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 급할수록 돌아가면 늦음
* * *
싸움이 끝난 뒤 필리포 성으로 돌아오는 동안 다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분 좋은 승리였고, 필리포 성을 지키는 것이 확실시되는 승리였지만 다들 전력을 쏟았기에 매우 지쳐있었다.
성에 도착해서야 리스티앙이 얘기했다.
"다들 오늘 연이은 싸움 때문에 지쳤겠지만, 잠시 회의를 하고 쉬도록 하지. 서쪽 격전지에서 온 요청도 있었고."
"알겠습니다. 세키돌은 먼저 들어가서 쉬고 있어."
"응, 대장님도 얼른 와."
"저도 회의에 참여합니까?"
조금 피곤해 보이는 로지에가 물었다.
"물론이죠. 마법사의 탑에서 지원 오시지 않았다면 오늘 수비는 못해냈을 겁니다. 바로 돌아 가실 예정이 아니라면 참여해주시죠."
리스티앙은 로지에가 지원온것이라 대우를 하는지 높임말을 사용했다.
"뭐,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확실하게 도와주고 오라는 말을 들어서요. 벌써 돌아갈 순 없겠죠. 알겠어요."
리스티앙이 먼저 지휘 막사 안으로 들어가고 로지에도 곧장 따라 들어가려고 할 때 내가 말을 걸었다.
"잠깐만 로지에 얘기 좀 하자."
"응? 무슨 얘기?"
피그리티와 싸울 때 성급했던 나의 행동을 사과하고 싶었다.
"다른 건 아니고 아까 너무 성급했던 것 같아. 결 계 같은 건 상상도 못 했어. 나 때문에 싸움이 어려워진 것 같아. 미안해."
"음 아니야 네가 사과할 일은 아닌 거 같아. 넌 결계를 느낄 정도로 예민하지도 않은 것 같고."
"그렇긴 하지만."
"오히려 내가 미안하지. 집중하면 충분히 느낄만한 결계였는데, 나도 조금 흥분해 있었던 것 같아."
기가 센 그녀가 오히려 내게 사과를 했다. 예상치 못한 신선한 장면이었다.
"그러게 말이야. 느낄 수 있는 건데, 집중 좀 하지 그랬어? 덕분에 고생했다고 친구."
"풉!"
"뭐야, 왜 웃어?"
"남이 기껏 진지하게 사과하는데, 농담이나 하고 말이야. 무안해서 그런 거야? 너 보기보다 귀엽네."
동갑인 여자에게 귀엽다는 소리를 듣는 건 겪어보지 못한 경험이라 묘한 기분이었다.
"귀여움이란 건 나와는 어울리지 않아. 난 쿨한 남자니까."
"그래그래. 어련하시겠어."
웃음을 참고 있는 그녀의 표정을 보니 말을 길게 하면 점점 더 말릴 거 같았다.
"얼른 회의나 하고 쉬러 가자고."
그렇게 말하곤 내가 앞장서서 지휘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 들어가니 머리에 붕대를 하고 있는 부관 안드레아와 리스티앙이 지도를 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앉으세요. 오늘 중요 안건 회의 앞서서 제 부관 안드레아의 브리핑이 있을 겁니다."
지원으로 온 로지에 때문인지 리스티앙은 존칭을 사용하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핌베르트 왕국의 기사이자 리스티앙 사령관님의 부관인 안드레아 로를입니다. 브리핑 시작하겠습니다."
그는 작은 막대기로 현재 위치를 가르치며 설명을 시작했다.
"우선 현재 상황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지금 저희가 있는 곳은 필리포 성입니다. 이곳에서 후퇴하게 되면 다음 방어선은 꽤 후방이기 때문에 상당히 많은 지역을 마왕 군에게 넘겨주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켜냈지."
"맞습니다. 게다가 전생자님의 활약으로 이곳보다 북쪽인 라르디노 성 근처의 게이트까지 파괴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분간 이곳의 방어는 수월하겠죠."
그는 침을 삼키고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문제는 서쪽 격전지 입니다. 정찰병에 의하면 강력한 군단장의 출현으로 병력이 반 토막이 났다고 합니다. 이대로면 방어선이 붕괴되고 서북쪽에 거주하는 왕국민들이 대피해야할 상황입니다."
이쪽에서 군단장을 두 명이나 물리쳤다. 몇 명이나 군단장이 있는지는 모르나 다섯 번째가 있었다는 건 최소 세 명은 더 남아있을 것이다. 그들 중 몇 명이나 서쪽 격전지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반 병사로 그들을 막는 건 무리겠지.
"서쪽 격전지에는 우수한 기사가 없습니까?"
궁금해진 나는 안드레아에게 질문했다.
"있다, 아니 있습니다."
나에게 반말을 했었던 그가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존칭을 쓰고 있었다.
"왕국제일검으로 불리는 마르코 바스판 님이 계십니다만, 그분조차 손을 못 쓸 정도로 강한 상대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뭐라고? 바스판 님이 밀린다니 사천왕이라도 나타났다는 건가?"
리스티앙이 경악하며 말했다.
"글쎄요 그런 얘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그렇군. 아무튼, 이제부터는 내가 얘기하지."
리스티앙이 일어서며 둥글게 말린 종이를 꺼냈다.
"아침에 도착한 전서구가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조금 전에 안드레아 부관이 얘기했던 내용과 비슷하며, 이곳을 포기하고 서쪽 격전지를 도와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럼 이겼는데도 이곳을 버린다는 건가요?"
아깝다는 뉘앙스가 잔뜩 담긴 로지에의 질문이었다.
"아쉽지만,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아요. 서쪽은 전선에 큰 산이 있어 수비하기 용이한 편인데도 이런 요청을 한 것 보면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인 거 같습니다."
가만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나는 생각을 정리하고 말했다.
"어차피 게이트가 파괴됐고 이쪽의 군단장을 두 명이나 잡았습니다. 당분간 이 근처에 강력한 공격은 없겠죠. 서쪽 격전지로 지원을 가시는 건 옳은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가지 않겠습니다."
"왜지? 게이트도 파괴했는데 더더욱 이곳에 있을 이유는 없지 않나?"
"저는 공격을 할 생각입니다. 애초에 군에 들어오게 된 이유도 마왕을 죽이기 위함이지 수비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으니까요."
"최선의 수비는 공격이다라는 건가."
"물론이죠. 어차피 마왕이 살아있는 한 공격은 끝없이 이어지고 싸움이 길어질수록 왕국민들만 고통받게 될 겁니다."
"혼자, 아니 겨우 넷이서 마왕을 죽일 수 있겠어?"
"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해야죠."
내 단호한 대답을 들은 리스티앙은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했다.
"내가 다른 의견을 제시해도 들어주지 않겠지. 어차피 폐하의 허락을 받은 특별부대이니 자네 마음대로 해."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이야기가 끝나자 로지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도 서쪽 격전지는 가지 않을게요."
"당신은 왜죠?"
"왕국 제일의 소드마스터도 당해내지 못하는 상대를 제가 어떻게 할 수 있을 리는 없잖아요. 어차피 사령관님도 실력이 상당하시던데 가서 시간 버시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저는 당분간 여기 필리포 성에 남아있으려고요."
"로지에, 여기 남아서 성을 지키는 것도 좋겠지만 차라리 나랑 마왕을 잡으러 가는 건 어때?"
그녀의 말을 듣고 내가 제안했다.
"마왕을 잡으러 간다니 그건 자살이잖아. 난 목숨 소중한 줄은 알거든. 여기 남아서 네가 돌아올 곳을 지키고 있을게. 후퇴해야 한다거나 쉬어야 하면 돌아와."
"현실적이군. 좋아, 알겠어."
로지에에게 차인 나는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리스티앙에게 얘기했다.
"이렇게 된 거 같은데, 어떠십니까? 더 하실 말씀은 있으신가요?"
"아니, 없어."
"아 그리고 사령관님 여기는 수비병력은 필요 없으니 정찰병 몇 명만 남겨주세요."
"알겠습니다."
로지에의 요청까지 듣고 난 리스티앙은 머리가 아파 보이는 표정으로 말했다.
"후우, 그럼 회의는 여기까지로 마무리하죠. 오늘은 정말 고생들 많으셨습니다. 우리는 내일 오전에 떠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그리고 로지에가 먼저 지휘 막사를 나가고 나도 뒤따라 나섰다.
'리스티앙과는 여기서 이별인가. 이제 친해지려는 참인데 조금 아쉽군.'
그런 생각을 하며 휴식하기 위해 막사로 가고 있는데 뒤에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전생자님."
리스티앙의 부관인 안드레아였다. 조금 상기된 표정의 그.
"무슨 일이시죠?"
"그, 그간의 무례를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음? 무슨 사과하실만한 일이라도 하셨던가요?"
솔직히 말하면 처음부터 그는 날 깔보는 태도였었다. 거슬리던 건 사실이었다.
"워낙 허세를 부리는 자들을 많이 접하다 보니, 그들과 같은 시정잡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진짜 전생자셨군요. 저도 어릴 때부터 전생자의 전설을 접해온 사람으로서 동경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태까지 무례한 태도를 보인 점 사과드립니다."
진심으로 고개를 숙이고 사과하고 있었다. 재수 없는 놈인 줄 알았지만,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었군.
"인정해주시니 기쁩니다. 아무튼, 알겠으니 고개는 드세요. 믿기 쉬운 얘긴 아니었으니까요."
필리포 성에서의 완벽한 수비와 군단장 처치, 그리고 게이트 파괴로 완벽히 나를 믿어주게 된 것 같다. 누군가에게 인정받는다는 건 확실히 좋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그와 인사를 하고 우리 부대의 막사 안으로 들어왔더니 에린델이 일어나있었다.
"어? 강단백 돌아왔구나. 또 군단장급과 싸웠다고 들었는데, 괜찮아?"
"나보다 세키돌이 더 고생한 거 같긴 해. 그런데 비렌데랑 세키돌은?"
"비렌데가 일어나더니 기분 전환하고 싶다고 산책하러 나갔어. 세키돌도 심심하다며 따라갔고. 싸움은 무난히 이긴 거야?"
"무난하진 않았어. 두들겨 맞느라 고생했지. 치료를 받았는데 아직도 아픈 느낌이야."
"고생 많았어. 기절해 있느라 도움이 못 된 거 같아서 미안해."
확실히 에린델은 뭔가 항상 하고 싶어 하는 성격이었다. 가만히 있는걸 못하는 성실한 녀석. 오늘은 유난히도 시무룩한 표정을 보여주니 놀릴 기분이 들지 않았다.
"무슨 소리야? 오늘 게이트 부술 때도 에린델이 마물들을 처리해주지 않았다면, 게이트를 부수는 마법에만 집중하지 못했을 거라고?"
"그건 그렇지만."
"오늘은 웃어야지. 우리 작전이 성공한 날이잖아. 게다가 예상외로 군단장을 한 명 더 잡았어. 파티라도 벌여야 할 날인데,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그렇게 못하는 게 아쉽군."
"강단백. 내가 우울해 보인다고 그렇게 억지로 높은 텐션 내지 않아도 괜찮아. 너도 힘들잖아?"
확실히 이 녀석은 예리하다. 앞에서 거짓말은 하기 쉽지 않을 거야.
"후우, 그래 맞아. 사실 나도 지금 마음이 복잡해."
"나한테 말해봐. 담아두는 것보다는 말하는 게 더 편해질 수도 있잖아?"
오늘따라 유난히 상냥한 에린델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할 소리까지 할 것 같았다.
"군단장을 이기긴 했지만, 한번은 태그를 쏟아부어서 간신히 승리했고 자칫하면 우린 다 죽을뻔했지. 그리고 한번은 방심한 탓에 완벽한 패배였지만 리스티앙 사령관이 도와줘서 이긴 거고."
"응."
"앞으로 싸울 마왕, 아니 그전에 사천왕과 싸울 텐데 그들은 군단장들보다 더 강하겠지. 솔직히 말하면 자신이 없어."
"."
"그래서 승리하고도 오늘 기분이 좋지 않았어. 이게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단백의 생각은 이해가 가. 나도 꽤 열심히 단련했지만, 역부족이라고 느꼈어. 군단장 이상의 마족들은 상상 이상으로 강하다는 걸 몸으로 느꼈으니까."
"너도 그렇게 느꼈구나."
"그래서 여기서 포기할 거야 강단백?"
듣고 싶지 않았던 말. 하지만 의식하지 않았을 뿐 이미 무의식적으로 포기한다는 선택지를 하고 있었다.
"."
"포기할까? 마왕군은 알아서 군인들이 막으라고 하고 우린 돌아가서 맛있는 거나 먹으면서 돌아다닐까?"
"아니. 그럴 순 없지."
그럴 순 없다. 아니 그러고 싶지 않다. 열심히 하지 못했던 현생과 달리 이곳에선 목표한 바를 이루자고 결심했다.
"또 도망칠 수는 없어."
"또라니?"
"이곳에 오기 전에 나는 이미 도망친 적이 있어. 겁났거든. 내 부족한 재능이 들통날까 봐."
에린델은 더 묻지 않고 가만히 있었지만 나는 과거 이야기를 조금 하고 말았다.
과거에 만화를 그렸었다는 걸. 하지만 편집자에게 무시당하고 그 후로 다시 도전하지 못하고 도망쳤다는 것을 얘기했다. 그 후에 꿈을 잃고 방황했다는 것까지.
"그래서 이번에는 도망치고 싶지 않아. 내가 약속한 대로 마왕을 잡고 너에게 나라를 돌려줄게."
"그 대답을 기다렸어. 강단백이라면 할 수 있을 거야. 여태까지도 불가능한 일을 해냈는걸."
이곳에 오기 전에 가장 듣고 싶었던 말. 누군가 나를 믿어주고 지지해주길 바랐었다. 전에는 없었지만, 지금은 있다. 그 차이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준다.
나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강단백 울어?"
"아, 아니 더워서 땀이 났을 뿐이야."
애써 변명하는 나를 에린델이 상냥하게 안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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