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 86화 거래가 아닌 고용
* * *
샴페인 병을 따서 컵에 가득 따라 두 어모금 마실 동안 여인은 별다른 말없이 가만히 바라보았다.
“너도 마실래?”
그런 여인에게 실없는 웃음을 지으며 컵을 들어 권하는 이만석이었지만 여전히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는 여인이었다.
“싫으면 말고.”
단 번에 남은 술을 다 비워버린 이만석이 의자로 이동해 뒤로 빼내고 몸을 앉혔다.
“앉지.”
고개를 까딱이며 맞은편에 앉으라는 듯 제스처를 보이자 별다른 대답 없이 걸음을 옮겨 이만석의 맞은편의 의자를 빼내어 몸을 앉혔다.
여인은 청바지와 헐렁한 흰색 티셔츠에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는데 누가 봐도 관광객이라 생각해도 될 차림새였다.
하지만 조금 헐렁한 것을 보아 사이즈가 좀 큰 것 같았다.
“그 옷... 네 옷은 아닌가보지?”
아마도 다른 관광객 한태서 구한 것으로 생각한 질문이었다.
“팬티만 입고 있을 참인가?”
이만석의 대답을 깔끔히 무시해버린 여인이 오히려 반대로 질문을 던졌다.
“왜? 신경 쓰여?”
어깨를 으쓱해 보인 이만석은 마치 보라는 듯 등을 기대로 편한 자세를 취했다.
트렁크 팬티 하나만 달랑 입고 있는 상태여서 눈살을 찌푸려 질만도 하건만 여인, 안나는 그저 질문만 던졌을 뿐 별다른 인상 찡그림 없이 고개를 들어 이만석을 바라보았다.
“당신이지.”
“뭐가.”
“엔더슨이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
“엔더슨이라...”
말끝을 흐리며 대답하는 이만석에게 안나가 제차 입을 열었다.
“아사드가 죽은 것도 당신이 한 짓이 분명해.”
“어떻게 그걸 단정 짓지?”
“당신의 능력... 그리고 지금 그 행동과 말투가 그것을 증명해 주니까.”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여유로운 목소리로 대답하던 이만석은 재밌다는 듯 작게 웃음소리를 터트렸다.
“간이 크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대단하다고 해야하나...”
“......”
“일단 눌러쓰고 있는 그 모자 좀 벗지 그래.”
“도대체 뭐지?”
이번에도 자신이 한 질문에 무시하고 반대로 던지는 안나의 말에 이만석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뭐가?”
“저번에 그 모습들... 그리고 그 능력은 어떻게 그런 것들이 가능한 거지?”
“이봐... 질문을 하려면 차근차근 한 가지씩 하라고. 그리고 너만 질문하고 나는 대답만 하면 이쪽이 손해지 않아?”
“......”
침묵을 지키며 대답해주기를 기다리는 듯 바라보는 아난에게 이만석은 다시 입을 열었다.
“특별히 설명 해 줄 건 없어. 나에게 찾아온 운명이라 해두지.”
“운명?”
의문을 표하는 안나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인 이만석이었다.
“그 뿐이니까 더 이상 말 할 것도 없어. 그리고 이젠 내가 한 말에 답을 해줘야지?”
“......”
잠시 동안 이만석을 바라보던 안나는 그 상태로 별다른 말 없이 눌러쓰고 있는 모자를 천천히 벗었다.
그리곤 가볍게 머릿결을 쓸어 모자 속에 말려있던 머리카락을 풀어주었다.
“그때 멀리서 보고 지나가듯 호텔에서 마주 히긴 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확실히 예쁜데.”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은 이만석의 감탄사에 안나의 닫혀있던 입이 열렸다.
“전에 나를 본적이 있었던가.”
이만석과 마주했던 안나는 그에게 복면을 한 모습밖에 보인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 한 질문이었다.
“너도 알고 있지 않아? 한 번 말했을 텐데.”
“호텔에서 본 것은 나도 알고 있어. 멀리서 보았다는 것은 무슨 뜻이지.”
“빵!”
안나의 말이 끝나고 이만석은 갑자기 저격총을 잡고 있는 포즈를 취하더니 입으로 발사 소리를 냈다.
“이 순간을 말하는 것이지.”
그리곤 안나를 바라보며 대답하는데 그것이 무엇을 알리려는 것인지 바로 알 수가 있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었던가.”
어쩌면 맞을지도 모른다 생각을 했지만 정말이었다.
눈 앞에 있는 이 자 때문에 그때의 일이 실패했던 것이다.
한 번은 환청이었을까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생각했던 안나는 그때 리자 아마사피의 저택에서 보았던 이만석이 아닐까 의심을 하고 있었는데 역시나였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을 알게 됨에도 안나는 전혀 놀라거나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감정의 기복 없이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는 널 보면 참으로 신기하단 말이지.”
어떤 인생을 살아오면 사람이 이렇게 될 수가 있는지 호기심이 강하게 일었다.
메모리즈를 이용하면 바로 알아낼 수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나에게 찾아온 목적이 있을 텐데?”
본론이 무엇인지 물어보는 이만석에게 안나는 망설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엔더슨... 목.”
“엔더슨의 목이라...”
“그 자를 내 앞으로 데려와줘. 당신이라면 그럴 수 있을 테니까.”
“복수냐?”
이만석의 말에 안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목숨을 가지고 놀았으니 죽이겠다는 생각. 그 뿐이야.”
“흐음... 네 실력이면 기회를 봐서 엔더슨 그 자를 없앨 수 있을 텐데?”
“한 번은 벗어날 수 있었지만 두 번은 쉽지 않아.”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엔더슨의 목을 원하면서도 복수는 아니라고 하는 안나의 모습에 조금 어이가 없었다.
눈을 보면 거짓을 말하지 않는지 알 수 있어 더 그러했다.
그녀는 말 그대로 자신의 목숨을 저울질 한 엔더슨을 죽이겠다는 생각만 하는 것 같았다.
버려져서 배신감에 복수를 하겠다는 것과는 언듯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달랐다.
그냥 그를 죽이겠다는 것.
그것 하나 뿐 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어떻게 딴에는 상황을 보고 나서 결론은 나한테 찾아오게 된 것이다 이건가?”
“전에 네가 보여준 능력이라면 그를 내 앞에 끌고 오는 게 가능할 테니까.”
“대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이만석에게 안나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
“너를 나에게 준다고?”
“그래.”
“날 색욕에 미친 변태쯤으로 생각하나? 기분 나쁜데.”
고개를 가로저은 안나가 이만석을 똑바로 바라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난 가진게 별로 없어. 줄 수 있는 게 몸뚱이면 그리 하겠다는 것 뿐, 남자에게 만족스러운 성 욕구를 채워 주는 게 어떤 기쁨을 주는지 알고 있으니까.”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군.”
“그 순간만큼은 전부 머저리가 되더군. 자신이 어찌 죽는지도 모른 채.”
“음...”
자신의 치부가 될 수도 있는 말을 마치 딴 사람의 일인 양 대답하는 안나의 모습에 이만석은 작은 숨소리를 내뱉었다.
‘삶은 물론이고 생각 방식도 평범한 여자와는 거리가 멀어.’
자기 몸에 대해서 마치 남의 일처럼 말할 정도면 보통의 훈련이나 일만으로는 안 될 것이었다.
보아하니 CIA쪽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은 것 같기는 한데 이만석이 보기엔 그런 것과는 다른 쪽으로 더 지독하게 대해졌고 받은 것 같았다.
그런 과정에서 치욕이란 치욕을 다 겪었을 것이고 타깃을 암살하는데 있어 방법이 될 수 있다면 망설임 없이 사용 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때 자신을 죽이러온 자의 머릿속에서 빼낸 정보를 통해 보여진 그녀의 위치는 말 그대로 살인을 위한 도구와도 같은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자신을 죽이러 왔었던 그자 또한 이 눈앞에 있는 안나라는 여자에 대해서 두려움과 함께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분명했다.
그 바탕엔 안나가 말한 이 말과 상통하는 일들일 것임에는 분명한 사실이었다.
“다른 것으로 하지.”
“아까도 말했지만 난 당신에게 줄 것이 없어.”
“아니... 있지.”
그리곤 이만석이 안나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
“나라고?”
고개를 끄덕인 이만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
“1년.”
“......”
침묵을 지키며 바라보는 안나에게 흥미로운 시선으로 이만석이 말을 이었다.
“앞으로 1년 동안 내 밑에서 일을 하는 거다. 그 후엔 네가 어디로 가고 싶든지 보내주도록하지.”
“당신 밑으로 들어오라고?”
“그래. CIA에 쫒기는 상황이고 이젠 갈 곳도 없는 상황일 텐데 나쁘지 않은 대가이지 않아? 그리고 월 3000달러를 월급으로 지급 하도록 하지. 널 무보수로 쓰지 않겠다는 말이다.”
뜻 밖의 제안에 안나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사실 못 했다고 보는 게 옳았다.
이 말은 그녀도 전혀 생각하지 못한 대가이자 고용 조건이었으니까.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는 말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 어울리는 말인 것 같은데.”
“그런가?”
쓴웃음을 짓는 그에게 안나는 이만석이라는 이 남자에 대해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다는 듯 바라보았지만 이만석은 사실 별다른 뜻 없이 이 안나라는 여자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은 마음 뿐 이었다.
인간의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의구심이 들 정도로 기복이 거의 없는 그녀의 모습.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녀가 행했던 행동들이나, 사람을 죽이는데 있어 망설이지 않는 킬러적인 모습들을 보면 대충 그려지긴 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저 정도로 감정의 기복을 보이지 않을 만큼 냉철히 할 수 있다는 것에 흥미롭고 놀랍다는 것.
자신의 능력을 보고서도 크게 놀라지 않은 사람은 그녀가 처음이어서 어쩌면 더 흥미가 생긴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CIA쪽에서 날 죽이려고 너 처 럼 무단침입을 해서 총구를 겨누었던 놈이 하나 있었지.”
어느새 자리로 돌아가 몸을 앉힌 안나의 두 눈을 직시하며 이만석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놈을 내가 어떻게 했을 것 같아?”
“죽였겠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안나는 그 자를 죽였을 것이라 답을 내렸다.
“그래도 얼마 전까지는 같은 동료였을 텐데 냉정한 거 아닌가.”
“지금은 아니니까.”
“그런가...”
이해한다는 듯 대답해준 이만석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네 말대로 그 놈을 그 자리에서 처리했다. 물론 놈의 몸뚱이 또한 찾지 못 하도록 깔끔히 보내주었고.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 줄 아나?”
“......”
계속 말해 보라는 듯 안나는 침묵을 유지했다.
“그 놈을 죽이는데 난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어.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상황이 되면 망설이지 않고 똑같이 행동할거야. 하지만 중요한건 난 원래 이렇지가 않았다는 거다.”
“그래서...?”
“네 삶이 어땠는지 난 알지 못한다. 다만... 잘 만들어진 살인도구 같은 널 어쩔 때 한 번씩 떠올릴 때면 내 행동에 대해 한 번쯤 돌아보게 될 때가 있어. 저번의 가졌던 생각과 마음을 한 번 더 되새겨 보기도 했으니까. 너라는 존재가 새롭기도 했고 좀 흥미가 생겼다고 할 수도 있어. 그리고... 그놈이 날 찾아왔을 때 좀 실망을 했지. 왜냐하면 네가 오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을 가졌었으니까. 결론은 이렇게 제 발로 찾아와주었으니 된 것인가?”
가만히 이만석이 하는 말을 듣던 안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당신... 말이 많아.”
“그런가.”
입가에 쓴웃음을 지은 이만석이 샴페인 병을 들어 컵에 따라 두 어 모금 마셨다.
“하지만 거래는 받아드리겠어.”
“거래라고 하기 보다는 고용되었다고 하는게 좋을 것 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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