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 기어오는 혼돈(5)
* * *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 난 자네의 상관이라고"
볼을 빨갛게 붉힌 상태로 애써 거절하는 리스티앙. 하지만 분명히 그녀는 흔들리고 있었다.
"아까 저랑 세키돌이 하고 있는걸 본 후에 바로 돌아가시지 않았죠?"
"아니 그, 그걸 어떻게."
"그야 발걸음이 멈췄는걸요."
전쟁과 군 생활 때문에 29살 동안 야한 짓을 해본 적이 없는 이 여자는 분명 야한 일에 흥미가 있었다. 돌아가는 발걸음이 멈췄다가 한참 후에 다시 들렸었기 때문이다.
리스티앙이 나와 세키돌의 소리를 듣고 있다는 걸 눈치챘었지만, 일부러 멈추지 않았었다. 바로 이런 순간을 위해서.
"."
"제 입으로 말하면 웃기지만, 잘생긴 얼굴에 강한 힘을 가진 전생자 정도면 즐길만한 연애 상대는 되지 않습니까?"
"조건의 문제가 아니야. 물론 어릴 때부터 전설의 전생자 이야기는 동경해왔지만."
"그럼 뭐가 문제라는 거죠?"
"결혼할 상대가 아니라면 저속한 행위는 하고 싶지 않아."
"네?"
꽤 개방적인 성 윤리관을 가진 이곳에서 또 엄청나게 보수적인 사람을 만났다. 물론 저 나이까지 처녀라는 것에서 짐작은 했지만.
"전에도 내게 관심을 보이는 남자들은 많았어. 귀족이나 군인 등등. 하지만 내 혼전순결에 관해 얘기하니 다들 떨어져 나가더군. 자네는 어때?"
결혼할 때까지 섹스를 하지 않는다? 솔직히 나는 자신이 없다. 아니 나는 애초에 속궁합도 안 보고 결혼을 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제 넷째 부인으로도 괜찮으시다면야 결혼할까요?"
내겐 이미 세 명의 아리따운 미소녀들이 있다. 리스티앙이 매력적이라고는 하나 말도 안 되는 약속을 할 수는 없기에 자포자기하며 그렇게 말했다.
"정말이야? 전생자의 아내가 될 수 있다니"
이건 또 무슨 반응인가. 네 번째 아내 같은 이상한 소리를 한다며 화를 낼 줄 알았지만, 그녀는 수줍어하며 좋아했다.
"아니, 네 번째라고요? 그 정도 취급에 괜찮으신 겁니까 사령관님은."
"그게 무슨 상관이지? 영웅호색이라고 하지 않나. 나의 어머니도 아버지의 넷째 부인이었어. 어쩌면 이런 게 운명일지도 모르지."
아뿔싸. 나는 아직도 현생의 감각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곳은 일부다처제 정도는 아무렇지 않은 곳이었다. 귀족이나 왕족이라면 흔한 일이겠지. 생각 없이 뱉은 말 때문에 졸지에 부인 후보가 하나 생겨버렸다.
"그, 그렇지만 괜찮으신 겁니까? 저에 대해 아시는 것도 없으신데."
"자네가 말한 대로 그 얼굴에 그 능력이라면 어떤 여자가 마다하겠나? 게다가 군단장을 무찌른 전생자라니 핌베르트의 여자라면 모두 자네를 좋아하지 않을수 없을거야."
이젠 잘 모르겠다. 높은 카리스마의 영향인지 그놈의 전설 탓인지 아무튼 나는 모든 여자에게 사랑받는 모양이다. 내가 그토록 바라왔던 하렘마스터의 길은 이곳에 있었다.
"그럼, 약혼의 표시로 입맞춤이라도 하겠어?"
라고 말하며 갑자기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리스티앙. 이래도 되는 걸까? 그래도 한나라의 보병 사령관을 이렇게 쉽게 첩으로 삼아도 되는 건가?
그저 가볍게 섹스나 한 번 하려다가 졸지에 부인이 생겨버린 상황에 직면해 당황하고 있는 나에게 리스티앙이 점점 다가온다.
에라 모르겠다며 눈을 감는 그 순간.
"사령관님! 큰일입니다!"
지휘 막사 밖에서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적의 습격입니다!"
갑작스러운 습격. 그래도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눈을 떴다.
쪽.
"어?"
이 와중에도 그녀의 입술은 다가오고 있었고, 눈 뜨자마자 부드러운 것에 내 입에 닿았다.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거니까 책임지라고."
볼을 빨갛게 붉힌 채로 시선을 피하면서 말하는 그녀.
"마왕을 잡으면 식을 올리러 오겠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말하고 바로 성문 쪽으로 달려나갔다.
****
[막간 : 금태양의 목적]
케이션은 당황했다. 자신의 상식선을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믿을 수 없었다.
"가자고 빨리."
자신을 오랫동안 구속해왔던, 절대적 강함을 자랑하는 것 같던 그 아프리를 바람 빠진 풍선처럼 축 늘어지게 만든 골드 선테인이었다.
"이, 이쪽으로 가면 돼, 돼요."
아직 이 사내에게 높임말을 쓰는 그것조차 어색하다. 얼마 전까진 하대했었으니까. 하지만 그의 강함은 진짜다. 순식간에 아프리에게 도약하더니 그를 붙잡고 걸레짝으로 만들어버렸다. 무슨 마술을 부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아프리가 만약 방심하지 않고 미리 준비했다면 분명 이렇게 쉽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이 남자는 강하다고 생각했다. 주인으로 모실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실 거에요?"
케이션의 안내덕에 아프리의 성을 빠르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골드 선테인이 하고 싶은 일은 명확했기 때문에.
"복수를 할 거야."
"아까 말했던 그?"
"그래, 최근에 마왕군에 별일은 없었나? 정보가 필요한데."
"딱히 별일은 아, 얼마 전에 제1군단장이 죽었어요. 사천왕 바로 밑급으로 강한 마족인데."
"누구한테 죽었는데?"
"그거까진 몰라요. 다만 이상한 능력을 쓰는 게 알려져서 사천왕들의 회의에선 전생자가 아니냐는 얘기가 나와서 시끄러웠어요."
골드선테인은 전생자라는 단어에 자신에게 굴욕감을 준 사내를 떠올렸다.
'그 녀석이겠군. 강단백. 나대고 다니더니 벌써 마왕군과 싸우고 있나.'
"마왕을 잡는 용사라도 될 생각인가 그 새끼는."
"?"
"그래서 그 군단장이 당한 곳은 어디야?"
"라르디노 성 마족 게이트 부근이었다고 들었어요."
"그리로 안내해라."
케이션은 가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지금 마왕군의 배신자가 아니던가.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한다면 죽을 것이다.
"사실 저는 가고 싶지 않아요. 다른 고위 마족에게 들킨다면 전 죽을 테니까."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지? 넌 내 말을 안 들으면 지금 죽을 수도 있어."
"."
"그리고 다른 마족은 무서워할 필요 없다. 널 죽게 두진 않을 거니까."
케이션은 그의 말이 든든하게 느껴졌다. 허세가 아니라는 건 직접 두 눈으로 봤다. 무려 사천왕중 한 명을 쉽게 제압했으니까. 어느 정도로 강한 것인지는 짐작이 가지 않지만, 분명히 이 남자는 특별하다.
"넌 나만 두려워하면 돼."
"알겠어요."
골드 선테인은 고양감을 느끼고 있었다. 모든 게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느낌. 어서 강단백을 죽이고 싶었다.
'그 새끼를 죽이고 진정한 금태양으로 거듭나주지. 귀족이든 왕족이든 다 따먹어버리겠어. 큭큭.'
그는 좋아지는 기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케이션의 뒤를 따랐다.
****
"뭔가 이상한데? 아침에도 막아냈는데, 아직도 이렇게 숫자가 많다고?"
리스티앙은 당황하고 있었다. 확실히 나로서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게이트도 부쉈는데 이만한 마물들이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거지?
우선은 다급하게 불의 장벽을 펼쳐 성문이 뚫리는 건 방어했다. 하지만 날 수 있는 윙들의 숫자가 많았고, 벽을 탈 수 있는 도그들은 절벽을 타서 우회했다.
게다가 해가 져서 날은 점점 어두워진다. 마족보다 시야에 더 의존해야 하는 인간으로서는 시간이 끌릴수록 불리하다.
"하아앗!"
블랙 미스릴 소드를 활용해 최대한 성안으로 마물들이 들어오는걸 막으려했지만, 숫자가 너무 많다. 게다가 아침부터 싸워온 터라 너무 피곤했다.
"하아, 함부로 범위 마법을 쓸 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하지?"
"전생자라면서 자동추적 마법도 못 쓰는 거야?"
내 혼잣말에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아까 치료를 해주었던 붉은 머리 여자였다.
"자동추적 마법?"
"하아? 뭔지도 모르는 거야? 잘 보라고."
그녀의 손 앞에 마법진이 펼쳐지더니 몸 주변에 동그란 불덩이들이 생겼다.
"오토 파이어볼트. (Auto Firebolt)"
그녀의 마법은 놀라웠다! 붉은 구체들이 지능을 가진 것처럼 자유롭게 움직이면서 마물들에게만 파이어볼트를 날렸다.
"마법이 어떻게 피아식별을 하는 거지?"
"그거야 간단하지. 마법을 쓸 때 뭘 적으로 인식해야 할지 심어주면 되는 거잖아?"
응용력, 아니 나로선 상상력의 부재였을까. 이런 마법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무엇이든지 상상만 가능하다면 쓸 수 있는 사기적인 능력을 갖춘 나라도 생각조차 못 한 마법은 쓸 수 없으니까.
"고마워. 네 덕분에 좋은 마법을 하나 알게 됐군."
그녀에게 감사를 표한 뒤 바로 마법을 쓴다.
"오토 파이어랜스! (Auto Firelance)"
수많은 붉은 구체들이 생겨나고 그것들이 파이어랜스를 쏘며 알아서 마물을 요격하기 시작한다. 성능은 확실했다. 병사들이 뒤얽혀 싸우고있어도 정확하게 마물만 공격한다. 범위 보다는 파괴력에 집중된 마법이라 마물만 골라잡기에는 더욱 효과가 좋았다.
"진짜 전생자였었네 당신. 보자마자 마법을 카피한다고? 게다가 상위호환? 하아, 상심이 크네."
그녀는 내 마법을 보고 감탄했다. 나와 그녀의 자동 추적마법으로 수비는 상당히 편해졌다.
"난 로지에라고해 당신은 이름이 뭐야?"
"강단백."
"이상한 이름이네. 아무튼, 영광으로 알아도 돼. 난 사람에게 흥미가 없거든. 모르는 사람 이름을 물어본 건 당신이 처음이야."
"재밌는 여자네. 아무튼, 너도 다른 데선 천재 소리 좀 들었겠어. 이런 마법은 상상도 못 했거든."
"물론이지. 마법사의 탑에서도 몇백 년 만에 나온 천재라며 할배들이 날 얼마나 좋아하는데."
"오케이. 자기 자랑은 거기까지 하고. 숫자가 생각 이상이라 수비만 해서는 답이 없을 거 같아. 넌 어떻게 생각하지?"
하고 싶은 말이 더 있었던 듯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의 그녀였지만, 금세 대답했다.
"맞아. 어디선가 이 녀석들에게 명령하는 놈이 있을 거야. 지휘만 없앤다면 마물들의 공격도 멈추겠지."
"좋아, 찾아내자고. 천리안 (clairvoyance)"
시야가 비약적으로 넓어지고 수 킬로미터 떨어진 위치도 눈앞에 있는 것처럼 확인할 수 있는 마법. 제5군단장 피그리티와의 첫만남에서도 사용했었다.
저번에 놓쳤기에 다시 나타날 것을 기대하고 그녀가 나타났었던 절벽 쪽을 확인했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역시, 뻔한 위치에는 없나?'
나는 그렇게 아쉬워하며 반대편 절벽으로 시야를 향하고는 곧장 실망했다.
피그리티가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낮은 지능에 탄식하고 로지에에게 말했다.
"바로 처리할까. 발견했어. 멍청한 지휘관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