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 세계를 속여라(4)
* * *
루시페르가 가볍게 휘두른 공격은 상상 이상으로 강했다. 속도는 빠르지 않았는데도, 내 빈틈에 공격했기에 피할 수 없었다. 파괴력도 상상 이상이었다.
얼마나 강한 힘인지, 손짓 한 번에 내 몸은 벽에 쑤셔박혔다. 온 몸에 가해지는 엄청난 충격.
싸울 의지마저 없어질 정도로 압도적인 격차.
하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다. 태그를 외친다.
"[tag : bondge]"
피그리티에도 먹혔던 완벽한 속박을 상상했다.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다면 저 녀석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어쩔 수 없을 것이다.
파칭
태그에 의해 소환된 밧줄과 루시페르의 몸에 둘러진 결계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밧줄은 사라졌다.
"그건 무슨 마법이지? 처음 보는군. 하지만 무의미 해. 내겐 아무것도 닿을 수 없거든."
'이럴 수가'
솔직히 말하자면 태그를 쓸 때 약간의 불안감이 있긴 했다. 혹시나 먹히지 않으면 어떡하지라는 약한 생각. 역시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게이트를 부순 값은 치뤄야겠지. 저게 얼마나 만들기 까다로운 줄은 아나?"
그 말과 동시에 내게 다가와 또 손을 휘두르는 루시페르. 빠르긴 했지만 절대 못 피할 정도의 속도는 아니다.
피그리티, 아니 세키돌 보다도 느리다. 분명 아깐 맹공 후에 지쳐서 반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살짝 뒤로 스텝을 밟아서 피했다. 그런데, 또 날아가서 벽에 박혔다.
"커헉!"
피했는데, 맞았다. 이게 의미하는 바는 뭐지? 피했다는 게 나의 착각? 그럴 리가 없다.
'보이는 것보다 사거리가 긴 공격인가!'
제5군단장인 피그리티를 비교적 쉽게 제압했었다. 하지만 제1군단장은 다르다. 움직임만 보면 느릴지 몰라도 보이는 것과 다른 사거리의 공격, 그리고 저 결계는 무적이다. 태그도, 블랙 미스릴 소드도 통하지 않는다. 마법 또한 검격이 막힌 것처럼 결계를 다시 겹쳐쓰면 그만일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상대는 말 그대로 무적(無?)
패닉상태에 빠져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는 나와 다르게 세키돌은 다시 일어나 루시페르에게 연속적인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
기합을 지르며 건틀릿을 낀 주먹을 쉴새 없이 휘두르는 세키돌의 모습은 전광석화. 그녀에게서 엄청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세키돌의 공격이 루시페르의 결계에 막힐 때 마다 엄청난 폭발음과 광풍을 일으켰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용맹해서 세키돌을 처음 만났을 때 처럼 공포가 느껴질 지경이었다.
쩌저저적
루시페르가 가진 결계도 금이 가기 시작한다. 무적의 결계조차 깨질 수 밖에 없는 정신 나간 공격. 맹공을 너머 광공(??)이었다.
"꽤 잘 싸우는 인형이군. 조교시켜서 핌베르트 왕을 잡는데 쓰면 딱 좋겠는걸."
결계가 금가기 시작해도 여유로운 루시페르. 열심히 공격하는 세키돌을 바라보다 결계가 깨지기 직전, 다시 결계를 덧씌운다.
"하아아아압!"
기합을 넣는 세키돌. 결계가 다시 생겨도 상관하지 않고 다시 공격한다. 주변의 대기마저 찢어버리는 강력한 뒤돌려차기. 맞는다면 분명 바위마저 산산조각 날만한 엄청난 파괴력.
그래도, 결계를 뚫을 순 없다.
"그냥 죽여버리기엔 아깝군, 쉬고 있어라."
그리고 또 다시 손을 휘두르는 루시페르. 민첩한 세키돌은 쉽게 그 공격을 피했으나,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그리고 일어나지 못했다.
육안으로 보이는 것보다 사거리가 긴 공격. 거리감이 잡을 수 없기 때문에 세키돌 조차 피하지 못했다. 세키돌이 피하지 못했는데 내가 피할 수 있을까?
내 신체능력은 세키돌보다 확연히 떨어진다.
두 명의 동료가 마나를 잃은 쇼크로 기절했고, 세키돌도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분노가 밀려와서 견디지 못해야 할 상황이다. 하지만 나는 그저 엄청난 무력감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크헉!"
루시페르의 공격. 나는 무방비하게 계속 얻어맞으면서도 반격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동료를 구할 수 없는 데서 오는 절망감, 압도적인 힘 앞에서 느끼는 절대적인 공포.
여태까지의 적들은 어떻게든 할 수 있었다. 만티코어도, 샌드웜도, 피그리티도 전부 강했다.
하지만 결국 태그가 통했기에 이길 수 있었다. 그래, 태그가 통했으니까 이길 수 있었다.
"재미있는 녀석인 줄 알았는데, 저항도 하지 않는 건가? 넌 대체 뭐지?"
루시페르의 비아냥. 그의 말이 귀에는 들리지만 멍하다. 머리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많이 맞아서 그런 건가? 난 대체 뭐지?
방구석에서 히토미에 빠져서 살던 인생. 트럭이 아닌 택시에 치였어도 히토미 같은 섹스를 하고 싶었기에 이세계로 올 수 있었던 행운아. 히토미의 태그술사라는 사기적인 능력을 가진 전생자.
그래, 어쨌든 결국 내 인생에서 히토미와 태그를 빼놓을 순 없다.
"푸하하하!!"
너무나도 간단한 결론.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루시페르에게 얻어맞아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됐는데도, 웃음이 나왔다.
"네 녀석, 미쳐버린 건가? 간만에 강한 상대인 줄 알았지만 재미가 없군. 그만 죽어라."
"그래, 죽일 수 있다면 해보시지. 히토미에 미친 나라는 괴물을."
그래, 뭘 그렇게 무력감에 빠져있었던 거냐. 고작 태그하나 막혔을 뿐인데. 어차피 내겐 태그 뿐이다. 태그가 막히는 세계? 그렇다면 그 세계 조차 속이겠다.
저장된 태그력의 양은 충분하다!
"[tag : petrification]"
석화 태그. 전 세계적으로 취향을 찾기 어려울 정도의 마이너 태그. 먹힌다면 상대방은 굳어버릴 것이다.
파칭
하지만, 당연히 결계에 막혀 통하지 않는다. 저 결계는 모든 효과를 막는다.
"[tag : ryona]"
루시페르를 갈기갈기 찢어버리는걸 상상하며 외친 태그. 무형의 기운이 나타나 그를 찢어버리려 한다.
파칭!
당연히, 먹히지 않는다. 결계에 막힌다.
"[tag : amputee]"
루시페르의 사지를 잘라버리는 상상을 한다. 무형의 무언가가 사정없이 공격을 가한다.
파칭! 파칭!
통하지 않는다. 결계는 모든 효과를 막으니까.
쩌저저적
그러나, 금이 간다. 또 다른 태그를 떠올린다.
"[tag : machine]"
전기톱이라는 강력한 기계를 상상했다. 모든 걸 갈아 버릴만한 강한 전기톱을.
콰카카카캉! 콰칭!
금이 갔던 결계가 깨졌다. 효과는 굉장했다. 짧은 주기로 지속적인 공격을 가할 수 있는 공격. 결계를 깨기에 아주 적합한 태그다.
"뭐냐! 이 거대한 물체는!"
이 세계에는 기계가 없다. 적어도 내가 아직까지 본 결과 스팀펑크 세계관은 아니었다. 그러니, 저런 대형 전기톱에는 놀라는 게 당연하다. 비록 무형이라 잘 보이진 않지만.
서둘러 결계를 새로 만드는 루시페르.
하지만 가능성을 발견했다. 난 멈추지 않았다.
"[tag : machine]"
"[tag : machine]"
"[tag : machine]"
"[tag : machine]"
태그력이 다 떨어져도 좋다. 그러다 내가 쓰러져도 상관없다. 내 동료들을 지킬 수 있다면!
"으아아아!!!"
"[tag : machine]"
"[tag : machine]"
"[tag : machine]"
"[tag : machine]"
샌드웜 때 보다 더 연속으로 태그를 사용했다. 세계의 법칙을 거스르는 괴이한 능력. 과도하게 사용하는 건 확실히 몸에 무리가 온다. 마나가 타들어 가는 느낌과는 다르다. 몸 안의 생명력이 떨어져 가는 느낌.
그래도, 계속 태그를 외쳤다.
"[tag : machine]"
"[tag : machine]"
"[tag : machine]"
"[tag : machine]"
무형의 전기톱들이 수도 없이 겹쳐진다. 하나, 둘, 다섯, 열, 이십.
"이딴 영문도 모르는 것에 당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역부족이다.
전기톱 하나만으로도 결계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는데, 그것이 수없이 중첩되니 결계를 덧씌우는 속도가 전기톱의 연속적인 공격을 따라가지 못했다.
콰칭! 콰치치칭!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간다. 루시페르를 지키던 무적의 결계들이 깨져나간다. 블랙 미스릴 소드를 쥔다.
결계를 부수는 속도가 결계를 덧씌우는 속도를 넘어섰을 때, 그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는다.
바로 지금이다. 지쳤지만 남은 힘을 쥐어짜내 일격을 가한다.
"말도 안 되는"
뎅겅
루시페르의 목이 바닥에 떨어지고, 곧 재로 변해 사라진다. 해냈다는 기쁨이 밀물처럼 몰려온다.
하지만 그걸 만끽할 여유는 없었다. 기절한 에린델과 비렌데의 상태를 살핀다.
"에린델! 비렌데!"
대답하지 않는다. 갑작스레 마나를 잃은 데서 온 충격이 큰듯하다. 서둘러 손가락을 코에 대어 보고 맥박을 잰다.
다행히 맥박은 뛰고 있고 숨도 쉬고 있다. 살아있었다. 기절한 것뿐이다. 하지만 어떻게 될지 모르니 서둘러 필리포 성으로 데려가야 한다.
"으 대장님 어떻게 된 거야?"
비렌데와 에린델을 보고 있던 사이 반대편에 쓰러져있던 세키돌이 일어났다.
"루시페르는 죽였어. 근데 에린델과 비렌데가 일어나지 못하고 있어. 얼른 필리포 성으로 복귀해야 해. 업고 가야 할 거 같은데 괜찮아?"
"응. 물론이지. 세키돌은 튼튼해."
빠른 이동이라면 텔레포트가 최고다. 하지만 저번에 시도했을 때 단체이동은 되지 않았다. 날아갈 수밖에 없다.
에린델쪽이 비렌데보다 키가 크기 때문에 에린델을 내가 업는다. 세키돌은 비렌데를 업었다.
"에테르 윙 (Etherwing)"
나와 세키돌에게 마나의 날개를 달고 절벽 위로 날기 시작한다. 루시페르와 전투 때문에 생겨났던 소음 때문에 몬스터들이 뒤늦게 더 몰려들었다. 파이어볼 같은 하급 마법들이 날아왔지만, 에테르 윙의 속도는 느리지 않았고 어렵지 않게 피할 수 있었다.
"오오 대장님, 재밌어. 날개 달고 나는 거!"
"그러게, 난다는 건 이렇게 재밌는 일이구나."
드넓은 하늘을 마음대로 날 수 있다는 건 아주 매력적인 일이었다. 조금 전까지 목숨을 걸린 전투를 하느라 힘들었는데, 그런 스트레스가 날아가는 듯했다.
바람을 맞으며 하늘을 나는 일, 가끔 시간 날 때 즐기는 버릇이 될 것 같다.
"그런데, 처음부터 날아서 왔으면 더 빠르지 않았어?"
"아, 그러네."
이번만큼은 세키돌이 천재인 건지 내가 바보인 건지 헷갈리지 않았다. 내가 바보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