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 급할수록 돌아가면 늦음(3)
* * *
"로지에, 일어나 있어?"
로지에가 묵고 있는 막사 앞으로 가서 그녀를 찾았다.
"물론이지. 무슨 일이야?"
"잠깐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럼 안으로 들어와."
막사 안으로 들어갔더니 평소보다 편한 복장의 로지에가 있었다. 안이 비칠 정도로 얇은 소재의 슬립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붉은 머리가 어우러져 섹시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할 얘기는 뭔데?"
"마법을 가르쳐줘."
"갑자기?"
"솔직히 이 왕국에 와서 너처럼 마법 활용이 뛰어난 사람은 처음 봤어."
"칭찬해주는 건 좋은데, 다짜고짜 가르쳐달라고 해도 좀 곤란해. 네가 어떤 부분이 부족한지는 알아?"
그녀의 말을 듣고 생각을 해봤다. 마법을 쓰면서 부족함을 느꼈던 순간들은 분명히 있었다.
"마나의 소모가 너무 큰 것 같아. 최대한 주변의 마나를 끌어 쓴다고 생각하면서 마법을 쓰는데도 높은 수준의 마법을 쓰고 나면 생각보다 힘들거든."
"마나 활용법을 모르는 건가."
"배운 적이 없으니 그렇다고 봐야겠지?"
"여태까지는 어떻게 마법을 쓰고 있던 거야?"
"그냥 주변의 마나를 모은다는 생각을 한 후에 머릿속에 쓰고 싶은 마법을 떠올리고 바로 발사했지."
내 말을 듣자 로지에의 표정이 아리송해졌다.
"그런 근본 없는 방법으로 고위 마법들을 펑펑 써댄 건가 대단하긴 한데 네 몸이 버틴 게 신기할 정도네."
"그럼 너는 어떤 식으로 마법을 사용하는데?"
"철저한 계산이 우선이지. 범위, 강도, 거리 그리고 마나의 소모량까지 전부 생각해서 상황에 맞게 조절해."
"마법이라는 건 생각보다 심오한 거였네."
"당연하지. 누구나 마법사가 되고 싶어 하지만 아무나 될수 없고 되더라도 대부분이 4서클 아래 수준에서 끝나게 되지."
"넌 몇서클까지 가능한 건데?"
"8서클."
8서클이 어느 정도 강한 마법인지는 대충 알고 있다. 이카르트 대륙에서도 흔한 존재는 절대 아니겠지.
"8서클 마법을 사용 가능한 마법사는 대륙에 얼마나 되는데?"
"정확하진 않아도 한 손가락으로 세어질 거야. 내가 사는 마법사의 탑에서도 나 제외하고 두 명밖에 없거든."
"8서클을 초과해서 사용 가능한 마법사는 없어?"
"없어. 9서클부터는 초월자의 영역이지. 우린 인간이지 드래곤이 아니잖아?"
그렇군. 대충 이 세계의 마법관은 파악했다. 일반적으로 강한 마법 하면 떠오르는 메테오는 이곳에선 얼마나 강한 마법일까.
"메테오라면 몇 서클에 들어가는 마법일까?"
"음 9서클정도 되겠지. 몇백 년 전 레드드래곤 토벌 전쟁 때 드래곤이 메테오로 마을 여러개를 통째로 날려버렸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그렇군, 흥미롭네."
"딴 얘기는 그만하고 마나 활용법에 대해서나 배우시지?"
"그래야지. 미안, 궁금한 게 많아서."
"궁금한 게 많은 거 자체는 괜찮아. 질문 많은 학생은 좋아하는 편이니까."
"그렇게 갑자기 고백을 하셔도 말이죠. 마음의 준비가."
"."
로지에가 말없이 살벌한 표정으로 나를 째려봤다. 무섭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마나 활용법에 대해 알려주세요."
****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 계속 로지에와 마나 활용을 연습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성과는 나지 않았다.
"이상하네 고위 마법도 영창 없이 팍팍 쓰는 녀석이 왜 이걸 못하지?"
"후우 그러게. 답답해 미치겠네."
"마법을 쓰는데 마나의 양을 적당히 조절한다. 이게 어려워?"
"아니 그 개념은 쉬운데, 도저히 마나 양 조절이 안 된달까? 그런 작업 자체가 안되는 느낌이라."
"애초에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마법을 써와서 그런 건가?"
"그런 거 같네. 나는 그냥 상상하면 마법이 나가니까, 사전작업을 거친다고 생각해도 도저히 할 수가 없어."
로지에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으음 그럼 발상의 전환을 해볼까?"
"어떤 식으로?"
"마나의 조절이 안 된다면 차라리 마나 회복법을 빠르게 하는 거지."
"호오."
"메디테이션이라는건 들어본 적 있지?"
"명상?"
게임에서는 흔하게 접할 수 있는 마법이었다. 들어본 적 없을 리가 없지.
"그렇지."
"마나를 회복하는 마법이던가?"
"마법이라기보다는 마나 호흡법이지. 마나는 세계 어디에나 내포되어 있고 그걸 얼마나 더 많이 자기 것으로 흡수해서 사용할 수 있느냐의 문제잖아?"
"어 응."
로지에 선생의 마나학개론이 시작되었다. 나는 아는척하지 않고 맞장구만 치며 듣기로 했다.
"명상 기술이 발달하게 되면 주변의 마나에 더 예민해지고 순식간에 마나를 회복할 수 있게 돼. 극단적인 예를 들어볼게. 고작 파이어볼 하나 쓰면 체내의 마나가 바닥나는 정도의 수준 낮은 마법사도 메디테이션 기술이 뛰어나다면 수천 명의 병사도 상대할 수 있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을 계속 경청했다.
"그런데 보통 메디테이션은 시간이 오래 걸려. 그래서 효율적인 명상이 필요하지. 주변이 어떤 상황이든 평정심에 빠르게 도달하고 세계의 힘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능력. 이게 메디테이션의 궁극적인 목적이야."
"그렇군. 개념은 이해했어."
"좋아. 그럼 바로 시작해보자. 우선 눈을 감아."
"응."
"머릿속을 비우고 호흡을 평소보다 천천히 해봐."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쳐다봤다.
"그리고 주변의 소리에 신경을 꺼. 아무것도 안 들릴 정도로. 그리고 주변의 마나를 온전히 느껴봐."
오늘은 바람이 세게 부는 날이었다. 바람에 막사가 펄럭이는 소리가 들렸기에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반복적으로 주변의 마나에만 집중하려고 노력했더니 순간적으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나의 아지랑이가 강하게 느껴진다.'
확실히 주변에 일렁이는 마나가 강렬하게 느껴졌다. 금세 집중이 풀렸지만 잠시동안은 확실히 마나의 움직임이 보이는 느낌이었다.
"오, 잠깐이지만 성공한 거 같네. 어땠어?"
"음 뭐랄까 순간적으로 다른 공간에 있는 느낌이었어. 주변의 소리가 아무것도 안 들리고 마나의 아지랑이가 강하게 일렁였달까."
"좋아. 메디테이션에는 재능이 있네. 이걸 한 번에 알아듣고 바로 성공하는 사람은 사실 처음 봤거든."
"근데, 네가 말하는 걸 보면 다른 사람을 가르쳐본 적이 있는 거 같다?"
"수도 없이 가르쳐봤지. 자기 자식이 재능이 있는 것 같다고 키워달라는 귀족들도 많고 매월 정기적으로 일주일 정도 마법을 가르쳐주는 강의를 하거든."
"진짜 선생님이었네."
하지만 내 말에 조금 울적해 보이는 표정을 짓는 로지에.
"자의로 하는 게 아니라 피곤하기만 해. 마법사의 탑은 할배들뿐이라 귀찮은 일은 내가 떠맡거든."
"이번에 핌베르트 왕국에 지원 온 것도 그런 일들 중 하나였겠네?"
"물론이지. 근데 이건 확실히 필요한 일이야. 핌베르트 왕국까지 마왕군에 넘어가게 되면 그 다음은 신성제국 과르디올이 위험할거고 마법사의 탑까지 위협받게 되겠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내가 마왕을 없애줄게."
"제발 그랬으면 좋겠어. 사실 전쟁이 길어져서 불안해. 난 싸움은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당차 보이고 제멋대로인 것 같은 이 여자에게 의외의 면이 많이 보였다. 싸움도 싫어하고, 해야 할 일은 도망가지 않고 하는 책임감까지.
"로지에, 넌 좀 멋있는 거 같다."
"뭐, 뭐야 갑자기 칭찬해도 뭐 안 나와."
갑작스러운 내 칭찬에 부끄러워하는 그녀의 모습이 귀여웠다.
"아깝네. 뭐 나올 줄 알았는데."
"? 나한테 뭐 바라는 거라도 있어?"
로지에에게 바라는 것이라. 딱히 없었지만, 굳이 따지면 없진 않다.
"있긴 한데, 말하면 바로 마법이 날아올 거 같은데."
"대충 알 것 같으니까 말하지 마."
역시 그런 쪽 화제에도 약한 건가. 이 여자도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묘하게 가학심을 자극한다.
괴롭히고 싶은 마음을 참고 열심히 메디테이션을 연습했다. 하지만 아무리 시도해도 마나가 회복되는 유의미한 명상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로지에."
"왜, 재능 없는 학생 씨."
"아무래도 동기부여가 부족한 것 같아."
"그래서?"
"오늘 내로 메디테이션에 성공하면 소원 들어주기는 어때?"
난처한 얼굴이 되어버리는 로지에.
"아니, 그게 뭐야. 가르쳐주고, 성공하면 소원까지 들어주라니 나한텐 이득이 하나도 없잖아."
"아니지. 어차피 로지에는 한동안 여기 머물 텐데, 내가 빨리 성공하지 못하면 날 가르치느라 더 고생해야 하고 여기 더 오래 있어야 할지도 모르잖아."
"그건 그렇긴 하네."
"그럼 계약 성립인걸로?"
"하아 알겠어."
이 여자. 의외로 밀어붙이기에 약하다. 이렇게 된거 메디테이션도 익히고 태그력까지 채우겠다. 꿩과 알을 동시에 먹어주지.
"이제 슬슬 도달하는 시간은 빨라졌는데, 평정심을 유지하는 시간이 너무 짧아. 좀 더 집중해봐."
"좋아. 감 잡았다고."
동기부여가 된 탓인지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명상을 하면 정신적으로도 안정되고 머리도 맑아졌다.
"호흡을 조절해봐, 복식 호흡이 도움이 될 거야."
복식 호흡은 자신이 있었다. 노래 잘하는 선배가 되고 싶어서 노래방 가기 전에 많이 했었으니까. 그게 여기서 도움이 되다니 인생 모르는 거다.
주변의 소리가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마나의 흐름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것들을 내 몸 안에 담아둔다.
"성공했다."
"마나가 꽤 많이 모여들었네 축하해. 성공이야."
"하하하핫! 역시 난 천재라니까."
갑작스레 높아진 내 텐션에 그녀가 찌푸렸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호탕하게 웃었다.
"자 그럼 소원을 들어주실까?"
"뭐, 뭔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