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화 〉 122화 마음
* * *
“으으음!”
한 참을 공부를 하던 하란이가 팔을 살짝 들어 올려 기지개를 켜며 시계를 바라보았다.
“두시가 넘어버렸네...”
열심히 공부를 하다 보니 어느새 시계바늘은 두시 십분을 넘기고 있는 시간이었다.
원래라면 두시까지 하고 자려고 했지만 십 분을 초과해버렸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어서 하란이는 천천히 노트와 서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목표를 잡고 다시 수험생이 되었으니 쉴 틈이 없었다.
제때에 수면을 취해서 체력을 보충하고 다시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말에도 식사 할 때 말고는 방에서 나오지 않고 공부를 하지만 그것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어느 정도 책상정리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잠옷을 챙기고 샤워하러 가려다 말고 폰에서 들려오는 벨소리에 전화를 받았다.
“현호오빠?”
번호를 확인하고 통화를 누른 하란이는 놀란 듯 입을 열었다.
“이 시간에 웬일이야?”
다시 입을 열어 말을 걸어오지만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오빠?”
그리고 재차 말을 걸었을 때 탁한 음성이 들려왔다.
[하란아... 잠시 나와 줄 수 있어?]
“이 시간에?”
[너희 집 앞이야. 기다릴게.]
그걸로 끝이었다.
잠시 동안 그 자리에 서있던 하란이는 난감한 모습을 보였지만 집 앞까지 찾아온 현호를 이대로 돌려보낼 수는 없는 것 같아 폰을 가지고 방을 나섰다.
1층의 응접실은 늦은 새벽시간대로 어두워서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나왔다.
마당에 나있는 길을 따라 걸어가 장금을 해제고 대문을 열고 나선 지나는 그 옆의 벽을 등지고 서있는 현호를 볼 수가 있었다.
“무슨 일 있는 거야?”
술 한 잔을 거하게 먹은 듯 보이는 현호의 모습에 지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갑자기 찾아온 것이 놀라운 일이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곁으로 다가온 현호가 어떻게 말릴 새도 없이 그대로 하란이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오, 오빠?”
갑작스럽게 어깨를 감싸 안은 현호의 행동에 하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취기가 오른 듯 보이는 현호의 모습에 무슨 일이 있는가 싶어 걱정스럽게 바라보다 벌어진 상황에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잠시 동안 그 상태로 멈칫하던 하란이 천천히 목을 껴안고 있는 현호를 밀쳤다.
아니, 밀쳐내려 했다.
“잠시만...”
밀어내려는 순간 어깨를 감싸 안고 있던 현호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대로 잠시만 있어줘.”
이걸 도대체 어떻게 받아드려야 하는 것일까.
“오, 오빠 많이 취한 거 같아.”
“......”
어떤 생각으로 자신을 이렇게 껴안는지 하란이는 생각지 않으려했다.
그저 슬픈 일이 있어 그러는 것이리라 생각을 할 뿐.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끌어안고 있는 현호는 팔을 풀 생각을 하지 않는듯 했다.
이대로 있으면 아침까지 껴안고 있을 것 같아 결국 하란은 손으로 밀며 현호를 떨쳐냈다.
아까와는 다르게 이번엔 현호도 순순히 팔을 풀어주었다.
그의 얼굴은 열기가 오른 듯 했고 눈동자엔 핏기가 서려있었다.
하지만 어딘가 슬퍼 보이는 눈동자다.
“정말로 무슨 일... 있는 거야?”
하란은 그런 현호에게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하지만 현호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하란의 두 눈을 응시할 뿐이었다.
“이렇게 술을 마시고 찾아올 정조면 무슨 일 있는 거잖아. 말을 해줘야 내가 알 수 있어.”
현호가 왜 이러는 것인지 당혹스럽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한 하란이었다.
“십년이야.”
“십...년?”
하란이는 현호가 말하는 십년을 반문하며 바라보았다.
“십년이라면.... 오빠 유학생활 말하는 거야?”
짐작을 하고 던진 질문이지만 아마도 맞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저 십년이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 할 수가 없었다.
“그래...”
역시나 자신이 짐작했던 대로 현호가 미국으로 떠나고 해어진 시간을 뜻했다.
갑자기 왜 저런 얘기를 꺼내는지 듣기위해 하란은 현호가 다시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십년은... 내가 떠나있던 시간이기도하지만...... 그리움에 사무친 시간이기도해.”
하란의 두 눈을 바라보는 현호의 눈동자는 핏기는 서려 있었지만 풀리진 않았다.
“중간에 연락도하고, 찾아가고도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어.”
지금 현호가 하는 말이 자신의 속마음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느낄 수가 있었다.
“만약... 중간에 너를 만나게 된다면 더 그리워 질 것 같았으니까. 미국에 가서야 알았어.”
천천히 팔을 들어 올린 현호가 하란의 뺨을 어루만졌다.
“내가... 널 사랑하고 있었다는 걸.”
“오, 오빠...”
갑작스러운 고백.
현호를 바라보는 하란의 두 눈이 살짝 크게 떠졌다.
지금 자신이 잘 못 들은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에 서있는 상황이 그러했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현호가 눈이 그것을 증명해 주었다.
“네 앞에 멋지게 나타나고 싶었어. 당당히 유학생활을 끝내고 어엿한 남자가 되어 나타나면 그동안의 시간을 보상 받을 줄 알았으니까.”
이어서 흘러나오는 말들 하나하나가 하란을 당황스럽게 만들기 충분했다.
하지만 현호의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이렇게 갑자기 밝히게 되어 미안해. 하지만... 네가 그 남자를 사랑한다, 좋아한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를 미치게 하는 것 같아.”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지금에서 현호는 잘 알게 되었다.
하란이가 서민준이라는 사내를 바라보는 시선이, 마음이 어떤지 그의 얘기가 나올때 행복해 보이는 모습에서 확실히 알 수가 있었다.
“나... 지금 오빠의 말을 어떻게 받아야 할지 모르겠어.”
하란은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속마음을 밝히는 현호의 행동은 그녀로 하여금 충분히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 오빠에겐 지나씨가 있잖아.”
그녀가 현호와 만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하란이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을 현호에게 상기시켜준 것이다.
“지나씨가 좋은 여자라는 건 알아. 하지만 난... 그녀를 사랑하는 게 아니야.”
미국으로까지 자신을 찾아오고 활달한 모습으로 사람을 웃게 만들어주는 좋은 여자였다.
이것저것 챙겨주기도 하고 대놓고 호감이 있다고 드러내는 당찬 모습도 있어 확실히 매력 있는 여자였다.
거기다 외모 또한 빠지지 않으니 쉽게 만날 수 있는 여자가 아님에는 확실하다.
부모님이 정해준대로 지나는 좋은 짝일 수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세진그룹의 회장이었고 앞으로 사업을 하는데 있어 큰 배경이 될 것이었다.
자신에게 관심을 드러내며 잘 대해주는 그녀였지만 현호는 그것이 부담스럽고 껄끄럽기만 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의 마음속에는 한 명의 여자밖에 없었으니까.
“내가 사랑하는 여자는... 바로 하란이 너야.”
“......”
현호를 바라보며 하란이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가 자신에게 하는 고백, 그동안 숨기고 있던 마음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니까.
“널 보고 나를 바라봐 달라고 하지 않아.”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하란이를 보며 현호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네가 그 남자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알고 있으니까.”
자신이 하란이를 사랑하는 것만큼 신경이 많이 쓰이는 법이다.
그러니 하란이가 누구에게 마음을 품고 있는지, 얼마나 좋아하고 있는지 바라보게 되고 관심을 가지게 된다.
좋아하는 이성일수록 그 상대의 마음이 어떠한지 더욱더 알고 싶어지는 게 사실이니까.
“염치없지만... 내 마음을 너에게 전해주고 싶었어.”
숨기고 있는 게 힘들었다.
자신 앞에서 그렇게 남자친구를 자랑하는 하란이를 바라보는 게 힘들었다.
“나와 줘서 고맙다.”
그리곤 몸을 돌려 현호는 그 자리를 유유히 떠났다.
‘기다릴게...’
그 시간이 얼마나 될지 모른다.
어쩌면 두 사람이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게 되는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만큼 그녀가 서민준이라는 사내를 얼마큼 좋아하는지 알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돌아서 걸음을 옮기는 현호는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나도 후회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에게 기회가 없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기다릴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하란은 샤워를 하는 동안 얼굴이 펴질 줄을 몰랐다.
그만큼 현호가 찾아와 한 말은 충격적이었다.
‘오빠...’
샤워를 끝내고 수건으로 닦고 옷을 갈아입은 후 방으로 돌아온 하란이 헤어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다말고 잠시 동안 멍하니 앉아있었다.
‘미안해...’
하란은 조금 전의 현호의 모습을 떠올리며 속으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난... 오빠를 웃게 만들어주지 못 할 거야.’
현호가 자신을 얼마나 좋아하고 있는지 느낄 수가 있었다.
그의 능동자가, 떨리는 목소리가 그것을 전해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란이 또한 현호와 같은 마음을 품고 있어서 더 가슴깊이 와 닿았다.
그래서 슬픈 것이다.
자신은 현호를 웃게 만들어주지 못 할 테니까.
대호방파의 일이 있은후 지방의 조직들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전국구에다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권호식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일성회를 괴롭힐 수 있는 힘과 세력이 있던 자였다.
그랬던 사람이 응급실에서 산소 호흡기를 끼고 중태에 빠져 헤어 나오질 못하고 있으니 충격이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 정도의 인물도 한 순간에 끝장 날 수 있다는 것을 이만석은 당당히 보여주었다.
상황이 그렇게 되니 당연하게도 일성회를 좋지 않게 생각하던 이들은 긴장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들이 힘이 있어봐야 대호방파에 미치지 못 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산의 도끼파가 기습적으로 종진파를 습격하면서 허물어트리는 모습에 또다시 식겁을 해야 했다.
종진파 또한 일성회에 반기를 품고 있던 나름 힘 있는 조직들 중에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영도와 남포일대를 가져가게 된 도끼파의 세는 부산전체의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었다.
장덕구는 누구보다 일성회에 협조적이었고 따랐다.
그만큼 자신에게 돌아오는 콩고물이 크다는 것도 잘 알고 있는 인물로 야망보다는 실리를 택했던 것이다.
사라진 박종진은 결국 실종자처리가 되고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미 그가 죽었을 것이라는것에 기정사실화했다.
차이링의 발 빠른 조치로 인해 그의 운명은 정해졌던 것이다.
“형님도 형님이지만 누님도 참 대단하십니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춘배가 누런 이빨을 보이며 웃음을 지었다.
“외모만 아리따우신 줄만 알았더니 이렇게 냉정하고 무서운 분인 줄 누가 알겠수?”
“한국에 그저 놀러온 것이 아니니까요.”
도끼파의 상황을 보기위해 부산에 직접 들렀다가 서울로 올라오는 차안이다.
옆에서 차이링이 하는 바를 지켜보던 춘배는 박종진과 가까웠던 싹을 확실히 처리하기위해 손을 쓰는 모습을 보고는 등골이 다 서늘할 지경이었다.
이런 여자를 두고 아름다움을 뽐내면서도 접근을 하지 못하게 침을 숨겨두고 있는 가시 돋은 장미라고 하는 걸게다.
“민준씨에게는 아무 말 하지 말아요.”
“암요~! 누구의 명인데 제가 형님에게 꼬바르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십쇼. 손가락 절단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누님의 그 잔혹한 손속이나 냉정한 성격은 절대! 이 춘배가 맹세코 형님 앞에서 떠벌이거나 나불대는 일 없이 무덤까지 가지고 갈 테니까 말이요..”
호탕하게 말을 내뱉는 춘배의 모습에 차이링은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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