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화 〉 139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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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친구에게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번 한 번은 넘어가 주었으면 해서 전화를 드린 겁니다.]
“허... 지금 그 부탁을 하려고 나에게 전화를 건 겐가?”
기가 차다는 듯 말하는 정석환 회장의 말에 폰에서 쓴웃음이 깃든 목청이 울려왔다.
[그 친구하고 제가 좀 특별한 인연이어서 말입니다. 그러니... 이번 일은 조용히 지나갔으면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겠다면?”
마치 무언의 압박을 가하듯 해오는 목청에 정석환 회장은 자존심이 상해 기분 나쁘다는 음색을 그대로 내보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국회에서 민생경제에 대해 말이 많습니다. 그리고 시민들의 불만 또한 고조되어가는 상황이고 그 때문에 야당은 물론이고 우리당 내부에서도 각 당의 인원을 뽑아서 특위를 구성하여 기업전반에 대한 조사를 들어가자는 말이 나올 정도이지요.]
“지금 협박을 하는 건가.”
[협박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다만 아직 경제가 어려운 만큼 기업이 동요하지 않고 힘을 쏟을 수 있게 특위구성은 좀 미뤄보고자 하는 게 내 생각이긴 한데 그에 대한 생각이 나서 의중도 듣고자 한 번 말씀을 드려본 겁니다.]
정석환 회장은 지금 지금 이 말이 자신을 두고 협박을 해오는 것이라 여겼다.
갑자기 민생경제니 얘기를 꺼내서 특별조사위에 관한 것을 말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자네의 딸이 그 친구의 여자 친구로 알고 있는데...”
[알고 계셨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내 딸하고 같이 있으니 바람이 난 것이로군.”
비꼬듯이 말하는 정석환 회장의 말에 다시금 폰을 통해 쓴웃음이 깃든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가 살다보면 여러 일을 겪게 되는 법이지요. 그리고 저도 아버지이고 딸을 사랑하는 입장인데 하란이가 원하는 대로 들어줘야지요. 그 친구가 좋다는데 어쩌겠습니까.]
한 방먹여주려 한 말이었지만 반대로 능청스럽게 넘어가는 모습에 정석환 회장만 인상이 더욱 찌푸려졌다.
“그런가? 난 자네처럼 마음이 그리 넓지가 못해서 말이네.”
[어쩌다가 그 친구가 회장님의 딸과 만나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이번 일은 한번만 눈감아 줬으면 합니다.]
“내 생각해보지.”
그렇게 통화를 끝낸 정석환 회장이 그대로 불만을 표출했다.
“당대표에서 대선후보에 까지 오르니 아주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야.”
이건 상당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예전엔 자신 앞에서 항상 조심스러웠는데 당대표가 되고 기를 펴고 살기 시작해 계파를 이끌고 입지를 다지게 되더니 이젠 대놓고 위에 올라서려는 형국이었다.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 정석환 회장의 모습이 김태수는 마른침을 삼켰다.
최근 들어 이렇게 기분이 언짢아 보이는 모습은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그때 갑자기 폰이 울려와 놀란 김태수가 허둥대며 받았는데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혹시 김태수씨 폰 맞습니까?]
“맞긴 한데, 혹시 누구신지요? 지금은 전화 받기가 좀 힘들어서 그런데 용건만 간단히 말씀해 주시지요.”
[아... 그러시군요. 일단 전 김철중 의원님을 모시는 박권태라고 합니다. 조금 전에 통화를 하고 있어 다시 걸게 되었습니다.]
“김철중 의원님이요?”
김철중이라는 말에 순간 놀란 김태수가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그에 아차 싶어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는데 이미 정석환 회장은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네, 저희 의원님께서 정석환 회장님에게 긴히 말씀들일 일이 있어 이렇게 연락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시간이 나면 이쪽으로 연락을 주시면 되는데 괜찮겠습니까?]
“그게...”
“줘보게.”
뭐라 말을 하려던 김태수는 정석환 회장의 말에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 회장님에게 폰을 넘겨드리겠습니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다시 폰을 넘겨주었다.
“내가 정석환이네만.”
[김철중 의원님을 모시고 있는 박권태라고 합니다.]
“옆에 있는가?”
[예, 지금 바꿔드리겠습니다.]
잠시 동안 그 상태로 기다렸던 정석환 의원은 곧 낮으면서도 굵은 목청이 들려왔다.
[아이고 오랜만입니다. 정회장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정치계에 입문한지 오래되었으며 연배도 자신과 비슷하고 안면도 있는 사이라 자연스러운 존댓말이 흘러나왔다.
[나야 언제나 정회장님이 걱정해 주시니 잘 지내고 있지요. 그보다 내가 할 말이 있어 이렇게 전화를 하게 되었는데 시간 되십니까?]
“짧게 통화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본론을 말씀해 드리지... 그 서민준 말이요.]
“서민준이요?”
[그래요 그 친구. 회장님하고 좀 안 좋은 일로 엮인 거 같은데 이번일은 정 회장님이 좀 너그럽게 넘어갔으면 해서 연락을 드렸어요.]
생각지도 않은 정치계의 거물인 김철중 의원에게 전화가 걸려온 것도 의외인데 그에게서 나온 말은 정석환 회장으로 하여금 한 말을 잃게 만들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대한 마음을 가다듬은 정석환 회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서민준하고 아는 사이십니까.”
[아는 사이기보단 인연이 좀 있었지요. 내 이렇게 직접 연락을 해서 부탁을 드리니 서민준에 대해서는 넘어가는 게 어때요?]
“딸과 관계된 일이어서 말입니다.”
[압니다. 저에게도 결혼을 한 딸아이가 있어서 그 심정 잘 알지요. 하지만 이번일은 조용히 넘어갔으면 합니다.]
“......”
정석환 회장은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윤정호 의원은 자신의 딸과 사귀고 있는 남자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데도 넘어가 달라고 하지 않나, 김철중 의원은 도대체 무슨 인연이 있기에 또 이렇게 전화를 해서 싸고도느냐는 말이다.
폭격이라도 맞은 듯 연달아 한국민당의 양대 계파를 이끄는 두 사람에게서 전화가 걸려와 같은 말을 하니 솔직히 좀 당황스러운 심정이었다.
[이른 시간이라 바쁠 텐데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그 친구 알고 보면 참 매력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곤 전화 통화는 끝이 났다.
다시 김태수에게 폰을 넘겨준 정석환 회장의 표정은 상당히 심각해져 있었다.
윤정호 의원만 해도 쉽지가 않은 상황에 연달아 김철중 의원까지 이렇게 나서서 감싸고도니 상당히 놀라운 일이다.
“대단해...”
차안의 공기가 어색한 가운데 정석환 회장의 입에서 작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서민준이 너는 확실히 인정은 해줘야겠구나.”
이런 대단한 카드를 내보일 줄은 몰랐다.
아무리 여자 친구의 아버지라고 하지만 윤정호 의원이 나설 것이라 생각지 않은 상태에서 의외의 인물까지 나타나 막아섰다.
한 사람도 아니고 두 사람이다.
아무리 정석환 회장이라고 해도 여당의 당대표와 또 다른 계파를 이끌고 있는 정치계의 거물을 상대로 함부로 행동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 어처구니가 없는 연속된 일에 제대로 뒤통수 한 대 후려 맞은 기분이었다.
“오늘은 어제보다 괜찮을 거예요.”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찌개의 뚜껑을 열자 수증기와 함께 구수한 향이 방안을 진동시킨다.
그래도 어제보다는 자신감 있어 보이는 지나의 모습에 이만석은 아무 말 하지 않고 수저를 들어 한 숟갈 떠먹어보았다.
“어때요?”
자신감은 있어보였지만 그래도 어제처럼 간을 잘 못 맞춘 거 아닌가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남은 재료로 만들 것이라 양은 어제보다 확 줄었지만 그래도 밥 한 끼 먹는 거 제대로 해주고 싶었다.
이만석은 지나의 물음에도 답하지 않고 한 숟갈 더 국물을 떠먹어보았다.
“괜찮습니다.”
“정말요?”
“예.”
이어서 평가가 떨어지자 그제야 지나의 얼굴에 긴장감이 풀리며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지어졌다.
아침 일찍 일어나 어제보다 꼼꼼하고 조심스럽게 챙겨서 끓인 찌개였다.
누굴 위해 요리를 한다는 걸 지금까지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그녀여서 여간 힘들고 어색한 일이 아닐 수 없지만 그래도 어제의 첫 경험을 통해 요리를 해줘서 맛있게 먹어준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어렴풋이 알았다.
수저를 들은 지나가 국을 떠서 호호 불어 조심스럽게 맛을 보았다.
이미 김치찌개를 끓이면서 간을 여러번 보며 짜게 맞추지 않기 위해 노력을 해서 맛을 잘 알긴 하지만 그래도 평가를 받고 다시 먹어보는 것은 느낌이 다른 일이다.
“하지만 여전히 찌개에 들어가 있는 두부라든지 재료들의 크기가 제각각이네요.”
“이해해줘요. 간 하나만 맞추는 것도 힘든 일이거든요.”
지나가 살고 있는 집에 비해선 펜션이 작고 소박한 공간이었지만 불편하거나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단 둘이 여행을 온 기분이라 뭔가 모르게 설레이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기분 좋은 식사가 끝이 나고 설거지를 하는 마음도 한 결 가벼워졌다.
지나는 원래 설거지를 한다거나 그런 거 자체를 생각하지도, 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귀하게 자라 온실 속의 화초와도 같았다.
집에 있으면 가정부 아주머니가 다 해주었고 학교에 다닐 때도 돈을 지불하고 사먹으면 되니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가 정석환 회장이라 그녀에 대해서 알게 되는 순간부터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지고 대하는 것도 어려워했다.
어렸을 때부터 떠받들려 살아온 그녀에게 있어 누군가를 위해 아침에 일찍 일어나 밥을 차려준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녀의 친구들이나 아는 사람들이 지금의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는다면 믿지 않을 것이다.
펜션을 나와 5분정도 걸어가면 서해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설거지를 끝내고 바람을 씌우러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넘실대는 바다와 탁 트인 풍경을 바라보며 기분 좋게 아침 공기를 맞았다.
“집으로... 돌아가야겠죠?”
“그리 혼내지는 않을 겁니다.”
지나는 팔짱을 끼고 있는 그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머리를 기울였다.
“저 때문에 이렇게 멀리까지 오게 해서 미안해요.”
“미안하면 걱정하지 말고 마음 단단히 먹어요.”
“네... 그럴게요.”
도망쳐 나와 외박까지 했으니 아무리 자신을 사랑하시는 아버지라고 해도 분명히 기분이 언짢으실 게 뻔했다.
무엇보다 지금 누구와 함께 있는지 예상하고 있을 테니 어쩌면 더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기대고 싶다는 게 이런 걸까.’
어쩌면 자신보다 더 크게 피해가 갈지 모르는 사람은 이만석이었다.
그것도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니 화를 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서 그는 전부 들어주고도 옆에 있어주었다.
무엇보다 전혀 걱정하나 없이 평소와 같이 대해주고 웃어주면서 듬직한 모습에 안심이 되고 위로를 받는 느낌이었다.
이 남자와 함께 있으면 느낌이 새롭다.
지나는 그걸 놓치고 싶지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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