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화 〉 116화 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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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오후 박동구는 눈앞에 앉아 있는 이만석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한국에 돌아오고 난 후에 전화 연락을 받은 적은 있지만 이렇게 대면 하는 건 오랜만이었으니 당연히 긴장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말하는 것은 마치 기름칠을 한 것인지 아부섞인 발언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박동구가 하는 얘기를 전부다 들은 이만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되면 대통령 쪽에서 좀 놀라겠군.”
“놀라는 정도가 아니지요. 표현을 안 해도 그 양반은 은근히 장인어른이 대선후보로 나서길 바라고 있으니까요.”
연내회동은 물론이고 당내의 세력을 규합하는데 그의 행동은 조용하면서도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친 김철중계 의원들 중에서도 젊은 의원들은 혁신의 아이콘으로 이름을 알린 박동구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비록 그들의 숫자는 많지는 않았지만 중진의원들이나 원로들에 비해서 약할 뿐이지 당내의 영향력은 없지 않았다.
특히 친 김철중계 뿐만이 아니라 윤정호계에 속하는 젊은 의원들 또한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특히 요즘같이 선거철이 다가오는 기간엔 당연히 당내에서 여러 구설수나 말들이 많아지게 되는데 저것을 두고 뭔가 음밀한 야합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말들도 나오기도 했다.
그렇지 않으면 친 윤정호계를 자처하는 젊은 의원들이 김철중 의원의 사위이자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박동구와 가까이 할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딱히 불미스런 일이나 그런 것도 없었고 이미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가 끝나고 젊은 의원들을 중심으로 혁신위를 구성되어 가고 있는지라 대놓고 뭐라 하기도 그랬다.
당내의 기류에선 이미 김철중 의원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얘기도 하나 둘 나이기도 했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리고 있는 윤정호 의원을 두고 대책이 나와야 하는데 아직까지 크게 거론 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본격적인 당내 경선방식을 두고 여러 얘기가 오고가며 제대로 행보에 뛰어 들 것이란 말도 많았지만 분명 석연치 않은 면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위기를 보면 장인어른이 윤정호 의원의 지지를 선언하는 순간 돌아설 사람들이 몇 되긴 하지만 그들만으로는 힘들 것입니다.”
무엇보다 언론 쪽에서 이미 윤정호 의원에 대한 바람이 불어가고 있는 실정이었다.
윤정호계는 말할 것도 없고 친 김철중계의 의원들 또한 하나 둘 박동구가 노력해서 포섭을 하고 있는 상태라 나쁘지도 않았다.
친 김철중 의원을 중심으로 그를 따르는 계파라고해도 자신들에게 돌아가는 이익 또한 생각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어서 박동구의 말은 나쁘지가 않은 것이다.
언론과 당원들의 여론, 그리고 지지층들의 조사에서 보면 확실히 바람은 윤정호 의원에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들이라고 불안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다음 대 국회의원선거에서 공천 피바람이 불어 닥칠 수도 있는 일이기에 여러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처지였다.
그런 것을 잘 알고 있는 박동구는 초선의원들에다 자신을 중심으로 계파 내에서 힘을 내고 있는 상황이니 포섭을 하여 끌어들이는 데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아무리 대통령이 막으려 한다 해도 그때는 이미 늦었으니 별 수 없을 것이지요.”
박동구는 이만석의 능력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왜 언론 쪽에서 윤정호 의원의 바람이 불고 있는지 그 이유도 알고 있는 것이다.
그가 보기엔 윤정호 의원은 다음대 대통령이 확실히 될 것이라 보았다.
이만석이 그리 될 것이라고 말하는데 어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집트에서 벌어진 일련의 일들에 대해서 그는 모든게 이만석이 개입하여 벌어진 일이라는 걸 철썩 같이 믿고 있었다.
투랍 대통령이 물러난 것도, 리자 아마사피 총리가 테러에서 살아남아 권력을 쥐게 된 것도 여기 있는 이만석이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쪽은 신경 쓰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니고 철저히 보고를 통해 한점 빠짐없이 이곳 상황을 다 알려드리겠습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박동구는 경외심이 가득한 시선으로 이만석을 우러러 보았다.
박동구 인생에서 이렇게 발이 땀이 나도록 일을 한 적이 있을까.
처음 정치에 입문하여 국회의원 뱃지를 달기위한 노력을 할 때말곤 없었을 것이다.
“커피한잔 할까?”
저녁 9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하란이에게 있어선 이른 시간이었다.
이 시간이면 한참 열을 올리며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시간인데 오늘은 일찍 나선것이다.
여기 앞에 까지 찾아와서 잠시 얘기 좀 하자는 현호 때문에 나오긴 했지만 집으로 돌아가면 2시까지 이어서 공부를 해나갈 참이었다.
근처 카페에 이동한 두 사람은 2층에 올라가 아쪽에 자리를 잡았다.
2층으로 올라간 것은 한산해서이기도 했고 이왕이면 대화를 나누는데 구석진 자리가 좋을 것 같아서였다.
“뭐 마실래?”
“카페모카로 할게.”
“알았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현호가 1층으로 내려갔다.
잠시 후 번호가 적혀있는 알람기를 가지고 올라왔다.
“시간 내줘서 고마워.”
“아니야... 공부는 집에 가서도 할 수 있으니까.”
고개를 가로젓는 하란이를 보며 현호는 그래도 미안하지 다시 입을 열었다.
“집에서 하는 거와는 분위기가 다르잖아.”
“학원을 나와 집에서도 매일같이 하던 거니까 익숙해. 그런데 오빠 무슨일 있어?”
갑자기 만나자고 한 현호에 대해서 걱정스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혹시나 안 좋은 일이 생긴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일 없어.”
“정말이야?”
“그럼... 그러니 거기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아도 돼.”
“오빠가 그렇게 말하니 믿을게. 그러면 왜 보자고 한거야?”
갑자기 학원 앞까지 찾아와서 만나자고 한 현호에 대해서 솔직히 궁금하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미안해.”
“괜찮다니까. 그러니 사과하지 않아도 돼.”
“너 공부하기 바쁠 때인데 내가 시간 뺏은 거잖아. 그것도 네 얼굴 한번 보고 가자는 이유만으로.”
“한 번 보고 가고 싶어서 부른 거였어?”
“그래... 그래서 미안하다는 거야.”
어떻게 들으면 좀 어이없는 말이기도 했는데 하란이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그것 때문에 그렇게 계속 미안하다고 사과한 거였어? 한 번쯤 이렇게 머리도 식힐 겸 얘기를 나누는 것도 괜찮으니까 그렇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좋지 않게 생각하지 않을까 내심 걱정이었던 현호는 하란이가 이렇게 말하니 다행이기도 했고 고마웠다.
알람기에서 진동이 일며 불빛이 반짝여서 자리에서 일어난 현호가 1층으로 내려가 아이스커피 두 잔을 가지고 왔다.
빨대를 꽂아 마시니 카페모카의 특유의 향과 맛, 그리고 시원함이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었다.
“오빠 하는 일은 잘 되어가?”
“응... 이제 기획실에 들어가 배우는 단계이기는 하지만 나쁘진 않아.”
아버지 밑에서 승계수업을 맡기 전에 하나하나 차근차근 밟고 현장 업무를 둘러보며 경험을 쌓을 참이었다.
그 출발선은 현호가 생각하던 그대로 흘러가고 있었으니 말 그대로 나쁘지는 않은 상황이었다.
“그렇구나... 저번에 연회에 갔을 때 오빠 멋지더라.”
단상에 올라가 연설을 하는 모습이나 재계 인사들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서 전혀 죽눅든게 없는 것이 멋저 보였다.
“멋지긴...”
조금 쑥스러운 마음이 들어 내빼는 현호였지만 입간엔 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니야 오빠정도면 상당히 멋있지. 거기다 그 유명한 세진그룹의 지나씨와 가까운 사이 일 줄은 상상도 못 했어.”
한국사람이라면 세진그룹에 대해서 모를 리가 없다.
수위를 다투는 대기업에다가 전자업계에서는 글로벌 시장에서도 탑을 지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TV나 냉장고, 에어컨 같은 가전제품은 물론이고 스마트폰에서도 작년에만 총 스마트폰 판매가 1억 5000천만대를 돌파하며 프리미엄 시장은 물론이고 상대 업체 보다 한 발 빠르게 인도와 동남아 지역을 중심으로 중저가 제품군을 잇달아 선보이며 연간 판매대수를 갈아치우고 있었다.
처음엔 특허권을 두고 여러 소송 전에도 많이 벌이며 갈등을 보이기도 했는데 그 때문에 들어간 비용도 많았지만 오히려 그것이 외신들을 통해 상황을 중계하듯 계속해서 신문에 실리니 제대로 홍보가 된 것이다.
프리미엄 폰 시장만 두면 3대중에 1대가 세진이었지만 중저가 스마트폰을 더하면 얘기가 달라질 정도로 공격적인 투자와 마케팅을 아끼지 않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런 세진그룹의 총수 일가의 막내딸인 지나와 가까워 보이는 현호는 하란이에게 있어 상당히 놀라운 일이었다.
“지나씨라면 오빠에게 전혀 부족하지 않을 거야.”
자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생글거리며 지나에 대한 얘기를 꺼내는 하란이를 바라보면서 좋았던 기분이 가라 앉는 느낌이었다.
“그 남자... 하고는 잘 지내?”
“민준 오빠?”
“응... 전에 보니까 괜찮은 사람 같던데......”
“나한테 정말 잘해줘... 이것저것 챙겨주기도 하고......”
이만석의 애기가 나오자 얼굴을 붉히는 하란이의 모습은 현호의 마음을 더욱 쓰라리게 만들었다.
“그 사람이 그렇게 잘 해줘?”
“응... 오빠도 그때 봐서 알잖아. 얼마나 괜찮은 남자인지. 내가 이렇게 다시 마음을 잡은 것도 민준 오빠 덕분이고... 지금도 그래.”
“많이.. 사랑하는거야?”
하고 싶지 않은 질문이었지만 현호는 떠보는 마음으로 슬쩍 물어보았다.
“뭐?”
“괜찮아 말 해봐.”
질문이 당황스러웠는지 놀란 표정을 짓는 하란이를 보며 현호가 달래듯 말했다.
“그걸 어떻게 말해...”
현호 앞에서 자기 마음을 밝히는 게 부끄러운 것인지 말끝을 흐렸다.
시선도 제대로 맞추지 못 하고 수줍어 하는것이 얼마나 그를 생각하고 있는지 다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하란아...’
그 모습을 바라보는 현호의 마음은 상당히 씁쓸했다.
“나... 사랑해.”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뜸을 들이며 말을 못 하던 하란이가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누구 앞에서 이런 말 하는 거 당황스러운데... 오빠니까 밝혀도 좋을 것 같아.”
그렇게 운을 땐 하란이가 여전히 수줍어하고 있었지만 고개는 들었다.
“솔직히 누구를 이렇게 생각하고 마음에 품은 적이 없었던 것 같아. 매일 같이 생각나고, 떠오르고 보고 싶어. 그 사람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을 만큼 봐도 또 보고 싶어지는 사람이야. 그저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은 것 같아. 가슴이 두근 거리기도하고.”
말을 하면서 하란이는 이만석을 생각하는 듯 했다.
하지만 시선은 현호에게서 돌리지는 않았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어렸을 때 이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적은 있었던 것 같아.”
“어렸을 때?”
가만히 하란이의 얘기를 듣고 있던 현호가 어릴 때라는 말에 호기심을 들어냈다.
“응... 마치 나를 친여동생처럼 예뻐해 주고 행복한 한 때를 보내게 해주었던 오빠에게.”
이건 의외의 말이라 현호가 눈을 깜박이며 바라보았다.
“그냥 오빠하고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즐거웠어 재밌었고. 그게 좋아하는 감정인지는 몰랐지만 미국으로 간다고 했을 때에서야 어렴풋이 느꼈던 것 같아. 내가 오빠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하고.”
거기까지 말한 하린이가 이런 얘기를 꺼내는 건 쑥스러운지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지금은 제대로 알 수 있어. 내가 민준 오빠를 바라보는 감정이 무엇인지.”
따뜻하게 가슴에 안아주었던 그 품속이 너무도 포근했다.
마음속에 응어리지고 있던 것을 날려 보내기라도 하듯 그렇게 눈물을 흘렸었다.
“나... 정말로 그 사람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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