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 초읽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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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롬을 따라서 올라간 길드 2층에는 1층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고급스러운 장식들이 많았다. 넓은 복도에 여러 개의 방이 있었다. 시롬은 그중 가장 안 쪽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노크를 하며 들어가도 될지 여부를 묻는 시롬.
"알렉시님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무슨 일이야? 들어와."
문을 열고 시롬을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가자 그곳에는 붉은 장발의 기품있어 보이는 여자가 있었다. 외모는 젊어 보였지만 풍기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나이는 잘 가늠이 되지 않았다.
"거대 샌드웜 토벌을 했다는 모험가가 계셔서요. 하지만 안내원 중에도 샌드웜의마석을 본 사람은 없어서 직접 검수를 받으려고 올라왔어요."
"뭐? 샌드웜을 잡았다고? 거짓말이겠지. 그런 허풍 치는 놈들이 가끔 있어."
콧방귀를 뀌며 믿지 않는 알렉시라 불린 길드마스터.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정말 잡았습니다. 마석을 보시죠 ."
나는 무시당한 게 기분이 좋진 않았기에 시롬이 들고 있던 마석이 든 주머니를 뺏어 직접 꺼내 보였다.
노란빛의 거대한 마석을 보자 그녀의 얼굴이 놀란 표정으로 바뀌었다.
"샌드웜의마석이 맞군. 어떻게 잡았지?"
"제가 마법을 좀 쓸 줄 압니다. 지렁이 구이로 만들어 버렸죠."
내 대답을 듣자 알렉시의 말투가 험악해졌다.
"헛소리 하지 마라, 네가 고위 대마법사급이라도 된단 말이냐? 기껏해야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얼굴인데."
"나이와 실력은 상관없지 않습니까?"
"물론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그런 거짓말에 태연히 속을 정도로 내가 그렇게 상식이 없진 않아. 난 마법사의 탑에도 가본 적이 있어."
화가 난 얼굴로 열정적으로 자신의 경험을 얘기하는 그녀.
"마법사의 탑에서 재능이 넘친다고 평가받는 마법사들도 네 나이 때는 기껏해야 5, 6서클 마법까지 밖에 쓰지 못해. 나이 든 노인 중에서도 대마법사는 드물고."
"그렇군요. 저는 타지에서 와서 이 대륙의 마법 실력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합니다."
"웬만한 마법으론 샌드웜에게 상처 내는 것조차 불가능하단 말이야. 네가 사실 노인인데 젊은이로 폴리모프(Polymorph)한게 아니라면 말이지."
폴리모프(Polymorph). 원하는 대상으로 변신하는 마법. 판타지 소설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었다. 이곳에 오고 나선 떠올린 적 없는 마법이었다. 나중에 써먹어봐야지.
"상상력이 좋으시네요. 전 그냥 20대 청년입니다."
"그럼 이 마석은 훔쳐 왔다는 결론이 나겠지. 감옥에 처박힐 준비는 됐나?"
내가 상대하고서도 샌드웜이 비상식적으로 강한 몬스터라는 건 알았다. 하지만 이 정도로 의심을 받을 줄 몰랐는데, 좀 더 그럴듯한 스토리를 가져올 걸 그랬다.
전생자라는 정체를 밝혀야 하나? 이 세계에서는 전생자가 인식도 좋은 모양이다. 하지만 굳이 지금 정체를 밝힐 이유도 없다. 그렇다면 간단한 실력행사를 하면 될 것.
"그럼 제가 고위 마법이 사용 가능하다는걸 증명하죠."
나는 중력을 역전시키는 리버스 그래비티(Reverse Gravity)를 이용해 내 옆에 있던 의자를 공중에 뜨게 했다.
"의자를 띄운다? 대단하네. 하지만 현자급 마법은 아니지 않아? 그냥 염동력 마법 같은데."
의심이 많은 그녀. 쉽게 믿어주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작게 쉬고 그녀를 공중에 띄워버렸다.
"리버스 그래비티(Reverse Gravity)"
갑자기 공중에 띄워져서 몸을 가눌 수 없어지자 그녀는 소리를 질렀다.
"꺄악! 뭐하는 짓이야! 내려줘. 내리라고!"
얼굴이 시뻘개져서 소리치는 모습에 조금 미안해졌으나, 치마를 입은 것도 아니니 괜찮지 않을까. 나는 디스펠 마법을 사용해 그녀를 풀어주었다.
"좋아. 믿어주지. 직접 당해보니 알겠어. 이거 염동력 마법이 아니네. 염동력으로 사람을 뒤집는 건 들어본 적도 없으니까. 근데 방식이 너무 무례하지 않아?"
"끝까지 절 안 맞아주신 건 무례하지 않고요? 그렇다고 여길 불바다로 만들어버릴 수도 없으니, 저로선 최선이었습니다."
"후우 알겠어. 다음에 또 보지. 마석은 나한테 주고 가고 현상금은 밑에서 받아 가."
"그럼, 실례했습니다."
그렇게 시롬과 나는 그녀에게 인사하고 방 밖으로 나왔다.
"조금, 과하셨던 거 아닐까요?"
"이쯤 하지 않으면 끝까지 의심받을 거 같아서요. 저도 조금 기분이 나빴었나 봐요."
"길드장님은 자존심이 세신데 걱정되네요. 그나저나 중력 마법이라니 단백님은 대체 어떤 마법까지 사용 가능하신 거에요?"
"그건 남자의 비밀입니다."
그 후 1층으로 내려와 시롬에게 200G과 S급 모험가 배지를 수령했다. 처음 들어보는 골드량에 묵직함이 남달랐다. 손목까지 흐뭇해지는 느낌.
"그래서 제가 샌드웜을 잡으면, 저녁을 같이 먹기로 한 약속은 오늘 가능할까요?"
"시간이 있긴 한데, 꼭 그 약속 지켜야 되는 거예요?"
"물론이죠. 약속은 약속이니까요."
"알겠어요. 6시에 퇴근하니까 그때 길드 앞으로 오세요."
"좋습니다. 이따 보죠."
가벼운 발걸음으로 길드 밖으로 나섰다. 약속까진 받아냈고, 저녁때 그녀를 어떻게 함락시킬지가 걱정이었다. 전선에 가기까지 시간은 6일뿐. 태그력도 많이 채워 놓아야 하니 오늘부터는 잔뜩 해야 할 것이다.
노른에서는 타이밍이 안 좋았지만, 이번 만큼은 놓치지 않겠다.
길드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무기점으로 향했다. 아름다운 빛깔의 미스릴 검을 살 생각에 잔뜩 신이 났다.
"어서 옵쇼~"
"안녕하세요. 저번에 블랙 미스릴 검을 보고 갔었는데, 아직 있나요?"
"아직 고대로 있슈. 따라오셔."
커튼이 쳐져 있는 상점 안쪽으로 따라 들어갔다.
『블랙 미스릴 소드 : 지금은 갈 수 없는 엘프들의 나라 페르난에서 희귀하게 발견되는 블랙 미스릴로 만들어진 검. 경도와 예리함 모두 최상급이며 일반적인 검으로는 이 검과 맞설 수도 없습니다. 300G 』
여전히 검은빛을 뽐내며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고 있는 블랙 미스릴 소드.
"바로 사겠습니다."
방금 길드에서 받아온 200G와 원래 있던 골드 중 100G를 주인장에게 주었다.
"웜매, 어디서 이 많은 돈을 하루 만에 구했대. 뭐 하는 사람이슈?"
"음 그냥 모험가입니다. 아직은."
그렇게 때깔 좋은 블랙 미스릴 소드를 구매하고 바로 숙소로 돌아갔다. 당연히 동료들에게 자랑하기 위해서.
"짜잔~ 내가 돌아왔다."
숙소문을 열고 검집에서 블랙 미스릴 소드를 꺼내며 외쳤다.
"오오~ 대장님. 사고 싶다 던 검이 그거야? 멋있어~"
"때깔 좋은 거 봐, 비싼 게 좋긴 좋네."
세키돌과 비렌데의 반응에 더욱 기세가 등등해졌다. 사실 300G는 너무 비싸지 않나 싶은 감이 있었다. 이 여관에선 가장 큰 이 방도 일주일 묵는데 10골드면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리했나 싶은 생각도 들었는데, 그녀들의 반응이 좋아 조금은 위안이 됐다.
"블랙 미스릴 오랜만에 보네. 근데 정말 300골드나 주고 산 거야?"
"응. 주인장 말로는 이것도 싼 거래. 블랙 미스릴 구하기가 이젠 불가능하다면서."
"그렇긴 한데, 300골드면 시골에선 작은 집도 살 수 있는 돈이야. 얼마나 많은 돈인데."
에린델은 역시 현실적이었다. 그렇게 질책하는 말투는 아니었지만, 용돈을 마구 쓰고 와서 혼났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네네, 죄송해요. 엄마. 돈은 아껴 쓸게."
"누가 엄마야! 엘프 나이로 따지면 내가 너보다 연하라고!"
"그럼 나보고 오빠라고 부를 거야?"
"아니 그건 죽어도 싫어. 나보다 125년이나 덜 살았는데 오빠는 무슨 오빠."
"아무튼 많이 쓴 건 맞아. 하지만 벌어올 게 걱정 마. 나 능력 있잖아."
"알겠어. 아무튼 곧 왕국군 소속이 되니까 돈 걱정은 없겠지만, 앞으로는 벌면 좀 모아두자."
확실히 남은 돈은 30골드 남짓.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확실히 돈을 좀 벌어놓긴 해야겠다.
아직 저녁까진 시간이 많이 있었으니 뭘 할까 고민하다 저번에 서점에서 사 온 책을 읽기로 했다.
검술서적 한 권과 마법서 한 권을 사 왔었는데, 아직 별로 읽지 못했었다. 검술서적은 큰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마법서는 마법의 종류를 파악하는 것만 해도 나에겐 새로운 마법을 사용 가능한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에 큰 전력상승이 될 것이다.
그렇게 독서삼매경에 빠졌다가 자연스럽게 낮잠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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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셨어요?"
내가 조금 늦은 탓에 시롬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항상 길드의 유니폼만 입은 모습을 보다 사복을 입은 모습을 보니 신선했다.
화려하진 않지만, 그녀에게 잘 어울리는 단정한 하늘색 원피스였다.
"제가 조금 늦었네요. 미안해요."
"괜찮아요. 뭐 드시고 싶으신 거 있으세요?"
"저보다는 시롬씨가 먹고 싶으신 거로 하시죠. 저는 아직 이 마을의 맛집을 모르기도 하고요."
"그럼, 따라오세요. 근처에 파에야를 맛있게 하는 곳이 있어요."
"파에야면 밥을 볶은 음식이죠?"
"뭐, 실제로는 끓이는 거긴 한데 비슷해요."
그렇게 그녀와 대화를 하며 그녀가 안내하는 식당까지 걸었다.
식당은 생각보다 가까워서 금방 도착했다. 인테리어가 산뜻한 곳이라 분위기가 괜찮았다.
"뭐라고요? 그 길드장님 나이가 39세?!"
"네 맞아요. 젊어 보이시지만 경험이 많으신 분이에요."
음식을 기다리면서 그녀와 대화를 이어갔다. 아까 만났던 길드장이 곧 40을 앞두고 있었다니. 외모로는 20대로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출장을 꽤 멀리 나오셨네요. 시롬씨는 원래 집은 어디 신가요?"
"저는 원래 집이란 게 없어요. 고아 출신이거든요."
본의 아니게 말실수를 한듯하다.
"그래서 저는 성도 없어요. 시롬이라는 이름뿐. 이것도 보육원에서 지어주신 거고요. 단백씨의 이름을 알았을 때 세글자 뿐이라 왠지 동질감이 들었어요."
"하하, 저는 타국에서 온 거라 사실 성이 강이고 이름이 단백이지만요."
"그래요? 동방에서 오셨다고 하셨었죠. 성이 한 글자라니 신기한 나라네요."
그렇게 대화를 이어가다 자연스레 포도주도 주문해서 마시며 얘기를 나눴다.
"시롬씨는 남자친구 있어요?"
"네? 아뇨, 저는 길드 일 때문에 출장도 잦은 편이라."
이렇게 예쁘고 몸매도 좋은데 남자친구가 없는 모양이다. 사실, 일 때문이라기 보다는 시롬의 성격 탓이겠지. 길드에서도 일 얘기 말고는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걸 본적이 없다. 주변의 안내원들은 붙임성이 좋던데, 시롬은 조용한 편이었다.
"혼자인 건 외롭지 않아요?"
"글쎄요, 혼자가 너무 익숙해져서 잘 모르겠어요. 그리고 저 같은걸 누가 좋아하겠어요."
시롬 정도의 외모면 고백도 많이 받았을 텐데, 의외로 자존감이 낮은 것 같았다.
"대시 받은 적도 많을 거 같은데, 아니에요?"
"그런 건 그냥 어떻게 한 번 해보려고 치근덕대는 거잖아요. 그런 사람들은 아무한테나 다 그러고. 절 좋아해 주는 사람은 못 봤어요. 보시다시피 성격도 밝지 못해서요."
"제가 시롬씨한테 관심이 있다면요?"
"네?"
그녀가 손에 들었던 잔을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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