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1화 〉 271화 하란이의 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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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럽게 찾아온 것에 조금 당황했다.
이만석에게 둘이서 얘기를 하게 해 달라는 하란이의 부탁에 슬쩍 자신을 바라보는 이만석을 보고 차이링도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자리를 비켜주기 위해 안방으로 들어간 사이 둘만이 남게 되었을 때, 차이링은 이 꼬마아가씨가 어떻게 나올지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당황한 건 당황 한 거고 일은 벌어졌으니, 평소대로 대화를 나누면 되는 것이다.
이미 하란이와 만나게 될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만큼 어렵게 생각 할 것 없이 지금 상황을 받아드리면 되었다.
그렇게 자리를 권하고 대화를 나누다 보니 은근히 귀여운 맛도 있었다.
아직 나이가 어려 꾸며서 나오는 풋풋함이 아니라 그 자체의 싱그러움을 그대로 품고 있었다.
거기다 놀란 것을 그대로 다 숨기지 못 하고 드러내는 모습이 세상의 때가 덜 묻어 순수함이 엿보이는 것 같아 더 그러했다.
그래서 슬쩍 떠보기로 하고 하란이의 질문에 이렇게 말을 한 것인데 돌아오는 대답은 생각 했던 것 이상의 당돌함이었다.
“여자 친구?”
하지만 차이링은 하란이와 다르게 당혹스러움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 정도의 속내를 숨기는 것은 그녀에게 어렵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반문을 하며 웃음을 짓는 차이링에게 하란이 다시 입을 열었다.
“맞아요. 지금 오빠와 얼마나 가까운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가 뭐라 해도 여자 친구는 저라는 말이에요.”
“흐응~!”
톡 쏘는 하란이의 말을 듣고도 차이링은 흥미롭다는 콧소리를 내며 바라보았다.
“그렇지~ 네 말이 맞아. 난 그이의 여자 친구가 아니야. 엄밀히 따지자면 파트너의 관계지.”
순순히 인정하는 차이링의 말에 하란이는 의미심장한 기분을 느꼈다.
이런 자신의 도발에 당황 할 법도 하건만, 전혀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고 반대로 다시 웃음을 짓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영원한 건 아니란다.”
“뭐라고요?”
“언제든지 상황은 변 할 수 있다는 말이야. 혹시 아니?”
말을 하다말고 차이링이 자신의 왼손을 들어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얼마 안 있어 이 손가락에 반지가 끼워질지.”
그 반지가 무엇을 말함인지 당연히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상황이다.
말 없니 노려보는 하란이의 시선을 차이링도 지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두 사람의 신경전이 계속될 것처럼 흘러가는 가운데, 닫혀 있던 입을 먼저 연 것은 하란이었다.
“그 말은 오빠를 포기 하지 않겠다는 말이군요?”
“난 그이를 한 시도 내 마음에서 품어보지 않은 날이 없단다...”
그녀의 당당한 모습에 기분이 좋지 않아 살짝 입술을 깨문 하란이 천천히 한 숨을 고르며 마음을 가라앉힌 후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요... 그 정도 대답은 예상 못 할 것도 아니죠.”
이 차이링이라는 여자가 이만석을 쉽게 포기 할 것이라 생각지 않았던 하란이어서 다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 참이죠.”
“그 질문은 좀 황당하네?”
“황당하다니요?”
“여긴 그이의 집이기도 하지만 내 집이기도 하거든.”
“당신 집이라고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차이링의 모습에 하란은 할 말을 잃었다.
‘무슨 여자가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지?’
이건 생각지도 못 한 말이라 하란이는 기가 차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가 자기 집이기도 하다니, 어떻게 눈앞에 여자 친구인 자신을 두고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내 말이 기가 찬 모양인데... 거짓말 아니야. 정말로 여긴 내 집이기도 해.”
그렇게 말한 차이링이 나긋한 음성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이와 함께 장만한 보금자리 거든. 못 믿겠으면 확인해 보든가.”
차이링의 태도에 뭐라 입을 열지 못 하고 기가 차다는 듯 바라보던 하란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요. 확인해 볼게요.”
그러더니 곧장 이만석이 있는 안방으로 향했다.
걸음을 옮겨 안방으로 향하는 하란이를 보면서 차이링이 쓴웃음을 지었다.
“후우~!”
담배를 하나 물고 피우고 있던 이만석의 얼굴이 문 밖으로 슬쩍 향했다.
두 사람이 무슨 얘기를 나눌지 대충 예상은 가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이런 일이 벌어지리라는 걸 알았다.
하란이가 차이링과 먼저 대화를 하고 싶다고 해서 자리를 비켜 주었지만, 제일 먼저 풀어야 할 건 역시 자신하고의 관계일 것이었다.
벌컥!
그때 문 손 잡이가 돌아가며 닫혀 있던 안방 문이 열렸다.
이미 이쪽으로 걸어오는 인기척을 느끼고 있었던 이만석 인지라 크게 놀라거나 하진 않았다.
피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문을 닫고 가까이 다가오는 하란이를 바라보았다.
“얘기는 다 했어?”
“아니.”
딱 잘라 말하는 하란이 바로 질문을 던졌다.
“저 여자가 한 말이 사실인지 물어보러 왔어.”
“어떤 걸.”
“이 집이 정말로 저 여자의 집이기도 해?”
“......”
“오빠의 집일뿐만이 아니라 저 여자의 집이야?”
처음 침묵을 지켰던 이만석은 다시 질문을 던지는 말에 순순히 대답했다.
“그래.”
“뭐?”
“네 말이 맞아.”
설마 했는데 정말일 줄은 몰랐던 하란이는 순간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여자 친구를 놔두고 다른 여자와 함께 한 집에서 살고 있다니, 이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잠시 방안을 둘러보던 하란이 걸음을 옮겨 옷장 문을 열었다.
그리고 드러나는 차이링의 옷가지의 모습에 다시 기가 차다는 듯 바라보았다.
‘된 통 깨지게 생겼군.’
마음을 굳게 먹고 왔어도 이 모습을 보고 넘어갈 연인은 없었다.
당연히 다시금 큰 폭풍이 휘몰아 칠 것을 생각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잠시 동안 서서 옷장을 바라보던 하란이 다시 닫고는 몸을 돌려 이만석을 바라보았다.
“오빠 참 대단하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
“여자 친구인 나를 두고 어떻게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릴 수가 있어.”
“......”
아무 말 없는 이만석을 바라보던 하란이 걸음을 옮겨 이만석에게 다가갔다.
“나에게 할 말 없어?”
“미안하다.”
“정말로?”
“그래.”
짧은 대화 뒤에 잠시 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이만석도 그렇고 하란이 또한 말이 없었던 것이다.
“오빠.”
그렇게 계속해서 흐를 것 같던 침묵이 이만석을 찾는 하란이의 말을 통해서 깨어졌다.
“저 여자... 사랑해?”
“......”
“말 해줘. 저 여자 사랑해?”
“그래, 사랑해.”
순간 울컥했던 하란이었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나보다... 사랑해?”
“......”
“말 해봐. 나보다 더 사랑해?”
“그건 아니야.”
잠시 동안 이만석을 내려다보던 하란이 침대에 앉아 있는 그의 머리를 감싸 품에 안았다.
“그럼 됐어.”
생각지도 못 한 말을 내 뱉은 하란이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해서 말했다.
“오빠가 나를 더 사랑하고 여자 친구로 생각하고 있다면 그걸로 됐어.”
얼마 동안 그렇게 머리를 감싸 안고 있던 하란이 다시 풀어 주었을 때 이만석이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네 말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야. 어떤 여자가 오빠에게 다가와도, 결국엔 여자 친구는 나고, 오빠가 내 남자라는 소리야.”
“......”
그러고는 웃음을 지으며 바라본 하란이 몸을 돌려 다시 밖으로 나갔다.
잠시 동안 이만석은 문을 열고 나가버린 그곳을 무표정 하게 바라보았다.
다시 마주보고 앉은 하란이를 보고 차이링의 내심 안에서 무슨 대화가 오고 갔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바라보았다.
“대화는 잘 끝났어?”
고개를 끄덕인 하란이 똑바로 차이링의 두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물을게요.”
“얼마든지.”
말 해보라는 듯 말하는 그녀를 향해 하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집을 나갈 생각이 정말 없어요?”
“갈 곳이 없단다.”
당연한 말은 하는 게 아니라는 언사를 내뱉는 차이링을 말없이 잠시 바라보던 하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좋다니?”
“이 곳에 오빠와 당신, 단 두 사람만 있게 놔 둘 수 없죠.”
“뭐?”
“당신이 끝까지 오빠 옆에 있겠다면, 나도 그렇게 하겠어요.”
“그게 무슨 말이니?”
순간 불안감을 느낀 차이링이 그렇게 물음을 던지자 하란이 당당히 자신의 속마음을 말했다.
“나도 이제부터 여기서 지낼 거예요.”
차이링의 불안감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이게 무슨 꼴이람...”
작게 한 숨을 내쉰 차이링이 눈을 깜빡이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고요한 침묵이 감돌고 깜깜한 방안엔 아무런 가구조차 비치되어 있지 않았다.
등 또한 푹신한 침대가 아니라 달랑 자리 하나에 베개, 그리고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다.
고개를 돌린 차이링을 주변을 둘러보았다.
보이는 거라곤 평평한 벽과 어둠뿐이었다.
잠시 동안 눈을 깜박이며 천장을 올려다보던 차이링이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 버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아...”
그리곤 땅이 꺼져라 한 숨을 내쉰 그녀가 고개를 돌려 자리를 바라보다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졸지에 쫓겨나 버렸네.’
원래라면 이만석과 함께 안 방 에서 언제나처럼 나란히 누워 있어야 하겠지만, 지금은 이렇게 다른 방에 자리를 깔고 잠을 자는 신세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답답한 마음에 작게 한 숨을 내쉰 차이링이 하란이와 나누었던 얘기를 떠올렸다.
{여기서 같이 살겠다고?}
{네, 맞아요. 이곳에 오빠하고 단 둘이만 놔 둘 수 없잖아요?}
{네 부모님이 허락할까?}
{허락 할 거예요.}
{불편하지 않겠니?}
{전혀요.}
지지 않고 딱 잘라 말하는 그녀의 대답에 차이링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오늘부터 오빠와 계속해서 안방에 자면 안 돼요.}
{네가 같이 자겠다는 말이야?}
고개를 가로저은 하란이 다시 입을 열었다.
{방 많으니까, 저도 그 중에 하나를 쓸 거예요. 안방은 오빠 혼자서 쓰는 거죠.}
설마 자신을 내 쫓고 안방을 차지하겠다는 건가 싶어 가슴이 철렁했던 차이링이 그나마 안도의 한 숨을 내쉬려는 그때 하란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동안 오빠와 무수히 밤을 지새웠을 테니 오늘은 내가 안방에서 오빠와 잘 거예요.}
{......}
{설마 뻔뻔하게 그러지 말라고 하진 않겠죠? 그리고 난 여자 친구이니까 당연히 그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맞는 말이었으니 뭐라 말하지 못 했다.
그게 결국 이런 결과를 만들어 내고 말았던 것이다.
지금 안방에 하란이와 아민석 두 사람만 있다고 생각되니 질투가 났다.
그래서 생각지 않으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는 게 가슴을 더욱더 답답하게 만들었다.
차이링이 그렇게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동안 안 방에서 하란은 상기된 얼굴로 이만석의 위에 올라타 아래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란아.”
“쉿.”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이만석의 입술을 검지로 막았다.
그러면서 다시 천천히 이만석의 입을 맞추며 그 속으로 자신의 혀를 밀어 넣었다.
서로의 혀가 뱀처럼 얽히며 한 동안 끈적하게 키스를 이어가던 하란이 천천히 입을 때어내고는 뜨거운 숨소리를 내뱉으며 속삭이듯 말 했다.
“오늘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줘 오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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