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2화 〉 562화 과거와 미래
* * *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긴... 너 보러 오는데 꼭 무슨 일이 있어야 하는 거야?}
{그렇긴 하네.}
초등학생 때 같은 반이 되고 괴롭힘을 당하는 혜리를 도와준 후부터 둘은 아주 가까운 친구사이가 되었다.
현호에게 진짜 같은 나이대의 소꿉친구라고 한다면 혜리만한 아이는 없을 것이었다.
그 정도로 두 사람은 지금까지도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지만 여전히 좋은 친구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이렇게 보려고 찾아온 것도 이상하게 생각 할 일은 아니었다.
{주말만 되면 이렇게 바엣 술 먹지 말고 여행도 하고 여가생활도 즐기고 하면 좋잖아. 왜 계속 이렇게 바에서 술만 마셔?}
{이것도 여가생활이야.}
{바에서 혼자 청승 떨며 술 마시는 게?}
{청승이라니... 말이 심하네.}
쓴웃음을 지은 현호가 다시 잔을 들었다.
이미 술기운이 올랐는지 눈 주변에 붉은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그렇게 얼음이 띄어져 있는 잔을 단 번에 비워버린 현호가 위스키 병을 들어 다시 잔에 따르려고 할 때 혜리가 손을 뻗어 병을 빼앗아 버렸다.
{그만 마셔.}
그러자 현호가 미간을 찡그렸다.
{이게 무슨 짓이야?}
눈살을 찌푸린 현호가 다시 병을 가져가려고 팔을 뻗었지만 혜리는 주지 않겠다는 듯 테이블 밑으로 내려놓았다.
{언제까지 그렇게 술만 마실 거야.}
{내가 언제 술만 마셨다고 그래.}
{일만 끝나면 너 하는 게 술 마시는 것 밖에 없잖아.}
{일하다보면 힘들어서 술 마실 수도 있는 거지 그게 뭐가 문제야.}
{한 두 잔 마실 수 있지만 넌 그게 아니잖아.}
혜리의 잔소리가 기분이 나빴는지 현호의 미간이 더욱더 찡그려졌다.
{빨리 넘겨.}
{싫어.}
{넘기라고.}
{싫어.}
{너 자꾸 이럴래?}
결국 현호가 참지 못하고 혜리를 향해 소리를 치고 말았다.
그 말에 혜리도 기분이 나빴는지 않고 맞받아쳤다.
{이러면 어쩔 건데.}
{귀찮게 할 거면 가.}
{가라고?}
{그래 가. 술은 먹든 말든 그건 내 마음인데 네가 왜 참견이야? 네가 내 여자 친구라도 돼?}
{그 말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 네가 내 여자 친구라도 되냐고.}
현호는 혜리가 술병을 빼앗은 게 상당히 기분이 나빴던 듯 따지듯 물었다.
술을 먹는 건 자신인데 왜 혜리가 참견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술 마시는 걸 방해하기 위해 나타난 것처럼 느껴졌다.
{친구잖아.}
{친구?}
{그래 친구. 친구니까 당연히 걱정 할 수도 있는 거지.}
{친구라도 지켜야 할선이라는 게 있는 거야. 다짜고짜 술병을 빼앗는 게 말이 돼? 저번부터 말 하려 했는데 혜리 너 나에 대한 간섭이 좀 지나친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여자 친구도 아닌데 도대체 뭐하는 행동이야. 너도 네 인생이 있을 거 아니야.}
{......}
현호는 말없이 자신을 처다 보는 혜리를 향해 다시 손을 내밀었다.
{빨리 내놔.}
{도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살래?}
{뭐?}
{도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멍청하게 살 거냐고.}
순간 현호의 눈썹이 강하게 꿈틀 거렸다.
술병을 빼앗는 것도 모자라 멍청하다는 말까지 하다니 이건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다.
{멍청하다니 너 말이 심한 거 같다?}
현호가 따지듯이 물었다.
{아니, 너 멍청한 것을 넘어 개자식이야.}
그러나 혜리는 거기서 나무랐다.
{야, 김혜리.}
{그런 다고 돌아와?}
{뭐라고?}
{그런다고 하란이가 너에게 돌아 오냐고 이 멍청한 놈아.}
{그만해라.}
{뭘 그만해. 솔직히 맞잖아. 네가 지금 이렇게 청승떨고 있는 거 다 하란이 때문에 그런 거잖아. 힘드니까. 괴로우니까 그러는 거잖아.}
그만하라는 현호의 말에 발끈한 혜리가 비수를 꼽듯 현호에게 차가운 말을 쏘아 붙였다.
{나 진짜 화낸다.}
{화나면 왜? 뺨이라도 때리려고?}
{야, 김혜리!}
순간 주변의 사람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로 모여들었다.
목청을 높이며 사납게 자신을 노려보는 현호의 시선이 혜리는 너무나 야속하게 느껴진 것일까.
눈가에 맑은 액체가 맺히더니 뺨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하란이 밖에 안 보여? 네 눈엔 하란이 밖에 들어오지 않냐고.}
갑자기 혜리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자 화를 내던 현호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이야.}
당황한 현호가 되물었다.
{10년도 훨씬 넘었어. 널 좋아한지.}
혜리는 자신의 두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지도 않은 채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나는... 안 되는 거야? 왜 계속 돌아오지도 않는 하란이만 두고 그렇게 마음아파는 거냐고!}
그동안 쌓았뎐 것을 호소하듯 소리쳤다.
{......}
현호는 그런 혜리를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여자 친구? 그래 나 너의 여자 친구가 아니야. 하지만... 여자 친구가 아니라고 해도 진짜 널 생각하는 친구라면 혼자서 매일 같이 청승 떨며 술 만 마시는 널 걱정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
{......}
{내가 널 걱정하는 게 그렇게 귀찮고 짜증이나? 알았어. 그러면 이제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바보 같이 계속 그렇게 오지도 않는 하란이 생각을 하면서 술만 마셔 개자식아!}
그렇게 쏘아붙이 혜리는 눈물을 훔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바를 나가버렸다.
{......}
혼자 남게 된 현호는 그렇게 한동안 말이 없었다.
혜리의 말이, 고백이 너무나 충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혜리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을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저번 주에 있었던 그 일을 잠시 떠올리면서 현호는 자신을 처다 보고 있는 하란이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전화상으로 내가 했던 말... 기억해?”
“응.”
다시 좋은 오빠와 동생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한 말.
하란이는 당연히 그 말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어떻게 잊을 수가 있을까.
“그 말 사실이야.”
여기, 이 자리까지 오기까지 현호는 많은 생각과 고심이 있었다.
하란이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정말로 다시 좋은 오빠와 동생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정말로 그럴 수 있을지.
솔직히 말해 현호는 그에 대해서 자신감이 없었다.
하란이에 대한 마음을 포기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지만 그러기 힘들 거라는 걸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고민과 생각, 그리고 괴로움을 느껴야만 했다. 하지만 결국에 현호는 이 자리에 나오게 되었다.
바에서 혜리가 자신에게 했던 그 말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런다고 하란이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거 현호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하기엔 하란이에 대한 마음이 너무 컸다.
그런 많은 생각과 고뇌가 현호를 괴롭혔다.
하지만 결국 현호는 오늘 이 자리에 하란이를 부르게 되었다.
반년이 더 시간이 지난 지금 현호는 마지막으로 하란이의 마음을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현호는 알 수 있었다.
하란이의 마음속에 자신이 들어갈 자리가 없음을 말이다.
“다시 너와 예전처럼 좋은 오빠 동생으로 돌아갔으면 해서 이 자리에 부르게 된 거야.”
현호는 솔직히 말했다.
“오빠...”
미안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하란이의 시선에 현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바라보지 마. 그러면 내가 처량해 지는 것 같잖아.”
쉽게 잊지 못한다는 것을 하란이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오랫동안 첫사랑이었던 현호를 생각하고 가슴앓이를 했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만석이 없었다면 하란이는 어쩌면 아직도 현호에 대한 사랑이 남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랬을 것이다.
이 자리에 나오면서 현호가 정말로 전화상에서 했던 말 그대로 다시 좋은 오빠 동생으로 돌아가는 것에 그대로 믿기가 힘들었다.
현호도 자신처럼 오랫동안 좋아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랬다. 지나와 헤어진 것도 그 때문이라는 것도 안다. 그래서 지금 현호에게 막상 저 말을 들으니 미안한 마음을 느꼈다.
“내 말 믿기 힘들다는 거 알아. 지금 네 표정 보면 그래.”
“......”
“하지만 정말이야. 이런 서먹하고 어색한 사이, 더 이상 이어가고 싶지도 않고 짐이 되고 싶지도 않아.”
“미안해 오빠.”
“그런 말 하지 말라니까.”
어느새 현호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지워지고 밝은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서민준 그 친구 잘 나가더라. 이집트에서 하는 사업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다며? 그리고 나도 알고 있어 국내에서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위치에 올라가 있는지도.”
“......”
“직업을 떠나서 정말로 대단한 녀석이야. 안 그래?”
“......”
“어라? 왜 대답이 없어? 나 진짜로 그 녀석 칭찬하는 건데.”
이젠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하는 현호였지만 하란이는 오히려 그 모습이 더 슬퍼보였다.
하지만 아까처럼 하란이는 그런 얘기는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오빠 말이 맞아.”
현호처럼 하란이도 그렇게 웃었다.
여기서 또다시 안쓰러운 표정을 짓거나 그와 비슷한 얘기를 했다간 정말로 크게 상처를 주는 것 밖에는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 사람 진짜 대단해.”
그래서 더 이상 슬픈 표정이 아닌 현호처럼 따라 웃어주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