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 세계를 속여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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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았다. 게이트를 부수러 가야 한다. 걱정이 되지만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어제 리스티앙과 얘기하고 나서 동료들과도 얘기했지만 별다른 수확은 없었다.
비렌데나 에린델도 게이트에 대한 건 자세히 알지 못했다. 결국 직접 부딪혀봐야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모양. 그래 봐야 마법으로 부서지지 않을 리는 없겠지. 고민하기보다 직접 가서 시험해보면 될 일이다.
"어쩌면 이번 일은 정말 위험할지도 몰라. 여태까지 우리가 해온 싸움들은 애교로 느껴질 만큼. 그래도 다들 같이 갈 거야?"
"세키돌은 앞만 보고 있어. 대장님과 마왕을 잡고 나서 즐겁게 사는 미래."
이 인형은 가끔 멋있는 말을 한다. 나보다 멋있을 때가 있는 거 같아.
"아아, 이럴 줄 알았으면 안 따라오는 건데. 난 그냥 주인하고 돌아다니면서 섹스나 하고 싶었을 뿐인데 . 후우, 어쩔 수 없지 이미 늦었잖아.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지."
달관이라기보다는 포기에 가까운 감정을 내비치는 비렌데. 그래도 멘탈을 많이 붙잡은 모양이다. 즐기려는 자세가 좋다.
"마왕군에게 복수를 위해서 악착같이 살아남았어. 내 걱정은 하지 마. 싸우고 싶어서 근질거리는 상태니까."
에린델도 불안한 마음을 많이 떨쳐낸 것 같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투지가 보였다. 복수심이 더 커 보이는 것이 조금 불안했지만.
"이번 우리의 작전은 간단해. 우리 넷이서 몰래 게이트 근처까지 잠입해서 게이트를 부수는 거야."
리스티앙에게 받은 지도를 내밀고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게이트에 대한 정보가 없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지만, 분명 강한 마법을 쏟아낸다면 부서지겠지. 그게 안 된다면 태그를 쓰는 방법도 있고."
"주변에 게이트를 지키는 마물들이 많을 거야. 어쩌면 고위 마족이 있을 수도 있고."
비렌데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어 나갔다.
"맞아. 그래서 생각한 계획은 게이트 근처로 가서 광역마법으로 주변과 게이트를 한 번에 쓸어버리는 거야. 이게 가능하다면 사실 우리의 전투는 길어질 필요도 없어. 게이트만 부수고 다시 이쪽으로 돌아와 왕국군과 같이 전진하면 되니까."
"그게 안 됐을 때가 문제네?"
"그렇지. 게이트가 마법으로 부서지지 않을 경우에 가까이 다가가서 태그를 써야 하니까. 내 돌파를 너희들이 도와줘야 해."
"태그는 멀리서는 사용이 안 되는 거였어?"
에린델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묻는다.
"엄청나게 먼 대상한테는 써보지 않았지만, 적어도 눈에는 확실히 보여야 내가 대상을 지정할 수 있으니까 말이지."
"저번에 샌드웜을 잡았던 그 촉수는 어떨까?"
"꽤 먼 거리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겠지만, 물리적 공격으로 게이트가 파괴되지는 않을 것 같아."
"확실히 그렇네."
"아무튼 출발하자. 부딪쳐봐야 답이 나올 것 같으니까."
그렇게 간단한 브리핑을 마무리하고 우리는 필리포 성 후문을 향해 걸었다.
필리포성 후문에서 나와 크게 우회해 라르디노 성 근처로 향했다. 최단 거리인 정면으로 향할 수는 없었다. 필리포 성 앞은 고지대라서 지형적으로 포위되기가 쉬웠다. 전후방만 막히면 그대로 갇히는 신세가 돼버린다.
아무튼 꽤 먼 거리를 가야 한다. 버프가 필요하다. 이동속도 증가와 신체 강화 마법을 걸려다 비렌데에게 부탁한다.
"헤이스트랑 피지컬 인챈트 좀 부탁해 비렌데."
"주인. 궁금한 게 있어. 나보다 마법도 잘 다루고 마나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 왜 항상 나한테 부탁하는 거야?"
"그건 간단하지. 자위보다 대딸 받는 게 기분 좋잖아."
"."
당황했는지 잠시 말을 잃었던 비렌데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 여기서 한발 뽑고 갈까?"
"아냐 미안. 농담이었어. 사실 내가 버프를 써도 큰 차이는 없을 텐데, 묘하게 비렌데가 써주면 몸이 더 가벼운 느낌이 있더라고. 왜 그럴까?"
"적성 때문인가? 아무래도 나는 신성, 치유마법에 적성이 있으니까."
"크, 진짜 누가 생각한 건지 개꼴리는 설정이라니까. 이 세계를 만든 신이 있다면 꼴잘알인 게 분명해. 신성, 치유마법을 쓰는 서큐버스? 배덕 감에 몸이 떨린다."
"꼴리면 한 발 빼자니까? 며칠 안 했더니 나 삶의 의욕이 없어."
그러고 보니 나는 몰래 마족을, 그것도 무려 군단장을 따먹었지만, 섹스 없이 못 사는 이 가련한 서큐버스는 며칠째 야한 짓을 못하고 있다.
"아 나도 물론 하고 싶지. 근데 지금 우린 한 왕국의 존망이 달린 큰 임무를 하러 가는 중이잖아. 참아야지."
"아~ 섹스하고 싶다~"
나와 비렌데의 대화를 옆에서 조용히 듣던 에린델이 입을 열었다.
"흥, 변태들."
"변태라니, 섹스가 얼마나 기분 좋은 건데. 에린델이 아직 안 해봐서 그렇다니까. 이참에 해보는 건 어때? 여기 어디 가서 안 꿀릴 대물자지도 있는데."
비렌데가 내 하반신을 가리키며 에린델에게 상스러운 말을 해대기 시작했다.
"시, 싫어 나는 내 신념이 있어.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 하기 전까지는 그런 짓 안 할 거야!"
"흐응, 요즘 세상에도 혼전순결이 있네. 진짜 천연기념물이다. 게다가 엘프. 희귀종 더하기 희귀종이네. 주인. 이건 역사에 기록을 남겨야 할 정도야."
확실히 지금 이 세계는 길드 게시판에 비밀친구란이 있을 정도로 문란한 세상이긴 하다. 에린델 같이 150년간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슈퍼처녀는 없을 것이다. 말 그대로 성역.
"그럼그럼! 그러니까 에린델 같은 성스러운 존재는 오히려 함부로 건드리면 안되는 게 아닐까? 이런 세상에 어디 가서 이런 특급 처녀를 만날 수 있겠어. 찬양하라! 성녀 에린델!"
"한마디만 더하면 쏠 거야."
우리의 놀림이 과했는지 에린델이 활을 내게 겨누었다. 나는 양손을 위로 올리고 항복 의사를 전달했다.
"하, 항복. 쏘지 마세요. 아직 뚫려본 적 없는 사람에게 뚫리고 싶진 않아요."
따악
"악! 아파."
화살에 뚫리진 않았지만, 활대로 얻어맞았다. 역시 오래 산 엘프답게 보는 눈이 있었다.
좋은 활을 샀구나. 엄청 아프네.
****
긴장을 풀기 위해 말장난을 한 게 큰 도움이 되었다. 긴장이 풀리자 몸도 한결 가벼워져서 속도를 내기 좋았고 빠르게 달렸다. 가는 동안 마물은 귀신같이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집결해 있는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빠르게 라르디노 성 근처 언덕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반나절 만에 여기까지 왔으니까.
"저기 보이는 게 라르디노 성인가 보군."
"지도상으로 보면 성 북쪽 구릉 너머에 게이트가 있는 모양이야."
"에렌델의 시야로도 게이트는 여기서 안 보이지?"
"응 더 높은 곳에서 보면 모르겠지만, 여기선 전혀 안 보여."
"좋아. 이동속도와 신체 강화 마법 다시 걸고 가까이 가보자고."
그렇게 말하며 비렌데에게 눈짓했다.
"예, 주인씨. 버프 노예 일하겠습니다."
그렇게 버프 노예의 고성능 버프를 받고 라르디노 성북 쪽 구릉 쪽으로 이동했다. 확실히 게이트에 가까워지자 마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대량의 마물들이 어디론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잘못하면 들키겠군. 들키기 전에 대비해야겠어.'
오랜만에 차분한 상태에서 마법을 쓴다. 주변의 마나는 충만했고 아지랑이가 요동치는 것이 강하게 느껴졌다. 체내의 마나를 소모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주변의 마나를 끌어다 썼다.
"인비저빌리티 (Invisibility)"
마왕군에게 들키지 않게 나와 파티원 모두에게 투명 마법을 걸었다. 눈앞에 있던 세 명의 미소녀들의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아무도 안 보여 대장님!"
세키돌이 많이 당황하면서 얘기했다.
"쉿, 세키돌 소리 낮춰. 주변에 마물들이 있으니 들키지 않기 위해서 투명 마법을 썼어. 우선 오른쪽에 보이는 언덕 위 큰 바위까지 가서 게이트가 보이는지 확인해보자."
"응, 신기해. 투명 마법이구나 이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났다. 아무래도 신기했는지 팔을 훅훅 휘저어 보는 모양이었다. 귀여운 녀석.
내 눈에도 내 모습이 보이지 않자 이동하는 데에 약간에 문제가 생겼지만, 금세 감각에 익숙해져 보폭을 잡을 수 있었다. 큰 바위까지 도착해서 얘기를 시작했다.
"에린델. 사실 나는 이거 처음 써보는 마법인데, 전투하면 풀릴까?"
"글쎄. 원래 인비저빌리티면 풀리는 게 일반적일 거야. 근데 넌 마법도 제멋대로 변형해서 쓰잖아."
확실히 그렇다. 이세계로 온 후엔 마치 내가 게임의 운영자인 것 같이 상상한 마법은 다 구현할 수 있었다. 강도도 범위도 모두 내가 상상한 만큼 조절이 가능했다.
'뭐라고 생각했더라.'
그런데 이번엔 그냥 막연히 투명해지는 것만 상상했다. 섬세함이 부족했다.
"그럼 테스트를 해보자. 갑자기 마왕군들 한가운데서 풀렸다간 큰일이잖아."
"좋아. 나 바위 앞에 있어. 날 때려봐."
"처녀에게는 너무 자극적인 플레이 같은데."
퍽
괜한 헛소리를 했다가 뚜드려 맞았다. 복부에 강렬한 통증과 함께 에린델의 모습이 보였다.
"으윽, 보이네? 근데 에린델 운동했어? 펀치력이 상당한데."
"응, 운동했어. 성과를 좀 더 보여줘야겠네."
퍽 퍼억
아, 이건 아프다. 맞은 데를 또 맞았다. 이건 보이는 게 분명하다. 가녀린 팔뚝과 얇은 손목을 가진 거 치곤 상당히 묵직한 연속 보디블로였다.
"큭 마왕 잡는 데는 문제가 없겠어. 든든하다! 에린델."
"흥, 주먹으로 싸울 일은 없어. 단백 때릴 때 말고는."
에린델에게 맞고 나자 내 손이 보이기 시작했다. 약간의 딜레이가 있긴 했지만, 맞은쪽도 금세 풀렸다. 물리적 충격을 가하거나 받는 경우에 풀려버리는 좀 아쉬운 투명 마법이었다.
디스펠을 시전해서 모두의 은신을 풀고 다시 마법을 썼다.
"인비저빌리티 (invisibility)"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로 풀리지 않을 절대적인 은신을 생각하며 영창을 했다. 최대한 주변의 마나를 끌어쓴다는 느낌은 잊지 않았다. 아까도 그렇게 했지만, 마나가 체내에서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 만큼 마나 요구량이 높은 마법이었다.
"좋아. 이번엔 좀 다를 거야. 자 다시 때려보세요 권투엘프 에린델씨."
"배에 힘 꽉 줘."
성공한다면 말 그대로 날로 먹는 것이 가능하다. 몰래 게이트에 상급 마법을 박아버리고 도망쳐 오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귀찮은 전투에 휘말릴 일도 없다.
퍽
"윽, 아니 테스튼데 세게 때릴 필요 없잖아요. 에린델 씨. 뭔가 악의가 느껴집니다."
"응? 아니 전혀? 난 강단백 좋아해. 악의를 가질 이유가 있겠어?"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이 여자는 평소에 나를 많이 때리고 싶었던 게 분명하다.
그리고 최악의 결과가 나타났다. 보였다.
"왜, 왜 보이지?"
이건 소위 말하는 '억까'였다. 다 되는 전생자로 소환 시켜 줬으면 다 되게 해줘야지 일부는 안되는 시스템. 이게 날 살려준 여신님이 의도한 거라면 상당히 짜증이 난다.
"주인답지 않은데? 뭐든 가능한 사람으로 보였는데."
"확실히 이상하네. 단백이 상상하는 건 뭐든지 되는 거 아니었나."
시무룩 해졌다. 샌드웜에게 변형 태그가 먹히지 않은 이후 처음 겪는 실패.
"대장님. 괜찮아. 들키면 내가 마물들 다 때려잡을게."
"역시 세키돌! 너밖에 없어!"
그렇게 세키돌을 끌어안고 쓰다듬었다. 배시시 웃으며 좋아하는 세키돌. 하지만 세키돌을 안고 있어도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다.
원래 농담 따먹기를 좋아하는 나지만, 오늘은 억지로 높은 텐션을 내고 있었다. 게이트를 부수는 건 쉽지 않을 거 같단 생각이 들었기에. 꼭 무슨 일이 있을 것 같은 불안함이 나를 괴롭혔다.
동료들에겐 전혀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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