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2화 〉 282화 그가 전한 말
* * *
이런 행동은 이만석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설마하니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자가 이런 행동 자체를 할 거라고 정말로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세진그룹의 정석환 회장의 장남이라 생각하면 도저히 생각 할 수 없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정석환 회장의 아들에다 전무면 자존심이 상당 할 텐데 무릎을 꿇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마음을 먹어야 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게 지금 뭐하는 행동이지?”
이런 행동은 이만석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분이고 별로 보기도 좋지가 않다.
“이건 내가 아닌 지나의 오빠로써 너에게 부탁하는 거야.”
“......”
“술 한잔 했다고 홧김에 하는 행동이 아니야. 내가 지금 어떤 마음으로 네 앞에서 무릎을 꿇었는지 넌 알지 못 할 거다. 지나를 저렇게 만든 너에게 무릎을 꿇는 다는 것 자체가 어떤 마음인지 알 수 없을 거야. 하지만 알량한 자존심 보다는 지나를 웃게 만들어 줄 수 있다면 오빠로써 다 해주고 싶은 심정이다.”
술을 먹어서 그런 것일까.
민우의 두 눈은 돋아난 혈관으로 인해 붉게 충혈 되어 있었다.
그런 그를 내려다보는 이만석의 찌푸려졌던 표정이 서서히 사라지고 다시 무표정하게 변했다.
“돌아가라.”
그렇게 말을 한 이만석은 그대로 몸을 돌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만석이 안으로 들어가고 난 후로도 민우는 한 동안 그 자리를 뜨지 않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이만석을 보고 차이링과 하란은 또다시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이는 모습에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들어가서 자도록 해.”
이말 한 마디만 남기고 안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그의 모습에 두 사람은 마음이 뒤숭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얘기가 오갔기에 또 저런 모습을 보이는 거야?”
그녀로써도 참으로 난처하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였다.
‘오빠...’
걱정이 가득한 시선으로 하란이 이만석이 들어간 안 방문을 응시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침대에 눈을 감고 누워 있던 이만석은 밖에서 들려오는 노크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잠시후 조심스럽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더니 하란이가 조용히 안방으로 들어왔다.
“잠들었어?”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거는 하란이의 목소리에 이만석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안 잤구나?”
웃음을 지은 하란이 조심스럽게 문을 닫더니 이만석의 곁으로 다가갔다.
“안자고 뭐했어.”
“오빠하고 얘기 좀 하고 싶어서.”
침대에 걸터앉은 하란이 가만히 이만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 언니한테 다 들었어.”
“그래?”
“놀라지 않는 걸 보니 오빠도 예상하고 있었나보네?”
“어.”
“지금 오빠가 무엇 때문에 걱정하는지 다는 알 수는 없어.”
조심스럽게 하란이가 이만석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 사람, 지나라는 여자의 오빠라는 사람과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 말 해 줄 수 있어?”
아무 말 하지 않는 이만석을 향해 하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오빠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 그래.”
그 후로 이만석이 입을 열기를 말없이 기다려 주었다.
그렇게 얼마나 침묵의 시간이 흘렀을까. 드디어 닫혀 있던 이만석의 입이 다시 열렸다.
“만나 줄 수 없겠냐고 했어. 그것도 무릎을 꿇어서까지.”
“무릎...?”
무릎을 꿇었다는 말에 하란이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이 무릎을 꿇었다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에 하란이는 다시 물어 볼 수밖에 없었다.
지나라는 그 여자의 집안이 어떤 집안이고 그녀의 오빠라는 정민우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알고 있는 상황에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정도의 사람이 무릎을 꿇었다는 게 결코 쉽게 믿을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행동 할 줄은 몰랐어.”
“그래서 오빠는 뭐라고 말했어?”
“돌아가라고 말했어.”
잠시 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그리고 왜 이만석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지 하란이는 이해 할 수가 있었다.
그 정도의 사람이 그런 행동을 하리라는 건 예상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오빠... 나 사랑해?”
“그래.”
이만석은 망설이지 않고 그렇다고 대답을 했다.
조심스럽게 이만석의 목을 휘어감은 하란이 천천히 안기었다.
“이런 걸로 나 흔들리지 않아.”
목을 끌어안고 있는 하란이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오빠가 날 떠나지 않을 거라는 거 알고 있으니까.”
하란이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난... 오빠가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때 이만석이 천천히 하란이의 허리를 강하게 안아주었다.
“사랑해 오빠.”
하란이의 두 눈엔 눈물이 맺혀져 있었다.
이만석과의 짧은 대화를 끝내고 방을 나선 하란은 문 밖에 서있는 차이링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언제... 나왔어요?”
“문이 조용히 닫힐 때.”
웃음을 지은 차이링이 하란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괜찮겠어?”
“오빠를 믿으니까요.”
눈가에 젖어 있는 눈물을 닦아낸 하란이 밝게 웃음을 짓더니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강한 아이네.”
그런 하란이를 보며 차이링은 자신에게 얘기를 한 것처럼 달라진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 계속 그렇게 식사를 굶으면 어떻게 하려고 하니?”
최여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나를 향해 말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오늘 아침도 밥을 세 숟갈 이상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깨어난 건 좋은데 이렇게 식사를 하지 않으면 몸이 상할까 또다시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그 사람 생각하는 거야?”
“......”
“도대체 그 남자가 뭐라고 네가 이러는지 이해가 가질 않는구나.”
민우와 마찬가지로 최여사 역시 자신의 딸을 이지경으로 만든 이만석에 대해서 별로 좋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사람을 시켜서 똑같이 복수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지나의 부탁으로 인해 이만석에 대해서 별다른 행동을 가하지도 않았다.
세진그룹의 안주인으로써 마음만 먹으면 어떤 보복도 가할 능력이 충분한대도 말이다.
거기다 남편의 말도 무시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답답하기만 할 뿐인 최여사 였다.
“미안해, 엄마... 나 때문에.”
“미안하면 이거 먹고 빨리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지.”
“입맛이 없어서 그래.”
“너 이러다 영양실조로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래?”
하루에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상황에서 딸의 이런 모습을 보니 속이 많이 상했다.
“네가 이런다고 해결되는 일이 없어.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꿋꿋하게 살아가야지.”
작게 한 숨을 내쉰 최여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똑똑!
그때 병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최여사의 얼굴이 그쪽으로 향했다.
“누구지?”
지금시간이면 올 사람도 없을 텐데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약된 손님이 아니면 길목을 지키고 있는 경호원들이 제지를 할 텐데 의아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들어와요!”
그래도 일단 경호원들이 재지를 하지 않았다면 봐두는 게 좋을 것 같아 언성을 높여 들어오라 크게 말하니 잠시 후 문의 손잡이가 돌아가며 천천히 열렸다.
“세, 세상에...”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인영을 보고 최여사는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까지도 지나는 창밖만 응시하고 있었는데 어머니의 놀라는 모습에 천천히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았다.
순간 지나의 눈동자가 크게 떨리며 흔들렸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다가온 이만석이 지나의 어머니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어, 어떻게 들어왔죠?”
경호원들이 제지를 뚫고 들어온 것을 말한 것이었다.
“잠을 좀 재워놨습니다.”
“뭐, 뭐라구요?”
당황한 음성으로 말하는 최여사를 향해 이만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잠시만 얘기 할 시간 좀 주시겠습니까.”
“지금 무슨 말을...”
“엄마.”
그때 지나가 최여사를 조용히 불렀다.
“그렇게 해줘...”
잠시 딸의 얼굴을 바라보던 최여사가 이만석을 경계의 빛으로 다시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 생기면 알아서 해요.”
“금방 끝내겠습니다.”
잠시 동안 그렇게 이만석을 경계의 눈빛으로 노려보던 최여사가 걸음을 옮겨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단 두 사람이 남게 되었을 때 이만석은 고개를 돌려 지나를 바라보았다.
단 며칠 사이에 볼 살이 들어가고 만이 여윈 것 같은 모습이었다.
기운도 하나도 없어 보이고 고운 머릿결도 푸석해 보였다.
“민준씨...”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이만석을 지나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그녀의 눈동자는 슬픔으로 물들어 있었고 미안한 빛이 다분해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깊은 애정이 엿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왜 그런 행동을 했습니까.”
조심스럽게 자신을 부른 지나에게 이만석의 첫 마디는 냉정했다.
따뜻한 위로의 말이 아닌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한 지나를 나무라는 말이었던 것이다.
“나를 죄책감으로 잡아두려 그런 것이었습니까.”
이만석의 목소리는 차가웠고 일정했다.
지나에게 이만석의 이런 모습은 상당히 가슴이 아플 만도 하건만 그녀는 슬픈 눈을 하고서도 웃음을 지었다.
“미안해요 민준씨.”
지나가 닫혀 있던 입을 열며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민준씨의 마음에 내가 남을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어요.”
“미련한 행동입니다.”
“알아요...”
잠시 동안 이만석의 얼굴을 바라보던 지나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어요.”
그때 지나의 두 눈이 촉촉하게 젖어들더니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정말 민준씨가 맞나요...?”
이만석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지나는 떨리는 음성으로 그렇게 말했다.
“내 앞에 서있는 당신이 정말로 꿈은 아닌 거죠?”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지나의 말에 이만석은 대답 없이 바라만 볼 뿐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