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 126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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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셨습니까?”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선 현호는 이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신문을 읽고 있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
별다른 말이 없는 아버지의 모습에 현호는 걸음을 옮겨 오른편의 소파에 몸을 앉혔다.
그때까지도 신문을 읽고 있는 것에서 시선을 때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러갔을까. 고요한 침묵이 점적만이 감도는 가운데 드디어 읽고 있던 신문을 반으로 두 번 접어서 탁자위에 놔두고는 고개를 돌려 현호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이냐.”
“무엇을 말입니까.”
“네가 저지른 일을 말하는 게다.”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하는 주성민 회장의 얼굴을 보면 웃음기라고는 하나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얘기... 들으셨군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현호는 자신과 지나의 일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래도 자신보다 지나가 먼저 얘기를 꺼낸 것 같은데 그 소식이 아버지에게 전해진 것 같았다.
“너와 정석환 회장의 딸과 맺어주려고 내가 얼마나 노력을 한 줄 알고 있느냐.”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넌 지금 이런 과오를 저지른 것이냐.”
크게 역정을 내거나 그러지는 않았지만 현호는 아버지의 화가 많이 났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세진그룹과 사돈관계를 맺으면 그것 하나만으로도 한 단계 더 도약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재계서열 50위권에 들고 성장세를 이어가는 주화였지만 세계로 뻗어나가는 세진의 기세는 절대 무시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집안대 집안의 만남은 기업을 경영함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일중에 하나였고 그런 면에 있어서 세진그룹 오너가의 막내딸인 지나가 집안의 며느리로 들어오는 것은 아주 성공적인 일중에 하나였다.
듣자하니 지나또한 현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했고 직접 미국으로까지 수차례 찾아가기도해서 주성민 회장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랬던 것을 앞에 있는 당사자인 아들이 모든 것을 파토 내 버린 것이다.
“전 그녀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결혼은 사랑만을 가지고 하는 게 아니다. 넌 왜 그걸 모르느냐?”
“아버지께서 말하는 대로 훌륭한 아들이 되려고 노력했고 달려왔습니다. 하지만 결혼만큼은 제가 원하는 사람과 하고 싶습니다.”
“그게 하란이겠지?”
현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성민 회장이 하란이의 이름을 거론했다.
“......”
“대답해 보거라.”
뭐라 말을 하지 못 하고 침묵을 지키는 모습은 무언의 긍정이었지만 주성민 회장은 직접 듣고 싶은 것인지 다시 물었다.
“그렇습니다.”
낮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현호가 자신의 속마음을 밝혔다.
“네놈은 어리구나... 생각하는 방식이 너무나 어려.”
이미 예상하고 있던 말이었지만 주성민 회장의 눈살이 찌푸려지며 입에선 불만 섞인 어조가 강하게 묻어나왔다.
사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몇 차례나 현호에게 하란이는 안 된다고 말을 했었기 때문이다.
사업을 하는데 있어 정치가와 만나고 어울리는 건 필수겠지만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면 나중에 가선 어떨 결과가 나올 줄 모르게 된다.
상황에 맞게 줄을 서고 유도리 있게 협상을 하는 사업가가 되어야지 진영논리에 갇히게 되면 기업을 경영하는데 있어 아주 큰 악영향을 미치게 될 수가 있었다.
정권이 바뀌고 벼르고 있던 칼날이 고스란히 날아들어 헤집어 엎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윤정호 의원이라면 친하게 지내고 친분을 쌓는 건 좋았다.
하지만 대놓고 사돈관계를 맺고 라인을 타게 되면 정치놀음에 갇힐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비록 우리 주화그룹이 세진에 비해서 부족하다고 하지만 그 쪽의 역량을 끌어들여야 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업을 하는데 있어 어떤 변수가 일어날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생각을 하고 길을 찾아가야지 이상만을 쫒아간들 무엇을 이룰 수 있다는 거냐.”
“저 또한 회사가 일어서는데 노력할 것입니다. 그 때문에 열심히 공부했고 살아왔으니까요. 하지만 평생 함께할 반려자만큼은 제가 직접 고르고 싶습니다.”
“연회장에서 보았던 그 친구가 하란이의 남자친구 아니더냐.”
바쁜 시간이 지나가고 나중에 하란이와 함께 자신 앞에 나타났던 이만석의 모습을 주성민 회장은 기억하고 있었다.
“맞습니다.”
“그런데도 네놈은 지금 그런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냐.”
“기다릴 것입니다.”
“뭐?”
순간 주성민 회장은 자신도 모르게 반문을 했다.
“나중에 후회하게 된다고 해도 기다리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정신이 나갔군.”
현호를 바라보는 주성민 회장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아들을 두고 이런 말을 하는 건 그의 생에 있어 처음이었다.
“내가 보기엔 지금 네놈은 제정신으로 보이지가 않는다. 겨우 여자 한명에 정신이 팔려서 지금 내 앞에서 그런 말을 내뱉고 있는 거냐.”
“......”
“나가라.”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현호를 잠시 동안 노려보던 주성민 회장이 노려보는 시선을 풀지 않은 채 화를 억누르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더 이상 네놈을 보고 있으면 화를 참지 못 할 것 같으니까 당장 나가.”
자리에서 일어선 현호가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가보겠습니다.”
그리곤 몸을 돌려 들어왔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조용히 닫았다.
‘죄송합니다.’
걸음을 옮기는 현호는 속으로 아버지에게 용서를 빌었다.
자신과 지나가 이루어지길 그 무엇보다 바랐던 사람이 아버지였고 그만큼 노력도 하신 분이다.
“분명히 이유가 있을 거야.”
잠시간 생각을 하는 듯 하던 정석환 세진그룹 회장이 깔끔한 정장차림에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중년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지나가 최근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두 조사해봐.”
“아가씨의 행적 전부 말입니까?”
“다 알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지. 갑자기 약혼식을 깨고 현호와 헤어지겠다고 하는걸 보면 뭔가 계기가 크게 있었던 것이 틀림이 없어.”
그전까진 현호를 좋게 생각하고 바라보던 딸아이었다.
그랬던 것이 이제 그와 정리하고 싶다고 선언을 하며 약혼식도 취소해달라는 말에 다시 생각해보라고 말을 했지만 확고부동한 대답이 이어질 뿐이었다.
처음엔 돌변한 딸의 모습에 당혹스러운 정석환 회장이었지만 지금은 그것을 싹다 묻어두고 왜 그런 마음을 먹게 되었는지 알아보는 게 중요했다.
“그 아이는 고집이 있어 쉽게 마음을 돌리지 않는 아인데 이렇게 모든 걸 뒤집어 버린 걸 보면 어쩌면 남자가 생긴 걸지도 모르지.”
가능성이 있다면 열어보고 알아가는 게 정석환 회장의 삶의 모토였다.
모르는 게 있으면 배우고, 정보가 부족하면 모든 걸 동원해서라도 알아내고, 가능성이 있다면 열어두고 도전하는 것이다.
정석환 회장의 리더십에 있어 이 세 가지는 그의 삶에서도 묻어나고 있었다.
“학교에서 혹시 누굴 만나는지 아니면 최근에 따로 사적으로 만나는 사람이 있는지 모두 알아봐. 거기서 들어난 게 없다면 따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일이라도 있는지 하나하나 영역을 넓혀.”
지나가 왜 마음을 돌려먹었는지 딸을 아끼는 정석환 회장에게 있어 꼭 알아봐야 할 일이었다.
“명심하겠습니다.”
10년 이상 정석환 회장의 수행비서로 붙어 다녔던 중년인이 올 굳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호방파의 개편이 마무리되고 안정을 찾아가고 있을 때 종진파을 친 도끼파 또한 서둘러 부산의 세력을 장악해갔다.
양대 대들보였던 종진파가 그렇게 무너져 버렸으니 서면일대를 장악하고 위세를 떨치던 도끼파를 막아설 수 있는 조직은 없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최근 들어 더욱더 일성회에 들어오겠다고 고개를 숙이는 이들이 배는 늘어났으니 확실히 대호방파와 종진파의 일은 대사건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렇게 전국적으로 일성회의 세가 강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일성회는 물론이고 진영회, 그리고 연동파내에서 새로운 움직임이 일었다.
하나의 발표문이 있고 난 후로 너도나도 지원을 했는데 일성회 내에서만 경쟁률이 자그만치 60대1일 정도였고 진영회와 연동파도 15~20대 1일정도로 사람들이 몰렸다.
하지만 이건 말 그대로 경쟁률일 뿐이지 실질적으로 학력과, 능력, 그리고 면접까지 더 하면 실질 경쟁률은 그 절반에 반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못 해도 기본적인 영어를 구사 할 줄 알고 해외에 나가는데 당연히 결격사유가 없어야하고 정신력이나 신체능력도 받쳐 주어야 했다.
물론 신체능력이야 기본체력 이상만 되면 되었고 머리가 빠릿하게 돌아 가냐, 그리고 끈기가 있느냐가 제일 중요한 것이었다.
이정도면 받쳐 줘도 면접도 수월하게 통과되고 발탁될 수 있으니 어찌 보면 그것만 받쳐 준다면 통과하는데 쉬운 일이기도 했다.
그렇게 뽑힌 이들은 선봉대가 되는데 한 달동안 이집트와 중동의 정세나 그 사람의 생활방식과 문화에 대해서 배우고 그 외에도 따로 교육을 받게 된다.
한번에 몰려 갈 수 없으니 그 후에 인원을 추려서 여러 번 끊어 이집트로 보내게 되는데 아직 그 후엔 무엇을 하게 될지는 아직 전해진 게 없었다.
다만 이제 일성회도 해외로 본격적으로 진출하는 첫 역사를 자신들이 쓰게 되었으니 흥분감을 감추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곳 상황이 한국만큼 좋지 않을 수 있어 당연히 걱정 할 수 밖에 없겠지만 그것도 감안하지 않았다면 지원 자체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기분 좋으세요?”
“예... 아주 기분이 좋습디다.”
춘배가 이집트로 가게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차이링은 열심히 해라는 말을 해주었다.
자신을 따라다니며 이집트에 대한 얘기를 꺼낸 게 한 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만석이 허락해 주었다고 처음 소식을 전해 주던 날 춘배의 웃음은 차이링이 보기에 어느 때보다도 환해보였다.
그리고 지금의 웃음은 그때와 똑같았다.
“경쟁률이 높았는데 거기에 이 춘배가 끼게 됐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고 보면 이렇게 춘배씨하고 함께하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네요.”
“교육에 들어가게 되면 보좌역을 그만둬야 할 테니 음... 누님에겐 죄송하다는 말 밖에 할 말이 없수.”
“죄송할거 없어요.”
“그래도 나만큼 하는 인물은 찾기가 어려울 텐데 이거 면목이 없습디다.”
“내가보기엔 대부분이 병풍처럼 서있던 게 다였던 거 같던데.”
신호에 차가 정차하여 대기 중인 상황에서 운전대쪽에서 들려오는 중얼거림에 춘배의 시선이 돌아갔다.
“네가 봤냐? 응? 내가 누님 곁에서 그저 병풍처럼 가만히 서있던 걸 봤냐고.”
“아니 틀린 말 아니지 않습니까? 뒤에 떡하니 서서 눈을 부라리던 모습만이 기억이 대부분인데요.”
“햐~ 요놈 봐라... 강아지 마냥 꼬리를 치켜들고 날을 세우네?”
춘배가 딴에는 무섭게 눈을 불알이며 언성을 높이는데 운전대를 잡고 있는 사내는 그 모습을 자주 보았던지 표정이 심드렁해보였다.
“몸 바로하십시오... 그리고 강아지가 아니라 고양이겠지요.”
“네가 봤냐? 응? 난 보지 못한 거 같은데? 내가 병풍이라니 햐~ 귀여운 말을 하네.”
“화내지 마세요. 춘배씨는 저에게 충분히 도움이 되었으니까요.”
“누님이 보기에도 제가 병풍같이 뒤에 서있기만 했수?”
“아니에요. 정말로 도움 많이 됐어요.”
차이링의 말에 기분이 좋은지 입가에 웃음을 지은 춘배가 손을 들어 사내의 머리에 꿀밤을 한 대 먹였다.
“에라이 요놈아.”
“아... 뭡니까? 동생에게 폭력이나 휘두르고?”
“누님을 봐라... 외모만 선녀같이 어여쁘신 게 아니라 마음도 이렇고 곱지 않더냐? 험악한 인상인 네놈은 마음만이라도 좀 속 좁게 하지 말고 넓혀봐라.”
“허.. 거참...... 갑자기 폭력을 휘두르는 형님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보고 험악하다고 말하는 건 좀 웃기지 않습니까?”
“뭐가 웃기냐?”
“인상하나만큼은 형님에게 한수 접어줘야...”
순간 다시금 날아든 우악스런 손길의 꿀밤에 머리가 다 욱신거릴 지경이었다.
“아... 폭력 쓰지 마시라니까.”
“벌이다 이놈아.”
둘이서 투닥거릴 동안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는 차이링은 애처럼 구는 모습이 웃겼던지 작게 웃음소리를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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