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토미의 태그술사-49화 (49/57)

〈 49화 〉 기어오는 혼돈(7)

* * *

"후우, 이 정도면 되겠지?"

힘든 저기 힘든 몸을 질질 끌고 한참을 걸었다. 나에겐 결계의 여부가 느껴지지 않는다. 로지에에게 묻는다.

"음, 확실히 여긴 괜찮은 거 같네. 바로 치료해줄게."

"빠르게 부탁해."

"큐어 힐(Cure Heal)"

그녀가 치유마법을 쓰자 순식간에 상처가 하나둘씩 사라졌다. 원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간을 되돌린 것처럼 깔끔하게 낫는군. 신기하네. 넌 치유적성도 높은 건가?"

"그럼, 내 마법 관련 적성들은 다 높아. 안 되는 것도 있지만."

"너 같은 천재마법사도 안되는 게 있나? 그게 뭔데?"

"그건 비밀이야."

대체 이 당찬 천재 마법녀가 못하는 게 뭔지 궁금했지만, 더 물어도 숙녀의 비밀을 알려고 하는 매너 없는 사람 취급을 할 뿐이었다.

"고맙다. 오히려 다치기 전보다 더 컨디션이 좋은 거 같군."

치료가 끝나고 그녀에게 감사 표시를 했다.

"그게 맞아. 머리가 맑아지는 효과까지 넣은 치유였으니까."

"기분 탓이 아니었나. 남 다르네 정말."

그 후 여전히 격하게 싸우고 있는 리스티앙과 피그리티를 눈으로 좇았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지? 뭔가 생각이 있어 보였잖아."

"이제 보여줄 테니 보고 있으라고."

안에서 마법을 쓸 수 없게 하는 결계. 그걸 지울 수도 없는 상황. 그렇다면 결계 밖에서 마법을 쓰면 된다는 결론이었다.

하지만 공격마법은 의미가 없다. 거리가 멀어 날아가는 동안 피할 것이 뻔하고 잘못하면 괜히 리스티앙에게 까지 피해가 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마법은 이것이었다.

"블레싱 (Blessing)"

정확히 리스티앙을 조준하진 않았다. 어차피 블레싱은 엄밀히 따지면 성속성 계열의 축복마법. 마족인 피그리티에게 걸린다면 오히려 디버프로 작용할것이다.

"오호, 머리 좀 썼는데?"

리스티앙의 방어력은 훌륭했으나 아쉬운 공격력 때문에 싸움이 길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내 블레싱으로 인해 리스티앙의 움직임이 확실히 더 좋아졌다. 허공을 가르던 리스티앙의 검격이 점점 날카로워지며 피그리티를 스치기 시작했다.

"사령관이 조금만 더 빨라진다면, 승부가 금방 나겠는데."

"확실히."

로지에의 말을 듣고 조금 더 높은 효과의 축복을 상상했다.

"인텐시브 블레싱(Intensive Blessing)"

조금 전에 걸러진 것보다 상위 레벨의 축복이 리스티앙에게 내려졌다. 확실히 달라진 그녀의 움직임. 처음 쓰는 마법이지만 당연하게도 실패하지 않았다.

"너, 나보고 천재마법사라고 한 건 비아냥이야?"

"아니 진심이었는데?"

"듣도 보도 못한 정신 나간 축복인데? 이런 게 걸리면 어린애도 오크 잡는 건 우습겠어."

리스티앙의 정직하고 올곧은 검격이 피그리티를 향한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치며 베는 공격. 피그리티는 몸을 뒤틀어 피했다.

하지만 곧바로 가로로 긋는 베기가 이어진다. 원래 리스티앙의 근력과 속도라면 불가능했을 공격. 피그리티는 최대한 피하려했지만, 가슴을 얕게 베였다.

"치잇, 저 새끼들이 뭔 갈 한 모양이네. 아까 죽였어야 했는데!"

피그리티가 자신의 몸에서 피가 흐르자 짜증이 난 듯 소리를 지르며 나와 로지에 쪽으로 돌진했다.

"아직 나랑 싸움이 안 끝났잖아?"

리스티앙이 피그리티를 막아섰다. 아까까지만 해도 따라잡지 못했던 피그리티의 속도를 상회하는 빠른 움직임. 축복의 효과는 대단했다.

성검을 들고 연속적인 공격을 하는 리스티앙. 피그리티도 불가사의하게 민첩한 움직임을 보이며 피하고, 글러브를 이용해 막았지만 모든 공격을 막진 못했다.

이곳저곳 얕게 베이면서 피그리티의 몸은 상처투성이가 되어갔다.

"아아, 정말 귀찮게!"

"귀찮다고? 난 온 힘을 다해 진심으로 너와 싸우고 있는데, 실망스러운 감상이군."

"난 너 같은 진지한 타입을 싫어해."

"나도 너 같은 가벼운 사람은 싫어한다만."

리스티앙의 대답을 듣고 피그리티는 표정이 일그러졌다.

"처음으로 마음이 통했네? 기념으로 내가 왜 군단장인지 보여줄게!"

­쿠구궁!

대지가 진동할 정도의 강력한 폭발. 피그리티의 몸에서 무언가 강력한 기운이 터져 나왔다.

"어때? 아름답지?"

그녀의 몸 주위에 검붉은 색의 기운이 맴돌았다. 취향에 따라 예뻐 보일 수는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 공포감을 부를만한 서늘한 기운이었다.

"내 취향은 아니군."

"쿡쿡, 그 건방진 주둥이를 다물게 해줄게."

말이 끝남과 동시에 피그리티의 공격이 시작됐다. 상하좌우를 가리지 않는 무차별적인 펀치와 킥의 향연. 축복으로 인해 신체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 리스티앙이지만, 전부 피해낼 수 없었다.

리스티앙이 충격을 받아 멈춰선 그 순간. 피그리티는 쉴새를 주지 않고 공격을 몰아쳤다. 리스티앙이 필사적으로 피그리티의 주먹을 막아냈지만, 그 틈에 그녀의 발차기가 정확히 리스티앙의 배에 꽂혔다.

"커헉!"

리스티앙은 버티지 못하고, 처음으로 쓰러졌다.

"맷집이 상당하던데, 이젠 못 버티나 보네?"

리스티앙의 입에서 피가 흐르는 걸 본 피그리티는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었다.

"너희들 때문에 오늘이 내 평생 가장 귀찮은 날이야. 이젠 그만하자고."

피그리티는 한 손에 가득 검붉은 기운을 가득 모으고 쓰러져있는 리스티앙에게 휘둘렀다.

"죽어어어어어엇!"

­카앙!

"내 신부가 될 사람인데, 적당히 해라."

분명 내 검술로는 피그리티를 이기지 못한다.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리스티앙이 죽을 위기를 보고 있을 순 없었다. 있는 힘을 다해 달려들어 블랙 미스릴 소드로 피그리티의 공격을 막았다.

"귀찮은데 제 발로 잘 왔네, 너부터 뒤져!!!"

눈으로 반응할 수 없는 속도의 발차기. 나는 한참을 나가떨어져 리스티앙이 나타났던 언덕 쪽 큰 바위에 처박혔다.

"크아악!"

피그리티는 지체없이 바로 따라왔다.

"잘 가. 덕분에 많이 귀찮았어."

악의가 잔뜩 실린 내려치기. 이걸 맞으면 분명 죽는다. 아직 이 세계에서 하고 싶은 일이 많았는데.

"야아아압!"

귀엽지만 힘찬 기합 소리와 함께 피그리티는 날아갔다. 왠지 한참 전의 상황이 떠올랐다.

"대장님! 괜찮아~?"

언덕 위에서 나타난 건 세키돌이었다. 내가 한참 돌아오지 않자 따라온 건가.

"세키돌! 뒤!"

감격의 재회를 즐길 시간은 없었다. 피그리티는 곧장 바닥을 차며 세키돌에게 빠르게 달려들었다.

세키돌은 말도 안 되는 속도의 피그리티의 공격을 받아냈다. 하지만 확실히 역부족이었다.

이어지는 피그리티의 공격에 반격할 엄두는 내지 못하고 막고 피해 내는 것이 한계였다.

"인텐시브 블레싱(Intensive Blessing)"

나는 서둘러 결계밖으로 나간 뒤, 다시 한번 높은 수준의 축복마법을 시전했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세키돌은 순식간에 반격까지 가능할 정도로 빨라졌다.

그에 반해 피그리티는 축복 때문에 신체 능력이 하락한 것인지 세키돌의 공격을 쉽게 피하진 못했다.

체술에 있어선 둘 다 최상급의 강자였다. 축복으로 밸런스를 맞추지 못했다면 세키돌이 불리했겠지만, 지금은 완벽한 황금 밸런스였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멋진 공방전을 벌이는 둘. 잠시 넋을 잃고 바라만 보고 있을 정도였다.

"뭐야, 저 괴물들은."

동공이 커지며 놀라는 로지에.

"우리 애까지 괴물이라고 부르는 건 맘에 들지 않지만, 괴물이긴 해."

나도 옆에서 구경하는 것밖에는 할 일이 없었다. 누군가가 끼어들어서 뭔갈 할 수 없는 초고속의 수준 높은 공방전. 눈으로 좇는 것조차 버거웠다.

"넌 또 뭐냐고! 제대로 살아있지도 않은 게!!!"

화를 내며 검붉은 기운을 폭발시키는 피그리티. 화가 났는지 힘을 잔뜩 실은 주먹을 날렸다.

분명 빠르고 강한 공격이었지만 세키돌은 어렵지 않게 건틀릿으로 방어했다.

­쩌적

하지만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다. 세키돌의 건틀릿이 금이가 부숴졌다!

'젠장, 루시페르랑 싸울 때 이미 내구도가 많이 떨어졌었나.'

세키돌은 루시페르의 방어막에 상당히 많이 공격을 가했었다. 그때 이미 내구도는 만신창이가 됐었던 것이었다.

"아악!"

세키돌은 더이상 피그리티의 공격을 막지 못했고, 넘어져서 그녀에게 밟혔다.

"귀찮아! 귀찮아! 귀찮다고!"

짜증을 부리며 세키돌을 재차 밟는 피그리티. 보고만 있을순 없다. 내가 죽더라도 세키돌을 구한다.

그렇게 검을 부여잡고 달려나가려는 찰나, 맑고 힘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다리를 잡아!!"

리스티앙의 목소리였다. 세키돌은 그 목소리를 듣고 밟힌 채로 피그리티의 양다리를 잡았다.

그리고 리스티앙의 검이 피그리티의 가슴을 궤뚫었다.

"큭, 이까짓 상처, 재생하면 그만이야!"

재차 검붉은 기운을 폭발시키는 피그리티. 하지만 그녀의 상처는 회복되지 않았다.

그리고 리스티앙이 찌른 검의 빛이 강렬해졌다. 말 그대로 성스러운 기운을 내뿜기 시작하는 그녀의 검. 피그리티의 몸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뭐야? 이 칼. 설마 갈라틴."

"이 검을 아는 건가?"

"하아, 이제 더 귀찮을 일은 없겠네."

그 말을 마지막으로 피그리티는 재가 되어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 *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