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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토미의 태그술사-39화 (39/57)

〈 39화 〉 세계를 속여라

* * *

"대장님!"

성벽 아래로 내려오자 성 안쪽으로 떨어졌던 세키돌이 나에게 뛰어 들어와 안겼다.

"세키돌! 무사했구나 다행이야."

"응, 괜찮아. 아까 떨어진 충격으로 기절했었나 봐. 헤헤."

조금 멋쩍어하며 대답하는 세키돌.

"대장님이야말로 괜찮아? 아까 그 뿔 달린 마족은 어떻게 됐어?"

"처리할 수 있었는데, 방심해서 놓쳤어."

"엄청나게 강하던데, 역시 대장님 대단해! 도망치게 하다니."

평소와 같이 나를 칭찬해주는 세키돌의 말에 마냥 웃지는 못했다. 내가 피그리티를 좀 더 빠르게 제압했다면 세키돌이 맞을 일도 없었을 텐데.

"다친 곳은 없어 보여서 다행이네."

"세키돌은 떨어진 충격으로 팔이 부러졌었어. 치유 마법으로 낫게 한 거야."

뒤따라온 비렌데가 대신 대답했다.

"그랬었군."

나는 비렌데에 말에 곧장 시무룩해졌다.

"그렇게 신경 쓰지는 마. 주인. 이런 일에 하나하나 시무룩해서 하면 앞으로 싸움은 어떻게 하려고?"

말투는 퉁명스러웠지만 분명 나를 걱정하는 말이었다. 분명 앞으로 더 다칠 수 있고 더한 일이 생길 수 있다. 멘탈을 잡아야 한다.

그렇게 얘기를 나누는 사이 리스티앙의 명령으로 성문이 열렸고 바깥에 떨어졌던 에린델이 모습이 보였다.

마물들이 후퇴하기 전까지 상당히 시달렸는지 피곤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에린델! 괜찮아?"

"괜찮아. 바닥 떨어지기 전에 바람계 마법으로 충격은 막았거든. 그나저나 어떻게 된 거야? 아까 그 마족이 도망가는 거 같던데."

"제압하는 데 까진 성공했었는데 방심해서 놓쳐버렸어."

괴롭히려다가 흥분해서 섹스했고, 그러다가 놓쳤다고 말할 순 없다. 그랬다간 에린델의 주먹이 내 얼굴에 박힐지도 모르니 이건 선의의 거짓말이다.

"반응할 수도 없을 만큼 빠르던데, 용케 내쫓았네. 그 능력을 쓴 거야?"

"물론 썼지. 전투로는 답이 없어. 그 녀석 주변을 느리게 하는 능력이더라고 당하는 사람은 인식할 수도 없고 말이야."

내 말을 들은 에린델의 안색이 변했다.

"상대가 인식할 수 없게 느려진다고? 고위 마족인가."

"군단장이라던데. 다섯 번째 정도 된다더라."

"뭐!? 군단장!?"

에린델의 동공이 놀란 올빼미처럼 커졌다.

"군단장을 이긴 건가. 역시 전생자가 맞긴 하구나 단백."

"군단장이 그렇게 센 건가? 그래도 그 사천왕인지 뭔지 하는 녀석들 보다는 훨씬 약한 거 잖아?"

"그렇긴 하지. 그렇지만 군단장 하나면 몇만의 군대 정도는 우스우니까. 웬만한 자연재해보다 무서운 재앙이지."

"그럼 나는 자연재해를 막는 신이 되면 되지. 재해를 막는 자 강단 백. 크으~"

"."

그렇게 에린델을 꿀 먹은 벙어리로 만들고 휴식을 위해 막사로 이동했다.

막사로 이동하는 길에 보이는 풍경은 즐거운 것들이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습격 때문에 죽어 나간 병사들을 실어 나르고 있는 모습들. 상처를 입은 병사는 괴롭다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비렌데, 미안한데."

"알았어. 무슨 말을 할지 알겠으니까. 먼저 들어가서 쉬고 있어. 주인."

비렌데는 그렇게 말하고는 어깨가 뜯어져 나가 괴로워하는 병사에게 다가가 치유마법을 쓰기 시작했다. 빠른 치유 속도에 병사들은 다들 놀라는 분위기였다. 어깨가 원상 복구되자 상처를 입었던 병사는 비렌데에게 감사 표현을 했다.

"감사합니다! 죽는 줄 알았는데."

"와! 치유사가 왔어!!"

"어제 말했잖아. 성벽에서 광역 치유마법도 쓰던데 저 사람."

리스티앙에게 들은 바로는 마법사나 치유사 등 체내 마나가 높은 사람들은 다 죽었다고 했다. 치유마법을 쓸 줄 아는 사람이 왔다는 건 병사들에게 아주 고무적인 일이었다.

"저쪽에 있는 분은 전생자래. 어제오늘 엄청나게 큰 파이어 월 봤지? 다 저분이 쓴 거라던데."

"뭐? 전생자? 그건 전설에나 나오는 얘기 아니었어?"

병사들의 화제가 내 쪽으로 넘어올 것 같다. 평소 이런 건 즐기는 편인 나였다. 현생에서도 커뮤니티에서 어그로 끄는걸 좋아하는 관종이었으니까. 히토미 마스터라는 칭호를 즐길 정도로.

하지만 지금은 피그리티와의 전투와 격렬한 섹스덕에 피곤했다. 괜히 붙잡히기 전에 얼른 막사로 들어와서 간이침대에 누웠다.

'내일 게이트를 파괴하러 가기로 했다. 하지만 정보가 너무 부족해.'

아무래도 지휘 막사에 가서 리스티앙과 얘기를 나눠봐야 할 것 같다. 같이 쉬고 있던 에린델과 세키돌에게 얘기하고 지휘 막사로 나섰다.

"잠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사령관님. 강단백입니다."

"들어와."

항상 찰싹 붙어있던 부관 안드레아는 웬일인지 보이지 않았다.

"내일 게이트를 부수러 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게이트에 대한 얘기가 듣고 싶어서 온 건가?"

"네, 아무래도 정보가 없어서 계획을 짜기가 어렵더군요."

"사실은 이따 저녁에 불러서 얘기를 할 생각이었어. 좀 쉬어야 할 테니."

"아무래도 쉬면서도 가만히 머리를 비우지는 못하는 타입이라서요. 뭐라도 생각할 거리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내일 일에 대해 계획을 짜고 싶었습니다."

"알겠어. 우선 이 지도를 봐줘."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지도를 하나 보여줬다. 거기에는 지금 수비하고 있는 필리포 성을 포함해 주변이 나타나 있었다.

"지금 있는 필리포 성에서 북동쪽에 보이는 성이 라르디노 성이야. 우린 원래 거기서 수비를 하고 있었어. 위치도 큰 강의 바로 뒤라 대량의 병력이 쳐들어오기는 쉽지 않았고, 병력구성도 좋아서 수비를 잘하고 있었지."

"그렇군요."

"그런데 라르디노 성에서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북쪽 멀리에 마물들이 소환되는 게이트가 생성된 거야. 그전까지는 막을만한 숫자였는데 그 후로는 마물들이 쏟아져서 버티기가 쉽지 않았지. 그래도 그땐 마법사와 치유사가 많아서 어렵지만 버틸 수 있었지. 이대론 끝이 없을 거라 생각해서 게이트를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나섰는데."

"루시페르가 나타난 거군요. 저번에 말씀하셨던."

그녀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맞아. 제1군단장이라며 나타난 루시페르가 능력을 쓰자, 마법사와 치유사같이 강한 마력을 지닌 자들은 다 죽어버렸어. 그 후로 나와 리스티앙을 포함해 많은 부사관들이 결사 항전을 했지만, 성이 함락되는 건 시간문제였지."

"이곳에 왔을 때 병력 구성도 어설프고 부사관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했더니 라르디노의 전투에서 대부분 사망했던 거군요."

"맞아. 저번에도 대충은 얘기했었지만, 피해는 아주 컸어. 자칫하면 우린 전멸했었을 거야."

"마물들이 나오는 게이트에는 도착했었던 건가요?"

"게이트 근처까진 갔지만 결국 공격해보지도 못했어. 루시페르가 나타나서 병력의 대부분을 잃었고 나 또한 십인장, 백인장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죽었겠지."

입술을 앙 무는 리스티앙. 그 모습은 슬퍼 보이기도 하고 분노에 가득 차 보이기도 했다.

"마물들의 게이트라는 건 물리적인 공격은 안 통하겠죠?"

"솔직히 말해서 그건 잘 모르겠어. 오래된 사료를 찾아봐도 마물들의 게이트에 대한 기록은 없었어. 과거에 마왕이 나타났을 때는 이런 식의 효율적인 공격 형태는 없었던 모양이야."

"그렇군요. 제가 직접 확인하는 수밖에."

"그런데, 전생자라는 말은 사실인 거지?"

"물론입니다. 굳이 거짓말할 필요가 있을까요 들통나면 그만인 것을."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당연하다는 듯 얘기했다.

"세상에는 이상한 사람이 많거든. 잠깐의 관심 혹은 명성을 위해 거짓말을 일삼는 부류가 많았어."

"그래서 저를 믿을 수 없다는 얘기입니까?"

"아니, 사실 어제 말도 안 되는 크기의 파이어 월을 목격했을 때부터 이상함을 느끼긴 했어. 오늘 군단장을 내쫓아 버린 것에서는 사실 거의 확신했고."

"그런데, 그렇게 묻는 이유는 뭐죠?"

"실감이 나지 않아서지. 어릴 때부터 전설에서 동경했던 전생자가 내 눈앞에 있다니."

항상 강인한 듯이 보였던 그녀의 얼굴에서 마치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이 엿보였다.

"어릴 때부터 군인을 하셨다고 하셨죠? 어떻게 군인이 되신 겁니까? 여자로서는 쉽게 택하기 어려운 길이었을 텐데요."

"궁금한가?"

조금 망설이는 느낌의 리스티앙. 하지만 궁금했다. 외모로만 봐선 전장보다는 꽃집이 더 어울릴법한 가녀린 얼굴의 그녀가 왜 군인을, 그것도 사령관을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는지.

"물론이죠. 꼭 듣고 싶습니다."

그녀는 심호흡을 깊게 하더니 말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 집안은 남자가 없어. 우리 부모님의 자식이라고는 나 하나뿐. 외동딸이지. 하지만 군인가문이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아들을 원하셨어. 그래서 내가 태어난 이후에도 동생을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셨지. 하지만."

잠깐의 머뭇거림에서 좋지 않은 일이 있었다는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어렵게 임신을 하신 어머니는 유산을 하고 말았지. 그 이후로는 아이를 가지기 어려운 몸이 되셨고. 결국 내가 아들이 될 수밖에 없었어. 뛰어난 군인이자 검술가셨던 아버지의 재능을 타고난 나는 검술에 두각을 보여서 기사 시험도 쉽게 통과했지."

"그랬었군요."

"하지만 그리 쉬운 길은 아니었어. 여자라고 무시하는 것들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거든. 그럴 때마다 더 이를 악물고 실력을 갈고닦아서 증명해냈지. 신성제국 과르디올과의 전쟁에서 결정적인 수훈을 했어. 그래서 보병 총 사령관이 될 수 있었지. 물론 전 사령관이 죽은 영향이 가장 컸겠지만."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리스티앙이었지만 마지막 말에서는 물기가 묻어났다.

"설마 그 전 사령관이라는 분은?"

"아, 맞아 우리 아버지지. 로베르토 리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이어서 사령관의 자리를 물려받은 젊은 여기사라. 명문가에 뛰어난 능력을 갖춘 기사였지만, 쉽게 자리를 받은 건 아닐 것이다. 분명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대단하고 존경할만한 사람이겠지.

그리고 내 생각보다 더 힘들고 고통스러운 나날들이었을 것이다.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렇게 살아야 했을 테니까.

"궁금해서 물어본 건 맞지만, 너무 사령관님의 개인사까지 파고든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우선은 사과한다. 그녀에게 슬픈 이야기를 꺼내게 만들었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나에게 이 전쟁을 끝내야 하는 이유를 하나 더 만들어주었다. 보병 총 사령관이라는 높은 직책에도 최전선에 그녀가 있는 건 분명 자신을 몰아세우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아버지의 죽음에 자신이 책임을 느낄지도 모르지.

"괜찮아. 그런데 나도 이런 얘기를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꺼내는 건 처음이군. 신기한 일이야. 당신은 묘하게 사람을 끌어들이는 것 같아."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웃었지만, 절대 가볍지 않은 무게감이 느껴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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