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 20화 어림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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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석이 하란과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 그 시간 정인철 회장은 뜻밖의 인물과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는 다른 누구도 아닌 삼합회의 감찰단으로 나온 장체민이라는 자로 비선을 통해 그에게 연락을 취해왔고 이렇게 전화통화를 하게 된 것이다.
“상하이에서 오신분이 먼저 연락을 다하고... 그래 무슨 일이시오?”
비아냥거리듯 말하는 정인철의 말이었지만 유창한 한국어로 들려오는 그 목소리엔 사람 좋은 웃음이 깃들어있었다.
[저희도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자리 한 번 마련해 보고자 연락을 취한 것입니다.]
“허어... 난 그쪽과 만날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대번에 거절의사를 밝히는 정인철 회장이었지만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다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냥 자리를 마련해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혹시 바라는 것이라도 있으신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바라는 것이라......”
낮은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린 정인철 회장의 입가에 작은 웃음이 깃들었다.
“뭐... 없는 것은 아니지.”
[무엇 입니까?]
“오정권이가 죽어버렸던 것처럼 나도 목을 원한다네.”
[성홍일은 이미 회장님께서 데리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오정권이의 목이 그 정도로 가볍지가 않은 법이지.”
정인철 회장의 말이 끝나고 잠시간의 시간이 흐른 후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부장의 목을 원하십니까.]
“그렇다네.”
대답을 하는 정인철 회장의 목소리를 아주 차분했다.
“좋은 소식이 들려오면 그때 가서 한 번 자리를 마련해 보도록 하지.”
그것으로 통화를 끝낸 정인철 회장은 성홍일이라는 그자로 아직 성이 차지 않는 상태였다.
자신을 장기 말로 가지고 놀려고 했던 차이링이 참으로 괘씸하였기 때문이다.
“무리한 요구를 하는 군.”
정인철 회장과 통화를 끝낸 장체민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설마하니 지부장의 목을 달라는 대범한 요구를 해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 말이 들려오는 순간 잠시 할 말을 잃은 장체민이었지만 한 편으론 정인철이라는 사람이 보통이 아님을 느끼는 일이기도 했다.
그자는 당당하게 지부장의 목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일단 쉽게 생각해볼 문제는 아닌데...”
이대로 일성회와 전쟁으로 비화가 된 다면 삼합회로써도 좋지가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이곳은 한국이었고 일성회의 안방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서회의 뒤에는 윤정호 의원이라는 떠오르는 정계의 거물이 버티고 있어 까다로운 상황이기도 했다.
물론 전쟁을 치룰 힘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닌 것이다.
“차이링과 박동구의 상황을 지켜보고 결정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내일 중으로 한번 더 차이링에게 자리를 권해볼 생각을 한 장체민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이만석은 하란과 함께 영화관을 나서며 웃음을 짓고 있었다.
어느새 팔짱을 끼고 딱 달라붙어 있는 하란은 조금 전에 본 영화에 대해서 떠들고 있는 것이다.
풋풋한 여대생의 하란은 성격이 발랄하고 밝은 아이로 보였는데 그러면서도 이만석은 전에 윤정호 의원이 말한 상처가 많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이렇게 밝은 아이가 무슨 상처가 있다는 것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를 할 수가 없는 말이어서 의구심만 들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을 하며 번화가를 걸어가고 있는 와중에 지나가던 남자가 부러운 시선으로 이쪽을 주시하는 것을 보고 웃음을 지었다.
예전 이었으면 자신이 저렇겠지만 이젠 반대의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내말 듣고 있는 거야 오빠?”
“응?”
자신도 모르게 반문을 한 이만석은 곧 뾰류퉁하게 변하는 하란의 얼굴을 볼 수가 있었다.
“뭐야 그 대답은? 오빠 내말 다 무시하고 있었지?”
“그럴 리가... 아주 잘 듣고 있었어.”
“그럼 내가 무슨 말 했는데?”
“음... 영화얘기?”
잠시 생각을 하던 이만석이 작게 중얼거렸다.
“영화에서 어떤 얘기?”
“아까 본 영화 감사평이지... 그러니까...... 그게 뭐냐 하면.”
감상평이긴 한데 방금 전에 하란이 무슨 얘기를 했는지 딴생각을 하느라 기억 할 리가 없는 이만석은 말끝을 흐렸다.
“봐봐... 내말 무시하고 있었잖아~!”
쌍심지를 켜며 노려보는 모습에 당황한 이만석이 사과를 하였다.
“미안해... 잠시 딴 생각을 하느라......”
“미안해 할 것 없어.”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란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받았다.
“농담한 거니까.”
“농담?”
“응... 그냥...... 이렇게 날 좋아해주고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괜찮아.”
“하란아...”
“오빠는 정말로 날 좋아해 주잖아... 그러니까 기분 나쁘지 않아.”
고개를 들어 바라보며 활짝 웃음 짓는 하란의 모습에 이만석이 쓴웃음을 짓고 팔짱을 풀고는 어깨를 감싸 안아주었다.
“배고플 텐데 밥 먹으로 가자. 맛있는 거 사줄게.”
예약해둔 레스토랑으로 향해서 근사한 식사를 끝낸 이만석은 바람도 쒸울 겸 차를 끌고 한강 둔치로 향했다.
조용한 곳에 차를 댄 이만석은 한강의 넓은 야경이 펼쳐진 앞을 바라보며 잠시 동안 감상을 했다.
천천히 유람선이 지나가며 야경의 풍경을 더 아름답게 하였는데 하란은 아무런 말 없이 그저 나란히 야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란아...”
“응?”
그때 침묵을 깨 고이만석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너하고 만나면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기분이 좋았는지 알고 있어?”
“나도 그래.”
정면으로 바라보며 웃음 짓는 하란의 말에 이만석이 따라 미소지어주었다.
한미희으로 인해 제대로 꽃뱀에게 대이고 한 후에 받았던 상처를 여기 눈 앞에 있는 하란이 그동안 치유를 해준 것이었다.
원 없이 좋아해주는 자신의 행동에 감동해주고, 받아주고, 웃어주는 하란은 정말로 좋은 여자였다.
이젠 하나의 휴식처같이 포근하고 따뜻한 그런 여자이기도 했다.
“나하고 사귀어 줄래?”
“오빠...”
갑작스러운 말에 하란이 눈을 크게 떴다.
“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거야. 갑작스런 일로 그게 미루어 졌지만... 지금에서야 고백을 하게 됐어.”
“......”
하란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 하고 가만히 이만석을 바라보았다.
“어중간하게 너하고 지내는 것 보다는 확실하게 해두고 싶어. 하란이 널...”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뺨을 어루만지며 이만석이 입을 열었다.
“내 여자로 만들고 싶다.”
생각지도 못한 고백에 하란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느새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들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무드 없이..... 갑작스럽게 고백하고. 하지만...... 고마워 오빠.”
흐르는 눈물을 엄지손가락으로 닦아준 이만석이 하란의 왼손을 잡았다.
그리곤 품에서 반지를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끼워주었다.
“이건...”
그리곤 반지 하나를 더 꺼내 자신의 왼손 약지에 끼고는 손을 들어 올려 보여 주었다.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준 것 과 똑같은 영롱한 빛 갈의 보석이 박혀있는 커플반지인 것이다.
눈물을 닦으며 웃음을 지은 하란이 이만석의 목을 끌어안더니 그대로 입을 맞추었다.
어느새 자연스럽게 이만석 또한 하란의 등을 살며시 끌어안았다.
“여기 레스토랑이 분위기도 그렇고 아주 좋은 곳이지요.”
“그렇네요...”
“이렇게 가볍게 와인 한 잔 즐기면서 얘기를 나누기에도 좋고 말이죠.”
조심스럽게 와인 잔을 들면서 말하는 박동구를 보면서 차이링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자리를 마련하게 되어 그와 식사를 함께하게 된 것인데 결국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장체민의 말대로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일이었고 어차피 그 전에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엔 그와 잠자리를 가지게 될 것이었다.
다만 그 시기가 빨라졌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조심스럽게 와인을 한 모금 마신 박동구가 투피스차림의 봉긋한 젖가슴과 가는 목선을 지나 붉은 입술에 머물렀다.
참으로 탐스러운 입술 이었고 가지고 싶은 마음이 몸속을 지배했다.
하지만 이젠 서두를 것 없었다.
오늘은 그저 미래에 대해 얘기만 나누려고 만난 자리가 아니었고 긴 밤 시간을 가질 것이었다.
박동구의 머릿속에는 다리를 벌리고 밑에 깔려서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매달리는 차이링의 이미지가 그려졌다.
예전부터 바라던 대로 이제 이 도도하며 자신감이 넘치는 이 삼합회의 지부장을 생각만이 아니라 현실로 몸 위에 올라탈 수 있는 것이다.
대놓고 색욕을 발산하는 박동구를 보면서도 차이링은 그저 미소를 지으며 기분좋게 응대를 해줄 뿐이었다.
그렇게 기분 좋게 식사를 이어나가던 차이링은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볼일을 보고 손을 씻은 후 잠시 거울을 바라보던 차이링은 손수건을 꺼내 손을 닦고는 화장실을 나와 복도를 걸어갔다.
하지만 그렇게 얼마 가지 못 하고 곧 걸음을 멈춰야 했는데 의외의 인물과 마주쳤기 때문이다.
“서민준...?”
깔끔한 정장 차림에 호남형의 미남자는 확실히 그녀가 알고 있는 서민준이 맞았다.
놀란 건 차이링 뿐만이 아니었는데 하란과 함께 식사를 하다 화장실에 가기 위해 나섰던 이만석 또한 여기서 이 여자와 마주칠 줄 몰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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