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9화 〉 229화 그녀의 마음
* * *
음악도 켜지 않은 상태에 조용한 침묵이 맴도는 가운데 차가 도로를 달리는 작은 소리만이 적막감을 떨치는 듯 했다.
조수석에 타고 있는 차이링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만석 또한 별다른 말없이 그렇게 집으로 운전을 해갈뿐이었다.
새벽시간대라 그런지 차가 그렇게 막히지는 않아 금방 저택에 다다를 수 있었다.
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키고 시동을 끈 이만석이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자 그녀 또한 문을 열고 내려섰다.
마당을 지나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까지 두 사람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선 차이링은 그 후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 했다.
이만석또한 차이링이 움직이지 않자 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많이 마셨을 텐데 들어가서 쉬어.”
이만석의 말에 고개를 들었던 차이링은 곧 안쪽에 보이는 응접실의 탁자에 놓여 있는 양주병들과 재떨이에 쌓여 있는 꽁초들을 보곤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차이링.”
그녀의 모습에 이만석이 작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고개를 돌린 차이링이 이만석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너무 욕심을 부렸던 거니?”
“......”
“바라면 안됐던 것인데...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했던 거야?”
빤히 바라보며 말하는 그녀의 눈동자는 상당히 슬퍼보였다.
“당신이 하란이를 사랑한다는 거 알아. 그래서 당신이 그녀를 먼저 챙기고 위한다고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어. 그녀는 당신의 여자친구이고... 난......”
순간 말문이 막히는 것인지 차이링이 뒷말을 잊지 못 했다.
이만석은 그런 차이링에게 별다른 말없이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어느 정도 진정이 된 것인지 차이링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난... 아니니까.”
마지막 말을 내뱉으면서 그녀는 가슴이 너무나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이만석 앞에서 그녀와 지신의 관계를 스스로 말하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다.
하지만 이게 엄연한 현실인 것이다.
“맞아.”
이만석은 슬픈 눈으로 바라보는 차이링을 향해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차이링 네가 말했던 것처럼 난 하란이를 사랑해.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그건 변하지 않을 거야.”
한 치의 떨림도 없이 바로 대답해 버리는 모습이 너무나 야속하게 느껴졌다.
속마음을 그대로 말해준 것 뿐인데 그녀에게는 냉정하게 들려왔다.
“차이링...”
자신의 말에 고개를 돌리는 모습에 이만석이 작게 그녀의 이름을 열었다.
“네가 날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알아. 그리고 내가 하란이를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그걸 받아들이고 가슴에 품은 것도 알아.”
“......”
“그런데 이 모습은 뭐지?”
“......”
“이건... 너 답지가 않아.”
마치 자신을 나무라는 것 같은 그의 말이 너무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꼭... 지금 가야했던 거니?”
젖어 있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그녀는 이만석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기다렸어... 당신이 온다는 소식에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공항에 오지 말라는 말에 서운했지만 그래도 당신을 놀래켜 주려는 생각에 이것저것 요리를 해서 많이 준비했어. 하란이와 함께 있어서 오지 못 한다고 했을 때도 이해했어. 그녀도 당신이 그리웠을 테니까. 다음날까지 기다리고 겨우 만났는데... 그렇게 다시 밖으로 나가는 모습이 너무나 야속해 보였어... 나도 당신이 그리웠는데... 너무 보고 싶었는데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나가버리는 모습이 너무나......야속했어.”
“그건 네 마음이야.”
“알아...”
“네가 날 사랑한다고 나도 그래야 한다는 보장은 없어.”
“나도 알고 있다고...!”
자신을 바라보는 이만석의 무표정한 얼굴에 차이링은 손을 말아 쥐었다.
그리곤 천천히 자신의 가슴으로 그 손을 가져가 대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이라도 당신이 날 생각해줬으면 했어. 그저 둘이서 함께 하는 그 시간 만큼만이라도... 그 만큼이라도 허락해 줬으면 했어.”
이만석을 두 눈을 빤히 바라보는 그녀의 두 눈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게.. 너무나 큰 욕심일까? 지금 내가 바라는 이 마음이... 너무도 과분한 걸까.”
너무 큰 것을 바란 것일까.
이만석에게 바라는 이 마음이 그리도 큰 욕심인걸까.
그저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나 즐거웠다. 무엇보다 행복했고 점점 더 그의 곁에 머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차이링 그녀는 누군가를 이렇게 가슴에 품어 본 적이 없었다.
삼합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고 누구보다 잔인해졌다.
자신이 낙오하면 그 위로 치고 올라올 이들은 많은 것이다.
자신을 악녀라고 해도 그녀는 상관없었다.
불우한 과정환경에서 자라 자기 자신 말고 믿을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거기다 타고난 외모 때문에 그녀의 몸을 탐하기 위해 접근하는 더러운 놈들도 상당히 많았다.
그렇게 결국 어린 나이에 온갖 더러움과 고통을 당하고 결국엔 시창가로 팔려 갈 수도 있었을 그녀를 구해준 것이 바로 장차오라는 할아버지였다.
돈에 의해 가정은 물론이고 친척들도 등을 돌린 마당에 그녀는 마치 팔려가는 신세가 되어 끌려가던 와중에 남자의 손목을 깨물어 도망쳤다.
순순히 끌려가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타고난 외모는 얼마나 자신을 더욱 비참하게 하는지 그녀는 이른 나이에 알아버렸다.
아름다운 외모도 지킬 힘이 있어야 더욱 빛을 발하는 법이다.
하지만 차이링 에게는 그런 힘이 없었다. 10살의 어린 나이에 그녀는 세상의 잔혹함과 더러움을 너무나 잘 알게 되었다.
어린 나이의 그녀가 온갖 수모를 당해도 도와 줄 사람은 없었다.
한 참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란 나이에 차이링은 탐욕에 물든 눈빛을 보았고 따듯한 손길을받을 나이에 더럽고 추악한 손길을 느껴야 했다.
8살.
겨우 8살에 그녀는 그러한 일들을 처음으로 견뎌내야 했다.
이걸 다행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너무도 어렸던 그녀의 그곳에 성기를 집어넣는 미친놈은 없었다.
어쩌면 그녀의 상품성을 보고 거기엔 손대게 하지 못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곳에 성기를 집어넣지 않았을 뿐이지 온갖 추악한 행위들을 하였고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그녀에게 욕정을 풀었다.
너무나 무섭고 두려웠다.
하지만 그녀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시간이 지나가고 10살이 되던 해에 차이링은 한 남자의 손에 끌려가게 되었다.
잠시 떠나있는 것이라고 했지만 그녀는 이미 10살의 나이임에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안 좋은 곳으로 팔려가게 되었다는 것을.
그렇게 집을 떠나 딱 봐도 음침해 보이는 골목에서 내려 끌려들어가는 손을 이빨로 물어 그 틈에 빠져나와 도망쳤던 것이다.
하지만 그 어린 소녀를 건장한 사내들이 잡지 못 할 리가 없었다.
얼마가지 못한 그녀는 결국 다시 사내들의 손길에 잡히게되었다.
그렇게 다시 잡혀 끌려가게 된 차이링은 한 대의 멋스러운 승용차에서 내리는 할아버지와 눈이 마주 쳤을 때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도와주세요.”
그녀의 애처로운 음성이 안타까웠을까. 아니면 어린 소녀가 너무도 가여워 보였을까.
어떤 심정으로 그랬을지는 모른다.
다만 그 할아버지는 차이링의 도움을 외면하지 않았다.
끌고 가던 사내들은 그 할아버지를 상당히 어려워했다.
얼굴조차 마주치지 못 할 만큼 너무도 어려워했다.
“네 이름이 뭐냐.”
입가에 인자한 웃음을 지은 그가 자신을 올려다보는 소녀를 향해 그렇게 질문을 던졌다.
“차이링이에요.”
“차이링......”
그녀의 이름을 작게 말한 할아버지가 조심스럽게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좋은 이름이구나.”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녀의 기질을 알아보았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차이링은 거기서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삼합회의 십령방주중에 한 명 이었던 장차오.
그녀는 그렇게 그를 따라 가게 되었다.
아주 큰 도움이 없어도 되었다.
그저 노력을 하면, 자신 한 것만큼 돌아오기만 한다면 그걸 로도 그녀는 복이라 여겼다.
장차오를 따라간 그녀는 정말로 미친 듯이 노력했다.
자신이 못 하면 어떤 처지에 놓이게 될지 장차오는 철저하게 깨우쳐주었다.
자신 말고도 장차오가 데려온 애들은 더 있었고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지 못한 이들은 그렇게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차이링은 그것을 보면서 더 악착같이 노력했다.
그는 자신에게 기회를 주었을 뿐이지 후광이 되어 준 것은 아니었다.
그 기회를 살리느냐 마느냐는 온전히 자신에게 있었던 것이다.
자신을 악녀라고 해도 좋았다.
어떻게 그리 잔인하게 사람을 대할 수 있냐고 악담을 해도 좋았다.
8살의 나이에 추악한 손길과 시궁창 인생을 경험한 그녀에게 있어 더 이상 밑바닥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차이링은 차근차근 자신의 입지를 키워나갔다.
도태되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악착같이 앞만 보고 달렸다.
그러다 그녀는 결국엔 급만 놓고 보자면 방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지부장으로 올라서게 되었다.
한국으로 오기 전 그녀는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온갖 추악한 짓을 저질렀던 놈들을 모두 악착같이 찾아내어 모두 죽여버렸다.
너무도 어린 나이의 일이라고 하지만 그녀는 절대 그놈들의 더러운 눈길과 손길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모르는 이들이 보면 그녀는 어릴 때부터 온갖 사랑과 귀여움을 다 받았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그만큼 그녀는 예쁜 외모에다 기품 또한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그녀의 겉모습만을 본이들의 평가일 뿐이다.
신화그룹의 강은성을 쏴버리는 대에 망설임이 없었던 그녀의 모습을 본다면 과연 그런 생각을 가졌던 이들이 계속해서 그런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볼 수 있을까.
사람의 목숨을 망설임 없이 취해버리는 그녀를 농담이라도 그녀의 외모를 두고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라든지 천사라 했던 말을 다시금 말 할 수가 있을까.
자신을 악녀라고 해도 차이링은 상관없었다.
그들이 원한다면 그녀는 진정으로 악녀가 되어 줄 수가 있었다.
그게 여자의 몸으로 삼합회의 지부장으로 올라설 수 있게 된 그녀의 마음가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삼합회의 지부장이 아니다.
너무도 냉혹한 그들만의 세계와 룰을 알고 있는 그녀는 삼합회에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받아주지 않을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이만석에게 납치된 순간 그녀의 모든 것은 허물어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지금.
어쩌면 그녀는 10살때의 그 일 처럼 또 다른 삶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이 그때보다 더 행복했다. 그녀의 인생에 이렇게 행복한 때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너무나 좋았다.
처음으로 여자로써 느끼게 된 이 행복이 결국 이런 화를 불렀던 것일까.
이만석에게 바라는 이 마음이 자신에게는 과분한 것이었을까.
신화그룹의 강은성의 생명을 취할 때도 그녀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게 아름다운 외모 속에 감추어져 있는 그녀의 본래 모습이었고 삼합회의 지부장으로 올라 설 수 있게 해준 하나의 단면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더 이상 그런 의연한 모습과 강단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조금만... 조금이면 되었어......”
이만석을 바라보는 지금의 그녀의 모습은 냉혹한 악녀나 여장부가 아닌 그저 한 명의 가녀린 여인일 뿐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