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 기어오는 혼돈(6)
* * *
"오른편에 보이는 절벽으로 가자고."
"알겠어."
"로지에, 넌 어떻게 갈 거지?"
"난 당연히 텔레포트야."
부럽다. 난 가본 적 있는 곳밖에 가지 못하는데.
"너는?"
"날아ㅅ"
날아서 간다고 말하려다 마음이 바뀌었다. 생각해보니 눈으로 보이는 위치 정도라면 가능할 것 같았다.
"나, 나도 마찬가지야 가자고."
나와 그녀는 동시에 외쳤다.
"텔레포트! (Teleport)"
잠깐 의식이 옅어지는 듯한 느낌. 전에 노른 마을로 이동했었을 때의 감각이었다.
'성공인가.'
예상대로 맨눈으로 보이는 정도의 거리는 이동할 수 있었다. 마력의 소모가 큰 것 같으니 효율은 좋지 않지만.
"네, 네 녀석은"
피그리티가 날 보고 놀라는 눈치였다.
"여어, 도망가서 안 나타났으면 좋았을걸. 결국, 내가 그리웠던 거야?"
하반신을 꿀렁이면서 피그리티를 놀렸다.
"쳇, 개 같은 소리를."
말투는 당장이라도 날 때려눕힐 말투였지만, 피그리티는 도망쳤다. 아무래도 저번에 태그에 당한 트라우마가 남아있는 듯 날 겁내는 모습이었다.
"뭐야, 쟤 도망가네. 근데 너 저 마족하고 아는 사이야?"
로지에가 신기해하며 내게 물었다.
"응, 한번 혼내줬었거든. 내가 방심해서 놓쳤지만."
"한번 이긴 적도 있을 정도면 별거 없나. 그래서 쟤는 누군데?"
"제 5군단장이라나 봐. 확실히 전투력은 높았어."
"오호, 군단장이라니 흥미가 생기네. 군단장을 잡은 최연소 마법사 타이틀을 가질 수 있는 건가."
자신감이 넘쳐서 그런 것인지 로지에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확실히 보통 멘탈은 아니다. 무조건 긴장을 해야 할 상황인데.
"저대로 보내줄 순 없잖아. 얼른 따라가자고."
신체 강화 마법을 걸고 바로 달렸다. 곧장 로지에도 마법을 걸고 따라왔다. 피그리티가 도망치는 속도는 빨랐지만, 도저히 못따라갈 정도는 아니었다.
한참을 따라가서 낮은 지대에 도착했고 처음보다 거리가 많이 좁혀졌다. 마법으로 충분히 견제가 가능한 거리. 지체없이 이동속도를 느리게 할 마법을 시전했다.
"프로즌 패터! (Frozen Fatter)"
느려진 후로도 억지로 한참을 더 도망갔지만, 족쇄의 지속시간이 다할 때쯤 멈춰섰다.
"칫, 이래서 마법 쓰는 놈들은 짜증 난다니까."
더는 도망가지 못한다고 느꼈는지 뒤돌아서는 그녀.
"원한다면 싸워주지, 덤벼봐 마법사 나부랭이들한텐 안 지니까."
태도가 변한 그녀에게서 이질감이 느껴졌지만, 시간을 끌 필요는 없다.
"속전속결이다. 거스트 오브 윈드! (Gust of Wind)"
치이잉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렸다. 강력한 바람의 폭풍이 생겨서 피그리티를 덮쳐야 할 터. 하지만 마법은 시전되지 않았고 강력한 격통이 가슴에 찾아왔다.
"커헉"
핏덩이가 목구멍에서 튀어나왔다.
"매직 카운터인가. 야, 너 괜찮아?"
바보는 나였나. 군단장이나 되는 인물이 한번 패배한 후에 아무런 대책 없이 왔을 리가 없다.
"로지에, 매직 카운터가 뭐지?"
"마법사용자에게 강한 타격을 주는 결계야, 마법 자체도 취소."
로지에가 말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피그리티가 달려들었다.
챙!
강철부츠를 장착한 그녀의 강력한 발차기를 검으로 막아냈지만, 단 한 번뿐이었다.
"컥!"
이어지는 공격의 속도는 내가 반응할 수 있는 그것을 아득히 뛰어넘었고 일방적으로 얻어맞았다.
"젠장, 여기선 나도 도움이 안 돼. 도와줄 사람을 불러올게."
로지에는 마법사다. 마법을 쓸 수 없다면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빠른 상황판단으로 도망가려 했으나 그건 불가능했다.
"아악!"
피그리티는 그녀에게 도망칠 틈을 주지 않았고, 단 한 방의 주먹으로 로지에를 날려버렸다. 바위에 처박힌 로지에는 상당히 괴로워했다.
"아윽, 할아버지한테도 맞은 적이 없는데."
하지만 대상이 나에게서 로지에로 변경되어 내겐 잠깐의 틈이 생겼다.
저번처럼 묶어버리면 그만이다. 그리고 블랙 미스릴 소드라면 단단해 보이는 저 갑옷도 두부 베듯 썰어버릴 수 있겠지.
"[tag : bond 컥!"
하지만 내 생각보다 피그리티는 훨씬 빨랐다. 태그의 영창이 끝나기도 전에 내 목을 붙잡았다.
"크윽여연기였나"
날 처음 보고 피했던 것도, 애매하게 따라잡힐 만한 속도로 도망친 것도 전부 연기였던 건가. 확실히 이상하긴 했다. 처음 봤을 때 분명 압도적인 속도를 보여줬었으니까.
"흐응 머리가 좋은 줄 알았는데 의외로 멍청하네? 사실 이렇게 쉽게 속을 줄 몰랐어."
안일했다. 한번 이겨본 상대여서 그랬던 걸까. 사실 혼자라면 이 정도까지 방심하진 않았을 것이다. 로지에라는 상식 이상의 마법사가 옆에 있으니 진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던 것이 문제다.
"지난번엔 정말 굴욕적이었어.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어."
내 목을 조이는 악력이 점점 강해졌다.
"의외의 취향까지 알게 해줘서 고마웠어. 하지만 주제 넘었던 거 알지? 인간 주제에."
"컥커헉!"
"그러니까, 죽어!"
피그리티는 내 목을 잡은 채로 날 바닥에 내다 꽂았다.
"컥!"
내 몸에서 나온듯한 피가 사방에 흩뿌려진다. 숨이 막힌다. 숨쉬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사, 살"
"으응? 뭐라고? 다 죽어가는 찐따 목소리는 잘 안 들리는데?"
피그리티는 바닥에 쓰러져 숨도 제대로 못 쉬는 날 짓밟았다.
"감히 나를! 묶어놓고 때리면서! 맘대로! 즐겨!?"
지난번 전투에서 나에게 당한 것이 상당히 분했던 모양이다. 그녀는 대꾸도 하지 못하는 나를 계속 밟았다.
"컥! 사, 살려"
"살려달라고? 뻔뻔하네, 내가 도망치지 않았다면 날 죽였을 거잖아?"
피그리티는 자신이 당했을 때의 생각이 난 듯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또 나를 밟았다.
"크헉아, 아니."
"아니면 뭐지? 말해봐. 빌어먹을 인간."
"사, 살려달라고 해도 늦었어. 악마."
"하아아아아앗!"
나와 피그리티 위쪽에 있던 언덕에서 리스티앙이 뛰어 내려오며 검을 내리쳤다.
은은한 빛이 감도는 그 검은 말 그대로 성검(??)
피그리티는 나에 대한 복수에 취해있던 탓인지 리스티앙이 다가오는걸 눈치채지 못했다. 급하게 몸을 틀어 치명상은 피한듯했으나 타격은 분명히 있었다.
"괜찮나? 미래의 서방님."
"하마터면 미망인이 되실 뻔했다고요."
"이,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거 보니 멀쩡하군. 아무튼, 얼른 나가서 치료해. 마족은 내가 막을 테니까."
"보통 마족이 아닙니다. 시간만 끌어주세요. 치료하고 바로 올게요. 미래의 부인님."
내 대답에 조금 부끄러워하던 리스티앙은 곧장 피그리티를 공격했다. 한치의 흐트럼 없는 정석적인 자세. 그 동작들이 워낙 아름다워서 남을 죽이기 위한 공격이라기보다는 무도(??)에 가깝게 느껴졌다.
하지만 아까의 일격은 몰라서 당했을 뿐이라는 듯 피그리티는 모두 피하거나 글러브로 막고 있었다.
"야, 얼른 결계밖으로 나가자, 여기선 아무것도 못 해."
어느샌가 로지에가 내 옆에 와서 나를 부축했다.
"몸이 만신창이가 돼서 빨리는 못 나가지만, 서둘러 보자고."
로지에의 부축을 받아 다리를 질질 끌면서 움직였다. 움직일 때마다 온몸이 쑤시고 상처가 벌어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하아압!"
그러면서 곁눈질로 리스티앙과 피그리티의 전투를 쳐다봤다.
검술 교본에 실린듯한 깔끔한 리스티앙의 검무. 분명 속도도 느리지 않았지만, 피그리티는 더 우월한 속도로 그걸 피해내고 있었다.
"근데, 결계를 해제할 수는 없는 거야?"
"아쉽게도 매직 카운터를 해제하는 건 어려워."
"왜지?"
"일반적인 디스펠 마법으로는 해제가 안 되고, 술자를 죽이거나 술자가 직접 해제해야 하는데 그게 누군지도 모르잖아."
확실히 피그리티는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다른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다는 것.
"그럼 절대로 해제가 안 되는 건가?"
"아니, 지속시간이 다하면 사라지겠지."
"그게 얼마일지는 모르고?"
"물론이지."
그렇다면 어차피 치료를 하고 와도 리스티앙에게 도움이 되진 못한다. 그럴 바에야 태그로 피그리티를 제압하자.
"잠깐만 기다려봐."
로지에에게 잠깐 멈춰 서길 부탁하고 격렬하게 싸우고 있는 두 명에게 집중한다.
하지만 너무 빠른 데다 서로의 위치가 자주 바뀐다. 도저히 태그를 지정해서 사용할 수가 없었다. 괜히 잘못 썼다간 돌이킬 수 없을 테니.
"별수 없군, 얼른 나가자."
결계안에서는 도움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밖에서 도움이 될만한 방법을 떠올리면 된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까. 아픈 몸을 질질 끌며 최대한 머리를 굴려보지만, 쉽사리 좋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리스티앙과 피그리티의 전투는 양상이 변하고 있었다. 리스티앙이 격렬하게 몰아친 공격을 전부 피해낸 피그리티가 반격을 하고 있었다.
리스티앙은 두꺼운 성검으로 공방을 모두 하려고 했으나 피그리티의 파상공격에 전부 대응하지 못했다.
나였다면 일 초 만에 나가떨어졌을 만한 공격을 수도 없이 맞았다. 그러면서도 밀려나지 않고 맞서 싸우고 있었다.
'저게 저번에 말한 방어의 가호 덕인가? 대단한 맷집이군.'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엄청난 맷집. 그에 반해 리스티앙은 확실히 공격력이 떨어졌다. 최초의 기습 이외에는 제대로 공격을 맞추지 못하고 있었으니.
"아!"
그녀들의 전투를 바라보던 나에게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서두르자. 결계는 어디가 끝이지?"
"정확히는 모르겠어. 아직까진 답답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아."
리스티앙이 버틸 수 있을 때, 얼른 해결해야 한다.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