만 패닉에 빠지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미 자신도 이만석과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 첫 번째고, 두 번째는 그에게 지나 말고도 세 명의 여자와 그것도 함께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 두 번째였다.
자신이 여자 친구고 다른 여자가 없는 상황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상당히 충격을 받은 것을 넘어 패닉에 빠질 일이기도 하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자신은 여자 친구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제이니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상황인 것이다.
다만 좀 더 제이니보다 먼저 알았고 가까운 사이라는 게 내세울 점이라면 내세울 점이다.
“관계를 맺었구나...”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막상 두 사람이 관계를 가졌다는 것이 좀 가슴이 아픈 일이긴 했다. 아무리 그래도 제이니는 같은 멤버에다 가까운 언니 동생 사이이기 때문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그런 것 보다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그런 것이라면 확실히 더 와 닿고 충격을 받을 만한 일이다.
하지만 세린은 이일에 대해서 충격을 받았을 지언 정 패닉에 빠지지는 않았다.
이 정도로 패닉에 빠질 정도라면 이만석의 집에 찾아갔을 때 그와 함께 있는 여인들을 마주한 순간에 포기를 했었어야 했다.
그러나 세린은 그러지 않았고 반대로 자신의 처녀를 그에게 주었다.
그런 세린이 이정도의 일에 마음을 접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동안 20년 이상 간직해온 순결을 이만석에게 주었으니 그 의미가 상당히 남다르다는 뜻이다. 학창 시절 대시를 받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특히 가요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수상을 하여 이름을 알렸을 때 학교 내에서 교내 아이돌로 이름이 드높아져 있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잘나간다는 선배나 잘생겼다는 이들에게 여러 번 대시를 받았고 고백도 받았었다.
하지만 세린은 이를 거절 했고 받아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고백을 해온 선배나 이성에게 전혀 마음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가볍게 만나는 것을 거절하는 세린에게 있어 좋아하지도 않는데 고백을 받아 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세린은 지금까지 남자친구를 한 번도 사귀어 본적이 없었다.
그렇게 지켜온 순결을 이만석에게 주었다. 그것도 그에게 여러 명의 여자들이 있는 것을 알고서도 말이다.
어떻게 보면 지금까지 순결을 지켜온 세린을 보면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세린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이었다.
그를 사랑할 수 있는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지가 중요했던 것이다.
만약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났고 그 사람이 혼자가 아니라도 세린은 기꺼이 마음을 열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만석에게 그날 자신을 주겠다고 했던 것이다.
후회 하지 않으니까. 그를 사랑하니까 말이다. 세린이 마음이 여리고 순진하다고 하지만 이런 쪽에 있어서는 확실한 여자였다.
만약 그렇지 않고 이쪽에서도 여렸다면 이미 끈질기게 대시를 해온 선배에게 마음이 열려 사귀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세린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사귈 수 없다는 게 그녀의 원칙이었다.
그리고 처음도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겠다는 게 그녀의 다짐이었고 실천에 옮겼다.
제일 중요한 것은 그를 사랑 할 수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지 그가 다른 여자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었다.
물론 가슴이 아픈 일이긴 하겠지만 이게 세린의 기준인 것이다.
순수한 사란을 꿈꾼다고 다른 사람이 보기에 비춰보였을지 모르지만 사실 그녀만의 사랑에 대한 자신 만에 철학이 뚜렷했을 뿐이다.
“아직은 속단하긴 일러.”
세린은 제이니가 이만석과 관계를 맺었다고 해서 상황을 자신 만에 생각대로 정의 내리려하지 않았다. 일단 직접 이만석에게 들어봐야 했다. 제이니 언니에게 어떤 마음이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이대로 속앓이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한 하란이 폰을 꺼내들어 전화를 걸었다.
마음을 먹었다면 실천을 하면 되는 일이고 그렇다면 이만석에게 물어보면 끝나는 일이었다.
이미 저장번호 1번으로 해놓은 세린은 바로 연결을 했다. 잠시 후 신호음이 가자 세린은 전화를 받을 때까지 기다렸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이만석은 전화를 받질 않았다.
“폰을 놔두고 갔나?”
이만석이 가평으로 휴가를 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세린은 전화를 받지 않아 폰을 놔두고 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놀이 하는데 폰을 들고 물속에 갈일을 없으니까.”
물가에서 놀고 있다면 폰을 들고 있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까지 전화를 걸었을 때 곧장 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그럴 확률이 높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이 이해가 되었다.
“나중에 다시 걸자.”
계속해서 신호음은 가는데 받지를 않자 세린은 통화를 종료했다.
지금 받지 않는다고 문제 생기는 것도 아니고 나중에 다시 전화를 걸면 되는 일이었다.
“그건 그렇고 제이니 언니도 대단하네. 리나 언니에게 관계를 맺었다고 애기도 하고.”
자신은 하지 못 했는데 제이니는 하였다는 것이 세린으로써는 참으로 놀랍다. 어쩌면 그게 성격의 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찾아가서 그런 얘기를 한 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인 것이다.
“리나 언니에게 무슨 일 있어?”
“응?”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있던 제이니는 희라가 자신에게 물음을 던지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라니?”
“아까 보니까 계단에서 내려오는 리나 언니 봤는데 표정이 이상했어.”
“리나 언니가?”
“그렇다니까.”
컵을 가지고 온 희라가 자신의 잔에도 오렌지 주스 한 잔을 따라서 두어 모금 마셨다.
“혹시 고민이라도 있나...아무래도 물어봐야겠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하는 희라를 보며 제이니가 웃음을 지었다.
“언니, 내가 물어볼게.”
“네가?”
“응. 나 원래 이런 쪽엔 쾌활하잖아.”
“그러면 그럴래?”
“알아보고 언니에게 말해줄게.”
“알았어.”
남은 주스를 전부 다 마신 제이니가 싱크대로 향해 컵을 씻어 다시 엎어 두고는 리나의 방으로 향했다.
똑똑
두 번 노크를 한 후 문을 연 제이니가 문을 열었다.
“어니?”
“응?”
“침대에 앉아서 뭐해?”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창밖 처다 보면서 생각에 잠겨 있었어?”
문을 닫고 들어온 제이니가 리나에게로 향했다.
“생각은 무슨... 그런데 무슨 일이야?”
걸음을 옮겨 침대로 이동해 몸을 앉힌 제이니가 리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뭐야 갑자기 찾아와서 가만히 처다 보고?”
“언니 무슨 고민 있어?”
“고민?”
“희라 언니가 언니 표정이 이상하다고 해서 걱정하더라고.”
“고민은 무슨 그런 거 아니야.”
“혹시 내가 했던 말 때문에 그래?”
“뭐?”
“맞구나?”
당황하는 리나를 보고 제이니는 자신이 한 말 때문에 그런 것이라는 확신을 느꼈다.
갑자기 그런고민이 생길리도 없거니와 자신이 해준 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컸었다.
그런데 반응을 보니 역시나였다.
“언니가 이렇게 혼자 생각에 잠길 정도로 충격을 받았을 줄은 몰랐네.”
“충격이라니 그런 거 아니라니까~”
“아닌데 그렇게 멍하니 앉아 창밖을 처다 보면서 생각에 잠겨 있는 거야?”
“그건...”
차마 리나는 이에 대해서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세린 때문에 그런다고 얘기를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말하지 못하는 걸 보니 맞네.”
말끝을 흐리고 대답을 하지 못하는 리나를 보면서 제이니는 확신을 느꼈다 자신 때문에 그런 것이라는 것을.
“그렇게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런 일로 흔들리지 않으니까.”
“너 그 사람 많이 좋아해?”
“많이 좋아하냐고?”
“응.”
“많이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야.”
좋아한다는 말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사랑? 이걸로는 부족하고... 나에 대해서 새롭게 일깨워준 선지자? 이건 좀 그렇다. 그냥 특별한 사람이라고 하는 게 낫겠네.”
제이니가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리나는 확실히 애가 그 사람에게 빠져 있다는 것을 느꼈다.
말투에서 그게 다 느껴지는데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생각 이상으로 많이 빠져있는 것 같았다.
“맞다. 그 사람 지금 서울에 없다고 하더라. 여행 갔다고 하는데 지나라는 그 언니와 함께 갔겠지 아무래도? 그 얘기 듣고 부러운 거 있지? 나도 같이 한 번 가보고 싶은데.”
자신도 같이 여행을 가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분명히 그 사람과 함께하는 여행은 생각 이상으로 즐거울 것 같았다.
“너 다시 생각해 볼 수 없어?”
“다시 생각해 볼 수 없냐니? 설마 그 사람 포기하라는 뜻이야?”
“그게 아니라... 네 미래를 생각해서라도...”
“걱정하지 말라니까. 내가 가지는 마음에 후회하지 않을 거고 상처 받지도 않을 거야. 이미 그 사람도 나에게 그렇게 말했는데 내가 들이민 거잖아. 그러니 걱정하지 마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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