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 망가 용사 성공담(3)
* * *
깔끔하게 잘려나가 움직이지 않는 가고 일을 보고 나서야 모두 안심했다.
비장의 무기로 남겨두고 싶었던 발검을 일찍 꺼내게 된 건 아쉽지만, 그만큼 가고일은 위협적이었다.
"역시 대장님! 믿고 있었다구~"
"땡큐."
땡큐가 무슨 말이냐고 궁금해하는 세키돌에게 간단하게 설명을 해준 뒤 여전히 조금 벙찐 표정을 하고 있는 에린델에게 말을 걸었다.
"왜 그래? 내가 센 건 하루 이틀 아니잖아?"
"그래도 솔직히 강단백은 마법이나 태그라는걸 안 쓰면 상식적인 수준이었잖아."
"조금 전은 비상식적이었다?"
"물론이지. 눈이 좋기로 유명한 엘프 중에서도 난 뛰어난 편이야. 그런데, 뭘 했는지조차 보이지 않다니. 충격이야."
"너무 놀라지 마, 우린 더 놀라운 일을 하러 갈 거잖아."
"응."
그리고 옆에 있던 비렌데를 바라보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절대 내가 원하는 반응을 해주지 않겠다는 심술이 엿보였다.
"비렌데 마망! 저 돌덩이가 날 때렸어. 아파썽. 힐해줘!"
"주인 말투가 역겨워서 해주기 싫네. 그리고 아까 치유한 이후론 안 맞았잖아."
"무서워서 마음이 다쳤엉."
"주인은 입만 안 열면 멋있을 텐데."
혀를 쯧쯧 차는 비렌데를 보니 더 장난치고 싶었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 더했다간 텐션을 올리는게 아닌 내려박는 뇌절이 될테니까.
발검의 위력은 만족스러웠다. 놈 돌과의 물 굄을 훈련 후에 조금씩 추가로 연구했기에 실전에서 쓴건 처음이었다. 처음치고는 깔끔했다고 생각한다.
칼집에서 칼이 뽑혀나가자마자 돌아오는 느낌의 초고속 일격. 그걸 극한으로 빠르게 한다.
속도에 치중하고 연구했기에 에린델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확실히 실전에 통하는 위력 있는 필살기가 생긴 셈이다.
"좋아, 다들 준비된 것 같으니 들어가자고. 마왕을 만나러."
드디어 마왕성이라는 곳에 들어간다. 입구에는 거인도 들어갈수 있을 만큼 큰 문이 있었다.
문을 열려고 손을 댔지만 강렬한 마기가 느껴진다. 솔직히 나는 정통적인 마법사가 아니기에 마력을 민감하게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이건 인간이라면, 아니 살아있는 생물이라면 무조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온몸 곳곳을 파고들어 좀 먹는듯한 서늘하고 음습한 마력.
문을 여는 손이 멈춘다. 솔직히 문을 열기가 두렵다. 하지만, 열어야 한다. 이 문을 열고 들어가야 모든 것이 완성 될 수 있다.
핌베르트 왕국, 아니 이카르트 대륙을 구한 영웅이 된다. 그리고 내 영지를 얻어 완벽한 하렘 왕국 건설. 만화나 소설로만 보던 부러운 주인공 놈들이 될 수 있다.
쾅!
손으로 문을 열 수 없다면 발로 차면 된다. 마왕성의 대문을 걷어차고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간다.
"깜짝이야."
내가 갑자기 문을 발로 차서 에린델이 놀랐는지 흠칫거렸다.
"주인, 이 허세는 좀 귀엽네."
"허, 허세라니 손대고 열기 싫었을 뿐이야."
비롄데 말을 황급히 부인한다. 물론 허세가 아니다. 차라리 허세였으면 좋았을 텐데. 마왕의 강렬한 마력이 느껴지는 순간 무서웠다. 공포로 손이 굳어버렸기에 발로 걷어찼다.
"세키돌이 걷어차는 건 더 잘해! 이런 건 날 시켜줘 대장님!"
"마왕성에 또 올 일이 있으면 시켜줄게."
"그건 안 시켜준다는 말이네, 체엣"
"역시 세키돌은 똑똑하다니까."
그렇게 마왕성의 안으로 걸어간다. 안은 상당히 어두웠다. 하지만 육안으로 물체가 구분될 정도의 아슬아슬한 밝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분명히 창문이 없고 빛이 들지 않는데도, 약한 조명이 있는 것 같은 기묘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런걸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주변을 경계하면서 길고 넓은 복도를 걷는다.
"에린델. 뭔가 느껴지는 건 없어?"
"끔찍할 정도로 강한 마력 이외에는 없어. 이건 단백 너도 느끼지?"
"물론이야. 싸늘한 마력 때문에 추울 정도네. 털옷이라도 입고 올걸."
"아직도 농담할 정신이 있는 거 보면 제대로 못 느끼는 거 같기도 하고."
에린델에게는 태연한 척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긴장감, 공포 등등이 뒤섞여서 심장박동이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이상하게 머리는 맑았다. 그래서 공포감이 더 실감 나게 느껴졌다.
그런 복잡한 상태로 한참을 걸으니 넓은 로비가 등장했다. 마치 손님을 맞이하는 응접실의 느낌.
가운데에는 둥근 탁자가 있었고 거기에는 차와 다과류가 놓여있었다.
"여긴, 마왕성이 맞지?"
"그런 거 같은데. 이런 큰 성이 더 있을 리도 없고 끔찍한 마력이 느껴지는 것도 그렇고."
"주인. 내 생각도 확실해. 여긴 마왕성이 맞을 거야. 이런 저릿저릿한 마력은 아무 데서나 못 느끼거든."
"그런데 저 차와 다과는 뭐냐고. 마왕의 취미인가?"
"아니, 마왕님은 그런 취미는 없으셔. 내가 억지로 권하면 드시기는 하지만."
농염한 여성의 목소리. 목소리다.
"누구냐!?"
"안녕? 나는 스터시 라고 해. 사천왕이지."
분명히 주변에 아무것도 없었는데, 갑자기 탁자 앞에 여성형 마족이 나타났다. 가슴이 대부분 드러나고 허벅지도 전부 노출되어있는 방어력 높은 의상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어두운 피부색, 머리에 큰 뿔과 엉덩이 부근에 꼬리가 없었다면 인간과 상당히 유사한 외형이었다. 만나봤던 군단장들과 다르게 눈동자의 색도 어두운색이어서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그녀는 풍만한 가슴을 탁자에 얹고 턱을 괴고선 우릴 쳐다보고 있었다.
"절정의 스터시."
"어머, 넌 내가 누군지 아는구나?“
비렌데는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회피했다. 마왕군에 소속되어있었던 만큼 확실히 사천왕의 이름 정도는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찻잔의 개수가 우리랑 딱 맞네. 우리가 오는 걸 역시 알고 있었던 거냐?"
"물론이지~ 모를 리가 있겠어?"
"그런데 왜 여기까지 들어오게 놓아둔 거지?"
"우후훗, 사역마로 보니까 남자 하나가 꽤 잘생겼더라구? 데려와서 따먹으려고 놔뒀지."
"뭐?"
충격적인 그녀의 말에 나는 잠시 혼미해졌다. 온갖 섹드립에 익숙한 나였지만 비장한 각오로 온 마왕성에서 이런말을 들을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아. 꽤 귀여운 게 내 취향이야."
"미안하지만 넌 내 취향이 아니야."
"왜에? 나 정도면 몸매도 좋고 예쁘잖아? 튕기지 마."
"난 따먹히는 거보단 따먹는 게 취향이거든."
말이 끝나자마자 갑작스레 파이어랜스를 날렸다. 반응하기 어려울 정도의 빠른 속도였다.
"우후훗, 귀엽네? 기습이야? 갑자기 찔러대는 건 좋.아.해."
하지만 스터시는 미동조차 하지 않고 한 손으로 검은 물질을 날려 파이어랜스를 상쇄시켰다.
튕겨 나간 불덩이들은 차와 다과가 준비되어있는 탁자에 맞았다. 탁자는 그대로 박살났고 찻잔들은 바닥에 뒹굴었다.
"아아 너무해. 열심히 준비했던 건데."
어차피 저 녀석에 대한 정보는 없다. 부딪혀서 알아내야 한다!
지체하지 않고 바로 이어서 마법을 사용한다.
"프로즌 패터(Frozen Fetter)"
갑자기 몸 주변에 생겨버리는 얼음 족쇄. 하지만 이것조차 검은 물질을 날려 가볍게 상쇄해버리는 스터시였다.
하지만 우리의 공격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가이디드 애로우, 멀티플(Guided ArrowMultiple)"
에린델의 외침과 함께 여러 발의 유도 화살이 뱀처럼 휘어 들어가 스터시를 노렸다.
저렇게 곡선을 그리며 빠르게 날아가는 화살들을 전부 상쇄시킬 순 없을 것이다. 이건 분명 통한다!
채앵! 치잉! 치잉!
하지만 내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그녀는 검은 물질을 펼쳐 온몸에 둘러버렸다. 스터시는 검은 물질의 캡슐에 완전히 둘러쌓였고, 에린델의 화살은 전부 그 물질에 막혀 아무런 피해를 줄 수 없었다.
그야말로 완전한 방어.
"저건 대체"
"다크 매터(Dark Matter)야 일부 최상위 마족만 사용 가능한 암흑 물질이지"
비렌데가 질린다는 듯이 얘기했다.
"저걸 뚫을 방법은?"
"없어. 내가 알기로는 상급마법으로도 흠집 내기 어려울 거야."
"비렌데 말이 맞아. 우리 마을도 저 이상한 검은 물질에 공격당했었거든. 막을 수가 없었어. 저걸 다시 보다니 끔찍하네."
에린델이 살던 곳을 초토화한 힘. 뚫을 방법이 없다고? 아니, 세상에 무적이란 건 없다. 분명히 공략할 방법이 있을 것이다.
"어머나, 이게 끝이야? 자신 있게 공격하길래 기대했었는데, 이 정도로는 난 젖지 않아. 좀 더 힘내보렴. 아가야."
스터시가 비아냥거렸다. 짜증이 밀려오지만 당장 타개책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세키돌에게 눈짓을 하자마자 그녀가 폭발하듯이 돌진해서 스터시에게 킥을 날린다.
전광석화와도 같은 일격. 통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다만 빈틈이라도 만들어준다면 좋겠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오늘의 내 운세는 역배였다. 예상하는 것마다 빗나가는 날. 세키돌의 빠르고도 아름다운 하이킥은 정확히 스터시의 머리에 명중했고 그녀는 볼품없이 나가떨어졌다.
"이게 인형의 힘?"
"서큐버스 출신 서포터의 힘이 아닐까?"
"우리, 세키돌한테 업혀 가게 되는 거야?"
에린델과 비렌데, 그리고 나 삼인은 각기 다른 반응으로 세키돌의 멋진 공격에 대한 감상평을 남겼다.
세키돌의 공격은 예상보다 강력했는지 스터시는 벽에 처박혀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