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1화 〉 301화 희생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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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시간에 맞춰 회사를 나선 민우는 자신이 타고 다니는 검은색 벤츠s클래스를 끌고 도로를 달렸다.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평일 퇴근시간대라 그런지 도로엔 수많은 차량들로 부쩍이고 있었다.
그렇게 이십 여분이 다되어 갈 때쯤 민우는 논현동에 자리한 룸살롱에 도착 할 수가 있었다.
전에 한번 와본 곳으로 대충 지리가 어딘 줄은 알고 있어 찾아 올 수 있었던 것이다.
평일 저녁이라고 하지만 역시나 3층 건물의 인기 많은 룸살롱답게 사람들이 부쩍 이고, 외제 차들도 눈에 띄었다.
도시의 생활은 낮보다 밤이 화려하다고 날이 어두워지니 휘황찬란한 네온사인과 불빛, 그리고 호객행위와 사람들로 인해 활기를 더하고 있었다.
민우는 저번처럼 뒤편으로 돌아서 갔는데 역시나 그때처럼 정갈한 차림의 사내들이 대기를 하고 있었다.
차를 멈추고 내려선 민우가 앞서 대기하고 있던 이에게 열쇠를 건네주니 정중하게 받아들고는 문을 열어 주었다.
안으로 들어간 민우가 직원들이 이용하는 계단을 이용해 3층으로 올라가니, 대기하고 있던 웨이터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안 쪽의 특실로 안내해주었다.
물론 저번에 갔을 때처럼 길게 테이블이 늘어서 있는 넓은 룸의 공간은 아니었다.
조심스럽게 노크를 하고 문을 열어주자 민우가 넥타이를 바로 맨 후에 안으로 들어갔다.
“왔나.”
테이블엔 이미 과일안주들과 양주들이 세팅이 되어 있었다.
소파엔 한 명의 사내가 편하게 앉아 잔을 기울이며 이쪽을 바라보았다.
“미리 세팅을 해놓은 건가?”
“그런 셈이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이만석을 바라보던 민우가 걸음을 옮겼다.
그사이 안내를 해주었던 웨이터가 정중하게 인사를 올린 후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돈에 신경 쓰지 말고 먹어. 더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너 정도면 신경을 쓰지 않겠지만 말이야.”
민우의 집안을 생각하면 이정도의 안주와 양주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제일가는 기업의 오너가의 자식인데 이정도로 쩔쩔매겠는가.
역시나 민우도 그에 관해선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지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조니워커의 병을 딴 이만석이 민우의 앞에 잔을 놔주곤 따라주었다.
그리곤 다시 한 쪽 테이블에 올려두고는 품에서 담배를 꺼내 한 개비를 입에 물고는 하란이에게 선물 받은 지퍼 라이터로 불을 붙여 깊이 한 모금 빨았다.
“후우”
코와 입을 통해 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와 룸의 천장으로 퍼져 올라갔다.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던 민우가 낮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날 보자고 한 이유가 뭐냐.”
갑자기 이만석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은 민우는 속으로 조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게서 설마하니 전화가 걸려올 줄은 생각지 못 했기 때문이었다.
“다 들었다.”
“뭘 들었다는 말이야?”
“또 무릎을 꿇었다며.”
“......”
이만석의 말에 순간 민우가 침묵을 지켰다.
그러는 사이 이만석은 다시 한 모금 폐 깊숙이 빨고는 재떨이에 타들어간 심지를 털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지나가 알려주었어?”
“맞아. 무슨 생각이지 당신... 날 증오하고 있을 텐데.”
자신을 찾아와서도 그렇고, 이번에도 다시 무릎을 꿇었다는 말에 솔직히 이만석은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지나가 그렇게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던 것도 자신을 만나면서 촉발이 된 것이었으니 좋게 볼 수는 없는 처지 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시 자신과 지나를 만나게 해주려는 그의 행동을 이해 할 수가 없었다.
물론 동생 때문에 그렇다고 말은 했지만 아직까지 이만석은 그걸 믿지 않고 있었다.
“이미 전에 말했어.”
“지나가 여동생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 물어본 게 아니야.”
“뭘 알고 싶은 거지?”
“너 정도면 알고 있을 텐데... 내가 지금 누구와 만나고 있을지에 대해서. 모른다고 하지 마라. 네 아버지인 정석환 회장님도 그에 대해서 알고 있었으니까.”
자신에 대해서 마음먹고 조사를 한 다면 민우정도면 알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
아버지인 정석환 회장이 움직일 수 있는 정보력이라면 그라고 움직이지 못 할 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하란이라는 여자에 대해서 말하는 거냐.”
“그래.”
대답을 하는 이만석을 보며 민우의 표정이 굳어졌다.
“알고 있다고 해서 달라질게 무엇이 있지?”
“......”
계속 얘기해 바라는 듯 말없이 담배를 피고 있는 이만석을 향해 민우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너에게 여자 친구가 있으니까 지나에게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해서 들었을 것 같으면 진작에 말을 해보았을 거야. 그리고 중요한 것은 지나또한 네가 누구와 만나고 있는지 이미 알고 있을 텐데?”
지나도 바보가 아니었으니 자신이 관심을 가지는 남자에 대해서 알아보았을 게 분명하다.
사랑을 할 정도면 그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고 싶고 관심이 가는 것이 여자의 마음인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사람을 시켜 알아보는 것도 어려운 일도 아니었으니, 이만석이 누구와 만나고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고 보았다.
“알고 있지.”
역시나 이만석은 민우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궁금한 거야. 내가 여자 친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지나씨에게 그런 일까지 겪었는데 이렇게 밀어주는 이유에 대해서 말이다.”
이만석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민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넌 뭔가 의심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 생각은 틀렸어.”
“뭐가 틀렸다는 말이지.”
심지가 다 타들어가고 남은 꽁초를 재떨이에 비벼 끈 이만석이 민우를 바라보았다.
“내가 다른 의도를 숨기고 이런 행동을 하고 있다고 보고 있잖아 지금.”
“그럼 아니라는 소린가.”
“그걸 말이라고 해?”
순간 이만석의 입가에 쓴웃음이 지어졌다.
“내가 알기로 오너가의 사람들은 대중들에게 보여 지는 이미지에 민감하고 체면을 중시한다는 걸 알고 있다. 거기다 정략결혼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런 상황에서 여동생 하나만 보고 장차 대기업의 오너가 될지 모르는 네가 그런다는 게 와 닿지가 않아.”
“보통은 너를 포함해 사람들이 그렇게 볼 줄도 모르지. 그리고 사실 틀린 말도 아니다. 기업을 이끄는데 오너와 그 일가에 대한 대중들의 이미지도 영향을 많이 끼치니까. 정략결혼 또한 상황과 뜻이 맞으면 이루지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야. 하지만 다 그렇냐고 물어본다면 그렇지도 않아.”
정략결혼을 통해서 저변을 넓히고 영향력을 키워 좀 더 인맥을 이용하여 튼튼히 할 수는 있었다.
지나또한 민호와 만남을 가졌을 때 양가에서 밀어주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약혼식을 깨버린 것에 대해서 양가집안에서 당연히 좋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렇겠지. 결혼을 한다고 다 정략결혼으로 하지는 않을 테니까.”
이만석에 그에 대해선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사람인데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게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사랑하게 되고 결혼까지 하게 될 수도 있는 법이다.
“내가 그런 것은 온전히 지나를 위해서였어. 그만큼 지나는 나에게 소중한 여동생이니까.”
“소중한 여동생이라...”
작게 중얼거리는 이만석의 말에 민우가 따라져 있는 잔을 들어 술을 한 모금 마셨다.
“넌 모른다. 지나가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내가 얼마나 기뻐했었는지.”
누구보다 기뻐하고 폴짝거리며 뛰어다녔던 게 그 당시 어린소년이었던 민우였다.
꼬물거리는 아기가 너무 신기했고 그게 자신의 여동생이라는 것이 참으로 놀라워했다.
무엇보다 이제 집아 가면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고 설레이기도 했었다.
어렸던 민우는 지나를 외로움을 타는 자신에게 하늘에서 내려준 선물이라 생각했었다.
그렇게 커가고 지나가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처음으로 오빠라는 말을 들은 민우는 가슴이 벅차올라 눈물까지 흘렸었다.
물론 그건 비밀로 누구에게도 말을 해준 적은 없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더욱더 말려야 하지 않나. 어쨌든 결과를 보자면 나를 만나서 일어난 일이었으니까.”
그렇게 아끼는 동생이라면 그렇게 저지 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무릎을 꿇었다는 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게 아끼는 여동생을 다시 그남자에게 보내고 싶은 오빠가 있을까.
거기다 여자친구가 있는 남자에게.
“처음 보았어.”
“처음?”
“지나가... 그렇게 슬픈 눈을 하고 있는 모습을.”
지나가 깨어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 민우는 상당히 기뻐했다.
자신의 곁에서 여동생을 빼앗아 가지 않아 너무나 감사한 마음을 가졌었다.
하지만 그렇게 깨어난 지나를 보고도 민우는 가슴을 아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애 본적도 없는 슬픈 눈을 하고 있는 지나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내가 다시 기운을 차리게 해주고 싶었다. 유머를 통해 그렇게 해줄 수 있다면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도 그렇게 해줄 수 있어.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 깨닫게 되었지. 난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우울증에 걸린 사람처럼 분위기가 침울했다.
거기다 이만석에 대한 얘기만 나오면 눈 주변이 촉촉해져 들어갔다.
그가 없으면 안 된다고, 어떡해야 하냐며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던 그때, 민우는 깨달을 수 있었다.
지나를, 여동생을 다시 웃을 수 있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이만석 뿐이라는 걸 말이다.
“지금 어머니와 사이가 좀 어색해지긴 했지만 그 얘는 다시 내 농담에도 웃을 수 있게 되었어.”
“그게 이유란 말인가.”
“그래... 넌 이해하지 못 하겠지만.”
남아있는 술을 전부 비워버린 민우가 입가에 묻은 것을 손등으로 닦아 내고는 이만석을 노려보았다.
“책임진다고 한 말... 정말이겠지?”
“물론.”
“만약 지나가 너 때문에 다시 눈물을 흘리게 되는 날이 오면... 그땐 진짜 용서하지 않아.”
순간 이만석의 입가에 작은 웃음이 지어졌다.
“용서하지 않는다는 말은 지금은 날 용서했다는 말이로군.”
“용서하지 않았어!”
이만석의 말에 순간 민우가 발끈하며 말했다.
“그럼 진짜 용서하지 않는다는 말은 무슨 뜻이지?”
“그건 그땐 진짜로 용서하지 않는다는 말로 한 거다.”
“이번엔 넘어간다는 소린가.”
“......”
민우에게서 말이 들려오지 않자 이만석이 다시금 피식 웃음을 지었다.
“너도 참 웃기는 놈이군.”
“그런데 왜 계속 나에게 반말을 하는 거냐.”
“불만인가.”
“당연하지. 누가 봐도 내가 너보다 형이니까. 그리고 네가 만나는 지나는 내 여동생이야.”
“넌 모르겠지만 나도 적은 나이는 아니다.”
“그래보았자 중반이겠지!”
민우의 외침에 이만석은 웃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