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0화 〉 230화 그녀의 마음
* * *
잠시 동안 정적이 감돌았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차이링의 시선을 이만석은 굳어 있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자신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그리고 또 어떤 심정을 느끼고 있는지 다 느낄 수가 있었다.
그렇게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이만석은 닫혀 있던 입을 다시금 열었다.
“네가 나에게 뭘 원하는지 알겠어.”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갑자기 변하지는 않아.”
조금이라도 따뜻한 말을 해주면 안 되는 걸까.
그의 입에서 나오는 대답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래서 더 가슴이 아려오고 아파왔다.
그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이젠 확실히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빈말이라도 좋아.”
이만석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차이링이 말했다.
“빈말이라도 좋으니까 조금만이라도 헤아려 주면 안 돼?”
장차오를 만나고 삼합회에 들어간 후로 차이링은 마음을 강하게 다잡았다.
어렸던 소녀는 다시는 그 끔찍한 악몽이었던 2년의 시간이 다시금 되풀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누구보다 강하게 마음먹었고 자신을 채찍질 했다.
여자라고해서 봐주지 않는다.
쓸모가 있느냐, 가치가 있느냐를 보여야 살아남을 수 있고 앞으로 나아 갈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다.
자신과 같이 지도를 받았던 아이들이 하나 둘 낙오를 하고 뒤안길로 사라져 가는 모습을 보면서 차이링은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차이링은 변해갔다.
더 이상 부모님의 사랑을 받는 아이들을 부러워하지 않게 되었다.
자신의 처지와 상황에 대해서 탓하지도 않게 되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 없었으니까.
낙오하지 않기 위해 그녀는 자신의 처지와 불안감을 잊기 위해 노력을 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선 안 되었다.
다른 이에게 의지를 하다보면 나약해 질 것이고 그게 길어지면 결국은 앞으로 스스로 헤쳐 나가지 못 할 것이라 생각했다.
장차오를 따라간 순간부터 그녀는 그렇게 스스로를 채찍질 했다.
자신에게 혹독했던 만큼 그녀는 강하게 클 수 있었다.
이쪽 세계에선 얕잡아 보이면 어떤 일을 당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녀는 적을 처단하는데 있어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죽여야 될 놈이면 가차 없이 방아쇠를 당기거나 명령을 내렸다.
처음 차이링을 보고 외모에 혹하거나 여자라는 것을 두고 쉽게 보았던 인물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더 이상 그녀를 가볍게 보지 않게 되었다.
삼합회의 간부에 올라서도 손색이 없을 만큼 그녀는 냉혹해졌고 일을 하는데 있어 목숨이 오고가는 상황도 피하지 않는 강인한 여장부가 되었다.
장차오의 손에 이끌려 삼합회의 들어간 이후 처음으로 그녀는 힘없고 여렸던 어린 소녀의 시절로 돌아간 듯 나약한 모습을 보였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이런 것일까.
이만석이 자신에게 말 했던 대로, 그가 말했던 것처럼 이건 자신답지 못한 행동이었다.
누군가의 앞에서 이렇게 나약한 자신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차이링에게 있어 그동안 자신이 지탱해온 마음가짐을 저버리는 일과도 같았다.
그만큼 그녀의 마음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일 게다.
마음이 이렇게 흔들릴 정도로 이만석은 어느새 그녀에게 있어 커다란 존재가 되어 있었다.
좋아하는 이성이나 남자친구, 또는 남편을 위해 식탁을 차려 준다는 것, 빨래를 하고 옷을 다려주는 가정적인 여인의 모습이 그녀 자신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그런 여인들과 자신의 삶은 거리가 멀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가 않았다.
아무리 강한 게 행동해도, 악녀라고 불릴 정도로 냉정한 모습을 보여도 결국엔 그녀 또한 어쩔 수 없는 한 명의 여인에 불과했던 것이다.
시간이 차츰차츰 지나면서 그녀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여자로써 느끼는 행복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경험해보게 되었다.
그래서 더 가슴이 아프고 힘든 것이다.
“빈말이라도 좋다고?”
“그래... 그게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말이 아니라고 해도...... 당신이 나에게 해주는 말이니까.”
다시 이만석에게 말 했던 것처럼 지금은 그저 빈말이라도 그렇게 말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이만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오히려 널 더 힘들게 할 뿐이야.”
그렇게 이만석은 차이링의 바람을 저버리고 말았다.
“그렇구나...”
차이링은 작은 웃음을 지었다.
그녀가 평소에 짓는 미소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웃음이었지만 그 모습이 너무나 처량해보였다.
잠시 동안 그렇게 웃음을 지으며 이만석을 바라보던 차이링이 걸음을 옮겨 안방으로 향했다.
“당신 말대로 나답지가 않네... 좀 쉬어야 할까봐.”
안방으로 향하는 차이링의 작은 중얼거리는 말이 이만석에게 다 들려왔다.
씁쓸한 마음을 뒤로 하고 그렇게 안방으로 들어섰던 차이링은 걸음을 멈춰서고 말았다.
침대위에 자신이 몰래 준비해두었던 선물이 개봉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지갑은 물론이고 목도리, 그리고 편지지 또한 눈에 들어왔다.
잠시 동안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잇을 때 뒤에서 이만석의 음성이 들려왔다.
“다 읽어봤어.”
“......”
“어떤 마음으로 저 선물들을 준비 했을지 알겠더군.”
자신의 선물을 이미 이만석이 보았음에도 그녀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놀라는 표정이나 당혹스러워 하는 것도 없었다.
그저 가만히 자신이 준비했던 선물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때 천천히 걸음을 옮겨 다가간 이만석이 차이링에게 등을 보인 채 침대에 놓아져 있는 목도리를 들었다.
“오래 걸렸을 거야.”
“......”
“차이링 네가 이런 걸 준비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
들고 있는 목도리를 내려다보며 이만석이 이니셜이 적혀 있는 부분을 손으로 만졌다.
“처음이었고 이걸 짜는데 쉽지는 않았을 거야. 그동안 바빴을 테니까.”
일성회를 위해 그녀가 얼마나 노력하고 열심히 일을 했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은 바로 이만석 이었다.
자신의 부탁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그녀 덕분에 일성회로썬 다시 한 번 도약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 할 수 있는 체계를 바로 잡은 셈이다.
삼합회의 노하우를 그대로 일성회에게 전해주기 위한 그녀의 노력의 결과인 것이다.
“이런 걸 다시 받게 될 줄은 몰랐어...”
목도리를 바라보며 말하던 이만석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것도 차이링 너한테서.”
작게 말하는 그의 시선이 목도리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그런 이만석의 뒷모습을 차아링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가만히 바라보았다.
“따뜻했던 것 같아.”
잠시 동안 목도리를 만지작거리던 이만석이 그렇게 다시 말문을 열었다.
“나 같은 놈에게 그런 걸 주다니... 그래서 이걸 처음으로 목에 두르고 나갈 때.... 그 어떤 날보다 제일 따듯한 겨울이었어.”
그리곤 다시 침묵을 지키며 목도리를 바라보고 있는 이만석의 모습을 바라보던 차이링이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겨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렇게 등에 살며시 손을 대려는 그때 차이링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 했다.
‘이사람...’
들고 있는 목도리에 몇 방울의 물이 떨어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는 차이링은 속으로 놀라고 말았다.
차이링이 자신의 뒤로 다가온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만석은 다시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그날보다 따뜻했던 날들은 없었을 거야.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어.”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일까.
이만석이 하는 얘기를 차이링은 자세히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그것이 어떤 사람과 관계되어 있다는 것만은 알 것 같았다.
“나 같은 놈은 태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지 모르지.”
“그게 무슨 말이야?”
순간 차이링의 표정이 굳어지며 이만석의 말에 반문하고 말았다.
“난... 태어나지 않는 게 좋았을지 몰라.”
“당신이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지도 모른다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말 하지 마.”
“......”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몰라. 무슨 일을 겪었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난 알지 못해. 하지만 나 같은 놈은 태어나지 않는 게 좋았을 거라니...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왜?!”
생각지도 못한 이만석의 모습과 말에 차이링은 그에게 언성을 높였다.
“그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당신의 모습을 봐. 누구보다 멋지고 당당 할 수 있잖아? 과거의 일에 얽매일 필요 없어. 지금의 당신은 그때의 당신이 아니니까!”
차이링은 진심으로 화가 난 듯 보였다.
어쩌면 이만석에게 하는 이 말이 자신에게 했던 말일지도 모른다.
“좋은 일은 아니었을 거야. 분명히 당신에게는 아주 힘이 든 일이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당당하게 세상을 내려다 볼 수가 있잖아! 당신은 기회를 잡아 노력을 통해 이루어낸 거야..그게 어떤 것이든 상관없어! 그 기회로 인해 이렇게 달라 질 수가 있었다면... 그걸로 된 거야.”
“차이링.”
그때 이만석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네가 알고 있는 서민준이 진정한 내가 아니라고 하면 어떻게 할 거지.”
“......”
“만약 네가 알고 있는 나의 모습이 실질적인 내 모습이 아니었다고 하면... 넌 그래도 나라는 사람을 받아드릴 수 있을까.”
차이링에게서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이만석이 다시 쓴웃음을 지었다.
‘네가 말한 기회가 그런 스스로의 노력이었다면...이만석이라는 나 자신에게 스스로 떳떳해 질 수 있을까.’
스스로에 대한 자아.
자신이 이제 사람이 아닌 또 다른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생각.
동떨어진 그 느낌과 시간이 지나면서 이만석은 그렇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겪었었다.
처음으로 이 힘을 손에 넣게 되었을 때의 희열과 기쁨은 점차 그의 정체성마저 의심스럽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원래 이런 성격이지 않았다.
누구보다 어리숙했고, 겁쟁이었으며 나약했다.
하지만 지금 서민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자신의 모습은 그때의 나약함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마치 서서히 자신을 잃어버리고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외모가 변하고 성격마저 시간이 지나면서 변해가는 그는 더 이상 자신이 사람이라 생각되지 않았다.
이건 차이링이 말하는 것처럼 자신이 노력해서 얻은 결과가 아닌 것이다.
과연 이게 진정으로 나라고 할 수 있을까.
태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 때 이만석은 어린 나이에 그런 생각을 했었다.
지금의 자신은 서민준이라는 이름 속에 감추어져 살아가고 있었다.
지금은 이 세상에 이만석이라는 남자는 그때의 바람처럼 존재 하지 않을 지도 몰랐다.
잊고 싶은 기억 속에서 좋지 못한 구차한 삶을 살아온 그는 이만석이라는 남자를 더 이상 세상에 내보이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상관없어.”
조심스럽게 차이링이 이만석의 허리를 양속으로 끌어안았다.
“당신이 설사 내가 알고 있는 남자가 아니라고 해도... 상관하지 않아.”
이 남자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가 이런 말을 할 줄은 차이링은 생각지도 못 했다.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지도 모른다니.
“우리가 그동안 함께 했던 추억과 일들은 그저 꿈이 아니었으니까.”
빈말이라고 좋다고 했다.
진심이 아니라도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 줬으면 했다.
그를 너무나 사랑하기에 그런 말을 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지금의 이 남자가 자신의 본래 모습이 아니라고 해도, 다른 사람이 그걸 알고 배신감을 느낀다고 해도 그녀는 그런 그가 그저 가엾게만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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