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화 〉 118화 질서
* * *
“흐음...”
조용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는 바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아직 이른 저녁시간대라 손님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칵테일이나 위스키 한잔 걸치기에는 잔잔하면서도 조용한 이런 분위기가 좋았다.
거기에 한 명의 남자와 마주 앉아 칵테일 한잔을 마시고 있는 여인의 외모가 눈에 띄는데 오뚝한 콧날에 붉은 입술, 그리고 휘어진 눈매가 도도해 보이면서도 누가 봐도 예쁘다고 할 만큼 아름다웠다.
짧은 레이스치마에 하얀색 하늘거리는 블라우스를 입고 있어 풋풋한 느낌도 들고 절로 눈길이 가는 여자였다.
그런 그녀와 자리한 남자의 외모 또한 무시 하지 못할 것이 조화를 이루는 눈과 코, 그리고 반듯한 턱 선은 또렷한 이목구비를 연출해 누가 봐도 잘생겼다고 할 만한 훈남 이었다.
그런 사내를 여인은 신기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별일이네요.”
그러다 내뱉은 말에 사내는 쓴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지나씨를 부른 것이 말입니까?”
“네, 맞아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지나.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녀의 대답이 조금은 의외였던 것인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녀가 저런 대답을 하는 게 틀린 것도 아닌 것이 이렇게 지나를 갑작스럽게 연락을 해서 부른 것은 처음이라 딱히 뭐라고 할 말은 없다.
“이렇게 현호씨가 절 만나자고 한 이유가 무엇인지 오면서 생각해 봤어요.”
가만히 바라보는 현호를 향해 지나가 다시 말을 이었다.
“여러 가지 가정을 두고 생각은 해 봤는데 현호씨가 절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짐작은 하고 있어서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운 거 있죠? 갑가지 나에 대한 호감이 올라가 그랬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것 같고... 이런 적은 처음이라 감이 잡히지가 않아요.”
그녀가 알고 있는 현호는 사전에 문자로 연락을 하고 시간대에 맞춰 전화 통화후 약속장소를 잡는 것이 보통이었다.
물론 대부분이 자신이 먼저 문자를 보내서 만남이 이루어졌지만 중요한건 이렇게 당일에 연락해서 만난 적은 없다는 것이다.
그것도 갑자기 전화를 해서 불러낸 것은 현호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일에 충분했다.
“말 해봐요. 그저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저보고 만나자고 한 것은 아닌것 같은데?”
자신을 빤히 처다 보는 지나의 질문에 현호는 가볍게 얼음을 띄운 위스키 한 모금을 마시며 목을 축였다.
“지나씨와 정식으로 교제해보고 싶습니다.”
“네?”
놀란 듯 자신을 바라보는 지나의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당황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만나기는 했지만 지나씨 정도면 충분히 예쁘고 매력 있다고 생각합니다.”
놀란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며 바라보던 지나가 의미심장한 목청으로 입을 열었다.
“설마 이렇게 현호씨에게 고백을 받을 줄 몰랐네요. 지금 제 심정이 어떤 줄 알아요?”
“놀랍고 당황스럽겠죠. 짐작은 하고 있습니다.”
“네, 맞아요.”
사전 조율 없이 전화 연락을 받고 만나자는 전화를 받았을 때 지나는 의아한 심정이었다.
지금까지 이렇게 만난 적이 없었던지라 그런 것도 있지만 그저 대화만을 나누기 위해 만나자고 한 것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가 알려준 바에 오기 전에 여러 가지 생각을 하긴 했지만 설마하니 고백을 받을 줄은 몰랐다.
“갑자기 저하고 사귀고 싶은 생각은 어떻게 든 건가요? 농담이라도 한 순간에 절 좋아하게 됐다는 말은 하지 말아요.”
“아까도 말했지만 지나씨 정도면 어디하나 부족한 것 없습니다. 고려대에 다닐 정도면 공부를 못하는 것도 아니고, 외모는 누가 봐도 아름답다고 할 정도로 빼어나니까 말입니다. 거기다 집안은 말할 것도 없죠. 그것만 보면 솔직히 지나씨에 비해 제가 부족하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갑자기 안하던 칭찬도 이렇게 많이 하시고... 정말로 놀랍네요.”
의외의 말이 연속으로 이어져 나오자 확실히 놀래 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허나 내심 싫지는 않은 것인지 입가에 작은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사실 아버지가 지나씨와 저를 이어주려 하는 것 때문에 좀 부담스러웠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마음이 든거 예요?”
“제가... 성숙하지 못 했기 때문입니다.”
“흐음...”
현호의 답변에 지나는 다시금 숨소리를 내며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며 자신을 바라보는지 모르지만 현호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고 기다려주었다.
“하란씨 때문이죠?”
“......”
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었을까.
현호는 지나가 질문을 던졌음에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에게 남자친구가 있어서 그런 건가요. 그렇기 때문에 저와 사귀기로 생각을 정리한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번엔 현호는 침묵을 지키지 않고 입을 열었다.
“현호씨... 지금 당신 표정이 어떤지 알아요?”
놀랐던 것과는 다르지 어느새 안정을 찾은 지나가 차분한 표정으로 빤히 처다 보았다.
“우울해 보여요. 당신 얼굴을 보면 전혀 사귀자고 고백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보이지 않는단 말이에요.”
아니라고 말을 해야 했는데 현호는 그렇게 대답 할 수가 없었다.
“나... 이런 식으로 당신하고 교제하고 싶지 않아요. 당신의 고백은 충분히 놀랄만한 일이지만 받아들이진 않겠어요.”
칵테일을 한 모금 마신 지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당신은 혼자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 할 것 같네요.”
그리곤 돌아서 가버리는 그녀의 모습을 현호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바를 나온 지나는 주차되어 있는 자신의 차로 걸음을 옮기면서 조금 전의 현호의 모습을 떠올렸다.
‘둘이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갑자기 정신으로 교제를 하자며 말하는 현호의 모습은 평소의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었을 때 현호가 하란이라는 여자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질문을 했던 것이다.
예상 했던 대로 현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 했고 솔직히 기분도 조금은 좋지 않았다.
‘그렇게 그 여자를 좋아했을 줄은 생각 못했어.’
현호가 하란이라는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지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봐도 알 수 있을 정도의 슬픈 표정을 자신도 모르게 드러낼 만큼 현호가 그녀를 좋아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어느새 차에 올라탄 지나는 안전벨트를 하고 시동을 킨 상태에서 잠시동안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누군가를 그렇게 좋아할 수가 있는 걸까.’
지나는 아직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현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건 사랑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아온 지나는 아직 사랑이라는 걸 해보지 못 했다.
그래서 진심으로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게 무엇인지 보고 듣기는 했지만 마음에 와 닿지가 않았던 것이다.
현호를 생각하던 지나는 문득 이만석과 만남을 가졌던 일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를 놀려주려 만났던 것과 다음날 영화도 보고 놀이공원에 갔던 것, 그리고 그와 뜨거운 밤을 보낸 것 까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뜨거운 밤을 보냈던 일들을 떠올리던 지나는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얼굴이 떠오르자 자신에게 고백했던 현호의 속마음을 알게 되어 서운했던 감정이 사라지며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었다.
열이 오르는 것인지 얼굴도 화끈거리는 지나였다.
열심히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호객행위를 하던 삐끼가 갑자기 입구 앞에 멈춰선 두 대의 승용차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누군데 남의 영업을 방해는 거야?’
다른 손님이 들어가지도 못 하게 입구에 차를 멈춰 세운 것이 상당히 거슬리게 했다.
하지만 손님일지도 모를 일이었으니 눈살을 찌푸렸던 것을 금세 지우고 그쪽으로 다가갔는데 차문을 열고 내리는 이들을 보곤 다시 멈칫 해야 했다.
정장차림의 사내들은 모두 무표정이었고 군기가 살아있는 모습이었다.
분위기도 무거운 것이 손님과는 거리가 멀었고 이 사람들이 밤일을 하는 이들이라는 걸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상대 파 조직인가?’
비록 삐끼라고 하지만 이곳 나이트클럽을 누가 운영하는지 잘 알고 있는 그로써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앞차의 뒷문을 열고 내리는 사내에게 절로 눈길이 갔는데 호남형의 인상의 잘생긴 남자가 걸음을 옮기자 그 뒤로 남자들이 자연스럽게 뒤를 따랐다.
‘아무래도 뭔 사단일 벌어지려나보다.’
이런 모습은 처음 보는지라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어서오십시...”
안으로 들어서는 사람들을 보며 대기중이던 웨이터로 보이는 이가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다가가다 그 자리에 멈칫하고 말았다.
“권호진이 여기에 있다고 들었는데.”
“예?”
자신을 바라보며 질문을 던지는 사내의 말에 순간 반문하며 바라보았다.
영문을 몰라 당황하는 웨이터를 제치고 그때 양복 차림의 한 명의 남자가 앞으로 다가왔다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었던 걸까.
알고 있었다는 듯 공손한 자세로 말하며 웨이터를 물리는 남자였다.
“하지만 뒤에 오시는 분들은 밖에서 대기하셔야 합니다.”
순간 뒤에 서있던 이들이 자신을 죽일 듯이 살벌하게 바라보는 시선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일성회 사람들이라 그런지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구나.’
갑자기 자신에게 주먹이 날아드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었던 남자였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밖에서 기다려.”
자신과 대화를 하던 사내가 한마디 했을 뿐인데 죽일 듯이 노려보던 살기는 씻은 듯이 사라지고 절도 있게 고개를 숙인 후 물러났다.
그 모습은 확실한 상명하복으로 이들이 얼마나 눈앞에 있는 사내를 믿고 따르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일성회의 후계자라더니...’
이 모습은 남자는 물론이고 카운터와 주변에서 바라보든 이들 모두를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이만석이 안으로 들어선 직후 위쪽으로 연락을 취했고 안내를 맡은 남자의 모습은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이만석이 올 거라고 연락을 받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아까보다 좀 더 조심스러워진 남자가 길을 안내했다.
권호진이 있는 곳은 하와이 나이트클럽 2층의 특실에 있었으므로 계단을 올라 복도를 지나 안쪽으로 걸어가는데 조금의 시간이 걸렸다.
가는 중간에 지키고 선 떡대들이 있었지만 남자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제지를 하지 않고 옆으로 피해주었다.
그렇게 문 앞에 당도했을 때 조심스럽게 노크를 하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오셨습니다.”
유정이 따라주는 맥주 한 잔을 걸치고 있던 권호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옆으로 몸을 피해주자 안으로 들어선 이만석은 딱 봐도 거구에 혼자만 여자를 끼고 있는 이가 권호식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상당히 젊어.”
안으로 들어선 이만석을 보고 권호진이 내린 결론은 이만석이 자신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젊다는 것이다.
20대 초중반으로 보이니 들려오는 명성에 비해서 확실히 젊다고 생각이 들었다.
“둘이서 얘기하고 싶은데.”
다른 곳에 시선을 두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며 이만석이 입을 열었다.
아무리 일성회의 후계자라도 권호식 보다 나이가 훨씬 어려보이는 이만석이 반말을 했기 때문일까.
주변에 앉아 있단 대호방파의 간부들의 얼굴이 좋지가 못했다.
“다들나가.”
“형님?”
“그게 무슨 말 입니까?”
이만석을 탐탁지 않게 바라보던 이들이 권호진이 하는 말에 당황한 듯 바라보았다.
“나보다 나이가 어린 이 친구도 순순히 혼자서 들어왔는데... 너희들을 데리고 얘기를 나누면 내 모습이 꼴사납잖아.”
“아니 그렇지만...”
얼굴에 큰 점을 가지고 있어 이름보다 점박이로 통했던 남자가 뭔가 반박하려는 듯 입을 열려고 하저 권호식이 다시 막아섰다.
“토 달지 말고 나가라면 나가.”
결극 할 말은 다 하지 못하고 입맛을 다신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머지 사람들도 소파에서 엉덩이를 때고 몸을 일으켰다.
“너도 밖에서 기다려.”
허리를 껴안고 있던 유정이를 보며 권호진이 한 말이다.
하나 둘 룸에서 나가고 눈치를 보며 유정이 마지막으로 나가게 되자 룸엔 이만석과 권호진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자리에 몸을 앉힌 이만석을 보며 잔을 앞에 놔두고 양주병을 들어 따라주었다.
“한 잔 들지.”
그가 따라준 양주를 한 번에 털어서 마셔버린 이만석이 잔을 내려두었다.
“젊은 친구가 생각 외로 잘 마시는군 그래? 마음에 들어. 나도 한 잔 따라주겠나?”
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권호진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인 이만석이 양주병을 들어 권호진의 잔에 따라주었다.
“고맙군.”
이만석처럼 한 번에 털어 넣었던 권호식이 사람 좋은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앞으로 우리 미래에 대해서 한 번 대화를 나누어 볼까?”
거구의 몸과는 다르게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는 목소리로 말하는 권호식의 음성은 상당히 듣기 좋았다.
“네놈은 글러먹었다.”
“뭐?”
상당히 젊은 외모에다 자신의 말에 순순히 따르며 좋게 나오는 모습에 입을 열었던 권호식은 방금 자신이 잘 못 들은 것이 아닌가 싶어 반문을 하며 처다 보았다.
하지만 이어서 날아온 것은 말이 아니라 조금 전에 자신의 잔에 따라주었던 양주병이었다.
콰자작!
얼마나 무지막지한 힘으로 안면을 강타한 것인지 코뼈가 내려앉으며 아면이 뭉개지면서 양주병이 깨지며 흩어졌다.
순간적으로 머리가 핑 돌려 뒤로 넘어진 권호식이 뭐라고 말을 하지 못 하고 고통스런 숨소리를 내뱉으며 입만 뻥긋거리기만 했다.
권호식이 안면이 뭉개진 채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 하고 있는 사이 어느새 품에서 담배를 꺼내든 이만석이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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