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4화 〉 244화 제거
* * *
똑똑!
“들어와...”
작게 들려오는 노크소리와 함께 한 명의 인물이 안으로 들어섰다.
181정도 되어 보이는 키에 머리는 뒤로 깔끔하게 넘긴 스타일로 시원한 인상의 남자였다.
회색 정장차림의 이 남자는 30대 중반으로 보였는데 걸음을 옮겨 다가가는 모습이 자신감이 충만해 보였다.
“그래... 나에게 할 말이 있다고?”
정석환 회장이 똑바로 시선을 주며 입을 열었다.
“전에 말씀드린 대로 정리를 해서 가져 왔습니다.”
“그래?”
사내는 그러면서 자신이 들고 온 자료파일을 정석환 회장이 앉아 있는 책상의 앞에 조심스럽게 놔주었다.
파일을 펼친 정석환 회장은 자료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천천히 안에 정리 되어 있는 내용들을 읽어나갔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고령화 사회에 진입함으로써 의료비 지출은 늘어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보험 상품에 가입한다고 해도 그에 따른 질병을 다 보장 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자연스럽게 의료비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만약 그걸 우리가 조정 할 수만 있게 된다면 미래 먹을거리를 개척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의료기기를 포함한 바이오 쪽 사업은 작년 매출만 해도 오히려 제 작년 보다 70억 정도 떨어진 1900억대였어. 2000대 선이 다시 무너졌단 말이야.”
“그건 다시 만회할 수 있습니다. 반도체만큼 투자를 하고 받쳐 줄 수만 있다면 2025년 까지 연 매출 1조를 돌파 할 것이며 순이익 30%를 넘길 수 있을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잘만 풀면 내년이 바이오 투자 산업의 새로운 전환점이 될 것이라 장담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고령화 추세에 들어가 있는 만큼 해마다 의료기기며 관련된 약들과 제약회사의 성장세가 눈에 띌 정도였다.
반도체 신화에 이어 새로운 먹거리를 창출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렇게 바이오 투자 산업 쪽에 적극적으로 자신감을 내보이며 자료를 정리해서 가지고 온 것이다.
정석환 회장이 써 올렸던 반도체산업의 신화를 그 또한 자신만의 사업을 창출해 내겠다는 자신감의 표출이었다.
“한 번더 생각을 해보자는 해도 돌릴 의향은 없겠지?”
“물론입니다.”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바로 대답하는 모습에 정석환 회장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런 도전정신이 있어야 사업을 할 수 있는게지...”
그런 당당한 모습이 싫지는 않아 보이는 듯 한 말을 한 정석환 회장이 파일을 덮었다.
“알았다... 네 말대로 실무팀을 꾸려 구체적으로 전반에 대한 계획서를 검토해 일 한번 할 수 있게 방향을 한 번 조정을 해보마.”
“감사드립니다.”
이번에도 저번처럼 그저 어정쩡하게 물러나면 어쩌나 했던 것인지 사내, 아니, 정민우의 얼굴에 그제야 웃음이 지어졌다.
“또 다른 할 말은?”
입을 여는 정석환 회장의 물음에 정민우가 다시 조심스럽게 다시 말을 이었다.
“어제 지나가 집으로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지나가?”
지방 출장 때문에 밖에서 잠을 잤던 정석환 회장인지라 당연하게도 물음을 던질 수 밖에 없었다.
“일단 아버지께서 지나를 풀어주는 것 같아 보고 있기는 했지만 저번 이집트에 간 것도 그렇고, 크리스마스 때 행사에 참여 하지 않은 것도 그렇고, 어젠 말도 없이 외박을 했습니다.”
계속 말해보라는 듯 바라보는 정석환 회장을 향해 다시 말을 잇는 민우였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죄송한 말이지만 그에 대해서 따로 조금 알아본 것이 있는데 지나 얘가 만나는 남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됐습니다.”
“그래서...?”
“남자를 만나고 있다는 것만 알고 있는 상황이라 누군지는 잘 모르겠지만 현호와 약혼을 깬 것도 그 일 때문이라 생각이 듭니다.”
성격차이에다 잘 맞지 않아서 일방적인 통보를 해왔고 현호 쪽에서도 그렇게 얘기가 끝났다고 했었다.
당연히 이 얘기는 정민우 그에게도 상당히 놀라운 얘기일 수밖에 없었다.
집안대 집안의 만남이 작은 일도 아니고 명색이 약혼식 까지 잡아놓은 상황이었다.
그걸 일방적으로 둘이서 얘기를 하고 끝내다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처음엔 정석환 회장도 그걸 두고 화를 내는 듯 했으나 갑자기 조용히 넘어가는 모습에 아무리 장남이라도 그가 나설 수는 없는 상황이라 지켜보았는데, 그 후로 지나의 모습을 미행까지는 아니더라도 따로 주변을 알아보니 남자를 만나고 있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게 된 것이다.
“네가 하고 싶은 얘기가 뭐냐?”
“지나가 만나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 좋은 쪽이든 그렇지 않은 쪽이든 확실히 정리를 해둘 필요성이 있다고 봅니다.”
“음...”
“아버지는 그 남자가 누군지 혹시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누구보다 여동생을 끔찍이 아끼는 사람이 아버지라는 걸 민우 또한 잘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대도 남자를 만나고 있는 상황을 아버지가 이렇게 놔두고 있다는 것은 이미 그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고 봐야하는 게 옳다.
잠시 생각을 하는 듯 하던 정석환 회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네 말대로 지나가 만나고 있는 남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
“그리고 네가 생각하는 대로 현호와 약혼식을 깬 것도 그 남자 때문인 것도 맞아.”
“역시.. 그랬었군요.”
“하지만 그에 대해서 알고 싶으면 네가 직접 알아 보거라. 나에게 이렇게 얘기를 꺼낼 정도면 내가 하지 말라고 해도 그렇게 할 거 아니냐.”
“오빠로써 여동생을 챙기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물론 거기엔 회사에 대한 것도 들어가 있겠고 말이지...?”
“그렇습니다.”
역시나 이번에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하는 모습에 정석환 회장이 웃음을 지었다.
그날 오후 정민우는 일을 끝내고 곧장 집으로 향했는데 동생을 보기 위함이었다.
조촐한 연회자리가 마련되어 있었지만 아버지에게 통보도 한 만큼 이제 확실히 해두기 위해서였다.
안 그래도 1시간 전에 집에 들어왔다는 연락을 받은 그는 그렇게 퇴근시간에 맞춰 곧장 저택으로 향했다.
그렇게 집안으로 들어서니 아주머니들이 저녁을 차리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안으로 들어서는 정민우를 보고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해왔다.
걸음을 옮겨 2층으로 올라간 민우가 그대로 지나의 방으로 향하더니 앞에 서서 노크를 했다.
“들어와요.”
작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문을 열자 헤어드라이기로 화장대 앞에서 머리를 말리고 있는 지나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씻은 모양이구나.”
“오빠 왔어?”
머리를 말리고 있던 지나가 민우를 힐끔 바라보고는 그렇게 말했다.
얘기 좀 나누자고 한 상황이라 놀랄 것도 없는 일이었다.
안으로 들어온 민우가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꽃병이 놓여 있는 원형 탁자 쪽으로 이동해 의자를 빼서 몸을 앉혔다.
“별 일이네...? 오빠가 이 시간에 나하고 얘기도 다 하자고하고.”
머리를 말리면서 거울을 통해 민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 물기가 다 말리고 나서 빗으로 정리를 하고 가볍게 스킨로션을 포함한 기초화장을 끝내고 걸음을 옮겨 민우의 맞은편 의자를 빼내어 몸을 앉혔다.
“연말이니까 더 바쁘지 않아?”
“바쁘지...”
“그런데 이렇게 시간 내서 들어오는걸 보면 그냥 일상적인 얘기는 아닌 것 같은데?”
“지나 너 오빠한테 말해줘야 할 거 없어?”
“말해줄 거라니?”
의아한 듯 바라보는 지나의 모습에 민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예를 들면 남자를 만나고 있다거나 하는 거 말이다.”
“남자?”
“숨기고 할 거 없다... 오늘 오전에 아버지하고 얘기도 나누었으니까.”
진중한 음성으로 말하는 그 모습에 지나가 작게 웃음을 지었다.
“뭐야? 할 얘기라는 게 겨우 그거였어? 난 또 오빠 얼굴이 진지하길래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잖아.”
당황할 줄 알았던 지나가 이렇게 나오자 오히려 덩혹스러운 심정을 느끼건 민우였다.
“오빠 말 맞아. 나 남자 만나고 있어.”
그러더니 마치 숨길 거리도 되느냐는 듯 당당히 민우에게 사실을 밝혔다.
“어제 외박을 한 것도 그 남자 때문이냐?”
“응, 그 사람 만나러 나간거야.”
“......”
해맑은 표정으로 말하는 지나의 모습에 민우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자신을 터치하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 여동생이라 이 얘기를 꺼내는 순간 분위기가 좋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시작 한 것인데 이런 모습을 보이니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는 거야.”
“네가 만나는 남자... 누구인지 나에게 말해 줄 수 있겠어?”
“내가 누구와 만나는지 궁금한 모양이구나?”
“그래.”
“그렇겠네... 오빠라면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현호도 그렇고 만나는 사람에 대해서 아버지만큼이나 관심을 보여왔던 것이 바로 첫 째 오빠인 민우였다.
왜 그런 것인지 지나또한 그 이유를 잘 알고는 있어서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어떤 사람이지? 사업을 하는 남자인가?”
“사업을 하는 사람은 맞아. 해외에서도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으니까.”
“그래?”
지나의 말에 민우가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래도 어중이는 아닌 모양이군.’
젊은 나이에 해외에서 사업체를 꾸리고 있을 정도면 그래도 뭔가 일을 제대로 하나 하고 있나하는 생각은 들었다.
“이름은 뭐냐? 그리고 하는 사업이 뭐고 어디서 만나게 된 거냐?”
“오빠... 뭘 그렇게 취조하듯이 따지고 그래? 내가 죄라도 짓고 있는 것 같잖아.”
“으흠...! 미, 미안하다.”
눈살을 찌푸리는 지나의 모습에 민우가 목을 가다듬으며 사과를 했다.
“그래... 그 사람 이름이 뭐지?”
그리곤 다소 느긋해진 목청으로 다시 물음을 던졌다.
“서민준.”
“서민준?”
“응... 그 사람이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이야.”
“서민준이라...”
“오빠가 봐도 놀랄 정도로 멋진 사람이야. 다른 남자들과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한 외모 하는 모양이지?”
“외모뿐만이 아니라 다 그래...”
“다 그렇다고?”
반문을 해오는 민우를 향해 지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그런 남자는 만나기 힘들 만큼. 어떻게 보면 나에게 과분한 남자지.”
지나의 말에 민우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네가 매달려서 사귀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맞아.”
“......”
말을 잊지 못 하는 민우를 향해 지나가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오빠 말대로야.”
“그 남자는 널 좋아하지 않는단 말이냐?”
“응... 내가 원해서 만나주고 있을 뿐이야.”
순간 민우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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