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9화 〉 269화 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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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에 앉아 벽에 등을 기대어 앉아 있는 하란이의 얼굴은 상당히 어두웠다.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내고 안 울려고 하지만 생각처럼 따라주질 않는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저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을 뿐이다.
‘오빠...’
처음으로 가는 그의 집이어서 얼마나 두근거렸는지 모른다.
오피스텔에 살았을 때도 가보질 못 했고 이사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새해를 맞아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깜짝 놀래켜 주려고 집들이 겸 간 것이었는데, 거기서 다른 여자를 보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 한 일이었다.
‘그 여자 때문이었던 걸까.’
이만석이 자신을 집으로 데려가지 않았던 것이 그 여자 때문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그건 아닐거야.’
하지만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자신이 더 초라해지고 서글퍼 질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하란은 그에 대한 생각을 부정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마음에서 느껴지는 아픔과 배신감은 사리지는 것이 아니었다.
다 말해 준다던 이만석의 말과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 여자를 보면 확실히 보통 사이는 아닌 것 같았다.
순간 그 장면을 다시 생각하니 울컥 하는 마음과 함께 눈앞이 또다시 흐릿해졌다.
서둘러 손으로 닦아보지만 눈가에서 흘러내리기 시작한 눈물은 쉽게 멈출 줄을 몰랐다.
똑똑!
그때 문 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또다시 아주머니가 다시 올라온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아까 전에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식사를 굶으면 몸 상한다며 말을 했었던 것이다.
그러다 조용해 졌는데 아무래도 다시 올라온 듯 했다.
“하란아.”
하지만 들려온 목소리는 예상 밖에도 아버지였다.
“너하고 얘기 좀 나누고 싶어서 왔는데 문 좀 열어 줄 수 있겠느냐.”
들려오는 아버지의 말에 하란이 낮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은 혼자 있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고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다시금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왔다.
“네가 문을 열어서 마주하는 게 힘들다면... 여기서 얘기를 꺼내마.”
조용해 졌기에 내려 간줄 알았던 하란은 문 밖에서 들려오는 작은 목소리에 놀랄 만도 하건만 그런 것은 전혀 없었다.
“네가 지금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아모래도 서민준 그 친구 때문이겠지?”
물음을 던졌지만 하란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가 그건 상관하지 않는 듯 계속해서 말이 이어졌다.
“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네가 그런 모습을 보일 정도면 작은 일이라고는 생각되질 않는구나. 전에 아버지가 너에게 했던 말 기억하느냐?”
안에선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지만 윤정호 의원은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그 친구에 대해서 알게 되었을 때 사귀는 것엔 걱정이 되었다는 거 말이다. 그 친구는 하란이 너하고 사는 세계가 다르다는 말. 결국엔 사귀게 되면 네가 상처를 받거나 힘들어질 수도 있다고 말했었다. 지금 네 이런 모습이 벌어질 까봐 했던 말이기도 해. 하지만 하란이 넌 이 애비에게 이런 말을 했었지. 괜찮다고... 각오하고 있다고 말이다.”
윤정호 의원을 말대로 그때 하란은 이만석과 헤어지지 않겠다고 했었다.
이만석을 사랑하니까. 그러니 헤어질 수 없다고 말이다.
설사 그런 일이 벌어지더라도 강하게 마음먹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지금 네 모습을 보거라. 현실은 그만큼 다른 법이야. 아무리 각오를 했다고 마음을 먹더라도 막상 현실로 일이 벌어지면 그게 상당히 크게 다가오는 법이란다.”
작게 한 숨을 내쉰 윤정호 의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해주고 싶은 말은 네가 그 친구를 사랑한다면, 그 때문에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거라면 가슴이 아프구나. 네가 그 친구와 사귀게 허락했던 이유는 네가 너무 많이 사랑하는 것 같아서였어. 그만큼 각오를 하고 있다고 여겼어. 이런 모습을 보고 싶어서 그랬던 게 아니야.”
그렇게 말한 윤정호 의원이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덜컥.
그때 등 뒤에서 닫혀 있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걸음을 옮기던 윤정호 의원이 뒤로 돌아보자 거기엔 눈물을 닦고 서있는 하란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란아?”
“저 어떡하면 좋아요?”
방안으로 들어온 두 사람은 한 동안 말이 없었다.
의자를 가져다 침대 옆에 놓고 앉은 윤정호 의원이 벽에 기대어 앉아 있는 하란이를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직도 마르지 않는 눈물자국과 어두운 표정이 가슴을 상당히 아프게 만들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 애비에게 말해 줄 수 있겠느냐?”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 하란이를 향해 아버지인 그가 머너 입을 열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지 않으면 나도 너에게 어떻게 얘기를 꺼내야 할지 잘 모르겠구나.”
다시 잠시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기다리고 있는 윤정호 의원에게 하란이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오빠를 보러 집에 찾아갔어요...”
그렇게 시작된 얘기는 어떻게 찾아가게 된 것인지, 그리고 거기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두운 목소리로 하나하나 모두 알려주었다.
그 얘기를 전부 들은 윤정호 의원은 하란이가 말한 여자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차이링을 봤구나.’
이미 그녀가 이만석과 함께 지내고 있다는 것을 윤정호 의원은 알고 있었다.
어떻게 이만석과 함께 지내게 되었는지, 그리고 지금 차이링 그녀가 일성회에 들어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언젠간 터질 일이었지.’
차이링이 이만석과 함께 지내고 있다면 언젠간 두 사람이 만나게 될 것이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란아... 지금부터 아버지가 하는 얘기를 이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얘기를 전부 듣고 생각을 정리한 윤정호 의원이 진지한 얼굴로 하란이를 향해 말문을 열었다.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 딸아이를 향해 윤정호 의원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친구가 무슨 일을 하는지 너도 잘 알고 있지?”
“......”
“그런 쪽 일이 원래 생각한 것 이상으로 좋지가 않은 법이다. 상당히 거칠기도 하고 몸이 상하기도 하지. 거기다 그런 쪽에서 일을 하다보면 생각하는 게 개방적으로 변해. 특히 여자문제에 있어서 더 그러하지. 나쁘게 말하면 문란해진다고도 한단다.”
문란해 진다는게 어떤 걸 뜻하는지 하란이도 잘 알고 있었다.
일성회가 운영하는 주 사업이 술, 그리고 여자가 빠질 수 없는 일인데 당연한 얘기다.
“거기다 그 친구는 성격자체가 그런 쪽으로 거리길 게 없어 보였어. 그건 여자문제에 있어서도 다르지 않을 거다.”
윤정호 의원이 보기엔 이만석같은 사내는 여자 친구가 있다고 해도 다른 여자에 대해서 크게 거리감을 두거나 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바로 알았다.
그래서 하란이에게 그런 말을 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친구가 제일 많이 사랑하는 건 너일 거다. 그렇지 않느냐?”
“......”
“지금까지 그 친구와 사귀면서 어떤 마음이 들었지? 너 혼자만의 짝사랑이었더냐.”
“......”
“이건 말해주었으면 좋겠구나.”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지만 하란은 작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 생각대로 아버지도 그 친구가 널 사랑하지 않았다고 생각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네가 더 잘 알겠지만 그 친구가 널 사랑하고 있지 않다면 진작 헤어지자고 말했을 거다.”
이만석이라면 분명히 그랬을 것이라고 윤정호 의원은 생각했다.
“아버지가 너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네가 어떻게 행동하기에 따라 앞으로 서민준 그 친구와의 관계가 달라질 것 같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그 친구의 여자 친구는 너야. 아무리 다른 여자가 끼어든다고 해도 그건 달라지지 않아. 여자 친구로 옆에 두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너를 더 사랑하고 있다는 거야. 네가 정말로 그 친구를 사랑한다면. 옆에 다른 여자가 붙었다고 해서 괴로워 할 게 아니라 더 강하게 마음먹어야 된다는 걸 말해주고 싶구나.”
그때 하란이 고개를 돌려 윤정호 의원을 바라보았다.
“강하게... 말인가요?”
“그래... 강하게. 네가 그 친구를 만났을 때 이미 이런 일에 대해서 각오하고 있다고 했었지? 그 마음이 아직도 남아 있다면 이정도의 일은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네가 서민준 그 친구에게 헤어지자고 하지 않는 한 먼저 그런 얘기를 꺼내지 않을 거야. 애비가 보았을 때 그 친구는 널 많이 아끼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차이링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만석과 붙어 지냈는지 하란이는 모르겠지만, 윤정호 의원은 내막을 알고 있으니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가 보았을 때 이만석은 하란이에 대한 생각과 마음은 언제나 한결 같았고 사랑하고 있는 것을 지켜보았다.
다른 여자와 만난다고해도 하란이가 어떻게 나가냐에 따라 그 관계는 바뀔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네가 놓지를 않으면 돼. 어떤 여자가 접근을 하든... 여자 친구는 너라는 걸 보여주면 되는거야.”
생각지도 못 한 아버지의 말에 하란이는 눈물이 마르지도 않은 얼굴로 조금 놀란 듯 바라보았다.
절대 보통의 아버지라면 할 수 없는 얘기를 지금 자신에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면 상당히 화를 내게 되는 것이 보통의 아버지고 부모님이었다.
분명히 자신의 아버지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던 하란이 였지만, 정작 헤어지라는 것이 아니라 더 확고히 밀고 나가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 친구는 하란이 네가 어떻게 나가냐에 따라 달린 거다.”
그렇게 아버지와의 얘기를 끝내고 다시 혼자 남게 된 하란은 아직도 마음이 뒤숭숭했다.
‘내가 하기에 달린 거라고?’
화를 내고 헤어지라고 하기 보단 오히려 더 강하게 밀어 붙이라는 아버지의 말에 하란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전혀 틀린 말은 아니었다.
각오하고, 강하게 마음먹겠다고 생각했었다. 그가 어떤 일을 하는지에 대해서 알게 되고 아버지가 만류를 했음에도 사귀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런 자신을 만류했던 아버지가 더욱더 적극적으로 나가라고 말을 한다.
오히려 자신이 그런 모습을 보여야하고 아버지가 우려를 보여야 하는데 말이다.
그때의 상황을 보면 분명히 그렇게 했어야 했다.
‘바보같이.’
눈물을 닦아낸 하란이 자신이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이미 이런 일에 대해서 각오를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에 와서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인지 참으로 바보 같았다.
‘아버지 말이 맞아.’
언제부터 그 여자와 알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이만석이 자신에게 대하는 마음은 변 한 것이 아니었다.
이집트에서 한국에 왔을 때도 그랬고 그건 오늘 집으로 찾아가기 전까지도 의심 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그렇게 걱정되면 전화해봐.”
“걱정이라니...”
눈살을 찌푸리는 이만석을 향해 차이링이 다시 입을 열었다.
“굳어진 얼굴로 있다 내 말에 인상 조금 찌푸렸다고 숨겨지는 게 아니야.”
“......”
“받을지 안 받을지 하지 않으면 모르는 거잖아.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다고 달라지는 게 있니?”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는 차이링은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 할 정도였다.
오히려 이런 상황을 좋아해야 하는 건 자신인데 걱정을 하고 있다니 황당한 일인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람의 이런 모습은 더 이상 보기 힘들어.’
이만석의 굳어 있는 얼굴을 보는 게 차이링은 상당히 힘들었다.
복잡한 마음이 어지럽히는 가운데 탁자에 놓여 있던 폰이 진동을 일으키며 울렸다.
폰을 집어 확인해본 이만석이 조금 놀란 듯 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다.
[금방 전화 받았네?]
“하란아.”
[나... 지금 오빠 집 앞인데 마중 나올 수 있어?]
“뭐?”
[기다릴게.]
그렇게 짧은 통화를 끝내고 전화를 끊은 하란이의 통화를 두고 차이링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꼬마아가씨니?”
“어.”
대답하는 이만석의 모습에 차이링이 다시 입을 열었다.
“뭐래?”
“집 앞 이라는데.”
그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안방으로 들어가 코트를 걸치고 나오는 모습에 차이링이 놀란 얼굴로 말없이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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