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 88화 거래가 아닌 고용
* * *
“오랜만이군.”
[당신답지 않은 멍청한 짓을 저질렀어.]
“그녀석이 너에게 감정이 많았던 것 같아서 말이야. 통사정을 하기에 들어주었는데... 말 그대로 머저리 같은 행동이었어.”
[날 찾고 있겠지.]
“안나... 계속 그렇게 도망 다닐 수 만은 없는 일이야. 나와 협상을 하는 게 어떤가.”
[협상...?]
“이렇게 전화를 건 것도 그걸 알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하는데 틀렸나?”
[뭘 두고 협상하겠다는 거지.]
“네가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는 조건으로 너의 목숨은 보장하지. 거기다 청을 넣어서 다시 복귀할 수 있도록 노력해보겠네.”
말을 하면서 엔더슨은 고개를 돌려 눈치를 주자 추적을 하던 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안나 너라고 해도 도망다니는 데 한계가 있는 법이라는 걸 체감하고 전화 했을 것 같은데 틀렸나? 내가 너에게 기회를 줄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다는 거야.”
[그거 알아?]
“뭘 말인가.”
[협상 따위를 하려고 당신에게 전화 건 것이 아니라는 것을.]
“협상 따위를 하려고 전화를 건 것이 아니다?”
[엔더슨... 넌 내손에 죽는다.]
“그 말을 하려고 전화를 걸었나.”
협상을 하기위해 전화를 건 것이 아니라는 것에 잠시 의아함을 드러냈던 엔더슨이었지만 다음으로 이어지는 안나의 말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렇진 않아. 그전에... 작은 선물을 주려고 그런 거니까.]
“선물?”
[가는 길에 쓸쓸하진 않겠지.]
그것으로 끝이었다.
자기 할 말만하고 끊어버리자 엔더슨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한 모습을 보였다.
“리바니 거리입니다.”
전화가 끊어지기 무섭게 추적을 하던 요원에 엔더슨에게 안나의 위치를 바로 알려주었다.
“리바니 거리라고?”
그 말에 엔더스의 얼굴에 이채가 띄어졌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리바니 거리라고하면 여기서 채 10분도 안 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빨리 가서 잡아.”
그의 말이 떨이지가 무섭게 위치추적을 통해 드러난 안나를 잡기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정말 날 죽이려고 작정을 한 것인가?’
전화가 끊어지기 전의 안나의 말이 좀 불안하긴 했지만 리바니 거리라면 거리가 멀지 않아 거리 주변을 빠르게 포위 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유동인구가 많아 일일이 찾기가 힘들다는 점이 좀 걸리기는 했다.
‘간이 큰 것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군.’
정말로 협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경고를 하기위해 대담하게 위치추적을 당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직통으로 전화를 걸어오는 안나의 생각방식이 이해가 가지 않는 엔더슨이었다.
전화를 끊은 안나는 이곳으로 몰려들 인원들이나 시간에 대해선 이미 사전에 생각을 해두고 있었다.
이곳까지 10분정도의 거리에 유동인구 또한 많다는게 택한 이유 중에 하나였다.
역시나 시간이 흐르자 이집트 경찰들은 물론이고 드문드문 CIA측 사람이라 생각되는 인물들 또한 포착되었다.
‘움직여 볼까.’
눈으로 사람들을 하나둘 살펴보는 그들의 시선에 따라 최대한 기척을 죽인 채 주변 사람들과 동화되어 조심히 걸음을 옮기던 안나는 관광객 차림이지만 한 눈에 요원임을 알 수 있는 사내의 옆을 스치듯 지나치는 순간 독침 한 개가 순식간에 그를 향해 날아갔다.
사람들이 지나가고 얼마시간이 지나자 않아 사내는 개 거품을 물며 바닥에 쓰러졌고 곧이어 사람들의 비명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는 사이에도 안나는 경찰들이 아닌 자신을 찾는 것으로 보이는 요원들에게 정해진 시간에 맞춰 최대한 찾아내어 독침을 날려주었다.
유용하게 사용할 독과함께 더불어 작은 바늘이나 침또한 구할 수 있을까 해서 이만석에게 물어보았는다.
사용목적은 예상 되었는지 왜 그것을 구하려는지 몰랐던 이만석은 안나의 얘기를 듣고 잠시 삼합회의 분쟁에서 자신을 도살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독침을 처리하면서 혹시나 유용하게 써먹을 때가 있을까 싶어 전리품으로 챙겨두었던 것을 건네주게 되었다.
그것을 이렇게 그녀가 써먹게 된 것이다.
목표물을 처리 하는데 있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교육과 훈련을 받은 그녀에게 있어 독을 다루는 법에 대해서도 숙달했기에 이런 식으로도 써먹을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녀라 해도 점점 더 포위망이 좁혀오는 현실에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포기해야했고, 다 합쳐 봐야 5명 정도 밖에 되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면 엔더슨에게 충분한 선물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유유히 그 장소를 빠져나갔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소식을 전달받은 엔더슨의 얼굴은 그대로 굳어졌다.
“쓸쓸하지 않을 것이라던 게 이것이었나...?”
어디서 구했는지 극독이 발라진 독침으로 이렇게 자신을 농락하고 사라질 줄은 몰랐던 안나의 행위에 엔더슨은 제대로 치욕감을 느꼈다.
그렇게 부글부글 끓어오는 분노를 다스리던 엔더슨은 다시 머리가 아파오려 하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마음을 추슬러는데 지금 티비를 봐야 할 것 같다는 굳은 표정의 한스의 말에 전원을 켰고 채널을 돌린 엔더슨의 입에선 욕설이 튀어나왔다.
“개 같은 일들의 연속이로군...”
방송을 통해 나오는 것은 집권여당인 무슬림국민당의 대변인의 긴급발표문이었다.
거기서 나오는 내용은 투랍 대통령과 아사드에 대한 불거진 의혹과 내막에 대한 비판을 주를 이루었고 그에 대한 해명을 할 것을 천명한 것이다.
고심 끝에 지도부 회의에서 나온 결론이며 집권여당으로써 당연히 해야 할 이리라고 밝혔다.
더불어 이일을 두고 야당들과도 대화를 나눌 것을 밝히는 내용이었다.
전원 버튼을 눌러 티비를 끈 엔더슨은 이 이해 할 수 없는 이들의 연속에 마치 자신이 바보가 된 것만 같았다.
모두가 미친 것인지 이렇게 단체로 이런 행위를 벌이는 것에 대해서 그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 엿 같은 나라는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게 하나도 없어...”
분노를 겨우 억누르며 중얼거리는 엔더슨은 그냥 전부다 때려치우고 이대로 뜨고 싶은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파격적이라고 할 수 있는 무슬림국민당의 긴급발표문에 이집트 사회는 다시금 요동치게 만들었다.
이 발표문이 있은 후부터 외신들은 이에 대한 기사를 자국에 퍼 나르기에 바빴고 시위대는 무슬림국민당의 힘 있는 행동에 지지를 하며 정부를 규탄했다.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내몰릴 것이 없을 정도로 정방위로 압박을 당하게 되자 투랍 대통령은 엔더슨에게 전화를 걸어 역정을 내뱉었는데 이 모든일이 다 그의 잘못 된 행동과 오판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당신이 리자 아마사피를 제대로 처리만 했다면 일이 이지경이 되지도 않았소!]
“말이 지나치십니다, 대통령님.”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모하메드를 희생했으면 그에 맞는 결과물을 낼 것이지 이 어찌 무능한 처사를 보여 나를 이지경으로 내몰리게 했냐는 말이요!]
“......”
[상부에 연락해 당신의 무능함을 낱낱이 따질 것이니 그리 알고 있는 게 좋을 거요!]
더 이상 할 말 없다는 듯 끊어 버린 투랍 대통령의 전화에 엔더슨은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안나가 안겨준 치욕감과 무슬림국민당의 발표문이 있은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걸려온 전화였다.
거품처럼 커져가는 막막한 상황에서 엔더슨은 제대로 눈도 부칠 수 없는 상황에 그날은 수면제를 빌어 억지로 잠을 청했다.
“엔더슨.”
자신을 깨우는 목소리에 멍한 머리를 흔들며 엔더슨의 시야에 익숙한 인영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엔 당황했던 엔더슨이었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안나.”
“선물은 마음에 들었나?”
“선물이라... 큭......!”
순간 엔더슨의 입에서 비릿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어떻게 날 납치한 거지...?”
아무리 안나라고 해도 요원들이 지키고 있는 거기에서 자신을 납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텐데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거래를 했어.”
“거래?”
“당신을 내 앞으로 데려오는 것.”
“함께하는 사람이 있었던가.”
안나의 말에 엔더슨은 쓴웃음을 지었다.
상당히 놀랄만한 발언이었지만 엔더슨은 웃기만 한 것이다.
“그곳에서 날 데려갈 정도면 소름이 돋을 정도군... 물어봐도 될까.”
한 명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말을 저렇게 하지만 자신을 잡기 위해서 안나또한 가담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물어 볼 거 없어. 여기 있으니까.”
어깨를 힘주며 지그시 누르는 압박에 엔더슨의 몸이 움찔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 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바로 뒤에 있었다는 것에 솜털이 곤두서는 엔더슨이었다.
“너는?”
그리고 드러난 얼굴에 엔더슨은 다시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등장에 엔더슨은 자신도 모르게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이곳에 내가 머물고 있는 호텔이니까.”
“호텔이라고?”
그제야 주변을 둘러본 엔더슨은 이곳이 호텔안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같은 인물이었나...”
갑자기 알았다는 듯 중얼거리는 그의 말에 이만석이 말을 걸었다.
“날 두고 하는 소린가?”
“네놈에 대해서 좀 알아보았지. 널 제거하기 위해 보낸 해결사가 그대로 사라진 것이 이상했으니까. 그런데 드러난 게 깔끔해. 너무 깔끔하고 평범해서 알아보니 같은 인상착의의 동명이인이 한 명 있었는데 이력을 보니 아주 가관이더군. 그 놈이 너이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나에 대해 작정을 하고 알아본다면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꾸며놓긴 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었지.”
“멍청한 행동이야.”
“그럴까?”
“대놓고 그런 행동을 벌이다 이렇게 드러나면 너 뿐만 아니라 주변에 피해가 갈 수 있다는 걸 모르나. 그동안의 삶과 행적을 지우고 새로 만들었다고 해도 너라는 존재 자체를 지우지 않았으니 헛수고 아닌가?”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벌이지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한국에선 쉽게 건드릴 수도 없을 분더러 아티펙트와 더불어 나름 두 사람 주변에 알람도 걸어 두었으니까.”
“뭔 소리지?”
의아한 듯 말하는 엔더슨에게 이만석은 쓴웃음을 지었다.
“만약 허튼 수작을 벌인다면 그걸로 놈들은 끝이라는 말이다.”
잠시 이만석을 바라보던 엔더슨이 다시 고개를 돌려 안나를 바라보았다.
“날 어떻게 한 참이냐.”
“죽여야지.”
“그렇게 되면 넌 완전히 우리 쪽에서 돌아서게 되는 것이다.”
“상관없어.”
“너다운 말이로군.”
예상은 했다는 듯 중얼거리는 엔더슨은 마음에 준비를 한 듯 눈을 감았다.
‘욕심에 눈이 멀었군. 스스로 죽을 곳을 찾아 들어온 꼴이라니.’
이런 식으로 자신이 죽을지 몰랐던 엔더슨이었지만 한 편으로는 이 지끈거리는 두통과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 지는 것 같아 자괴감 또한 들었다.
‘어떻게 그들을 움직였는지 물어볼걸 그랬나.’
주요 언론사들의 행동과 무슬림국민당의 파격적인 발표문의 뒤엔 서민준이라는 저 작자와 연관이 되어 있다는 것을 직감한 엔더슨은 조금은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지난 일들이 그의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던 엔더슨은 전화로 자신의 무능함을 상부에 낱낱이 보고하겠다던 투랍 대통령의 언성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나처럼 당신도 여기까지인 것 같구려.’
푸슛!
거기까지 생각을 끝낸 엔더슨은 그대로 정신을 끊을 놓아버렸다.
순간 적으로 엔더슨의 이마에 작은 구멍이 뚫려진 것이다.
망설이지 않고 그의 이마에 구멍을 뚫어버린 안나는 여전히 차분해 보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